한국 상업영화의 도: 불의의 시대
- 2014년 상반기와 여름 블록버스터 속 ‘아이의 죽음’에 관하여


영화평론가 이후경


한 달쯤 전, <군도: 민란의 시대>에 관해 선배와 취중 논쟁을 벌이다 잠시 우울증을 얻었다.
나: 지리산에서 만주 웨스턴으로 막 넘어가는 이 영화의 놀랄 만한 점프 능력도, 아름다운 강동원님께서 본의 아니게 <전설의 고향>을 패러디하게 된 상황도 모두 웃어넘기겠어요. 하지만 후반부에서 극중 인물들이 마치 관객에게 스릴을 느끼라고 협박하듯이 갓난아이를 든 채로 칼을 휘둘러대는 장면들은 절대 참을 수 없어요!
선배: (절래절래) 그건 한국 상업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트릭이야. 이 영화의 특수한 문제점으로 논하긴 어렵지.
선배의 지적에 동의하려니 더 큰 비관이 엄습했다. 어쩌다 아이의 목숨은 한국 상업영화의 가장 값싼 보편적 상술로 전락한 것일까?

이를 테면 이런 장면들이다. 조윤(강동원)이 지리산 추설의 본거지를 습격하는 장면. 마향(윤지혜)은 노닥거리던 아이들을 어딘가로 데려가 이곳에 숨어있으라 당부하는데, 마침 등에 업고 있던 조윤의 조카는 함께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그대로 싸움판으로 달려 나간다. 칼부림이 난무하는 가운데 위치한 아이는 조윤에게 발견될 때까지 그 자리에서 관객의 가슴을 졸이게 하는 소명에 충실히 임한다. 혹은 조윤이 조카를 품에 안고 도치(하정우)와 대결하는 장면. 대나무 숲 한가운데에서 벌어지는 이 결투 장면은 얼핏 무협영화를 떠올리게 하지만, 긴장을 유발하고 유지하는 것은 강렬히 맞부딪히는 두 사내의 쇼트가 아니라 조윤의 한쪽 팔에 아슬아슬하게 안겨있는 아이의 형상이다. 화면 밖 관객의 시선과 심리를 조종하기 위해 화면 속 아이를 수단화하는 이 장면은 무도(武道)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아이의 목숨을 가지고 재미를 흥정하는 한국 상업영화의 불의는 <우는 남자> <역린> 등에서도 발견됐다. <아저씨>에서 아동 납치, 노역, 학대를 서사적, 시각적으로 활용해 흥행에 성공한 바 있는 이정범 감독은 보다 본격적으로 아이의 죽음을 끌어들였다. 가장된 우연 속에서 필연적으로 죽임을 당하게 된 아이에 대한 기억을 자아도취적 살육 액션의 동력으로 삼은 것이다. 그런가하면 <역린> 역시 광백(조재현)에 의해 살수로 키워지는 아이들을 전시하는 극악무도한 이미지들을 통해 시나리오의 허점을 감추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14년 여름, 한 관객으로서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는 스스로가 가장 부끄러웠던 순간은 <해무>를 볼 때였다. (유사) 아들을 죽이려 드는 아버지들, 그런 (유사) 아버지들을 살해한 뒤 소녀에게 “집에 가자”며 손을 내미는 소년, 그리고 배 밖으로 투신하는 아이들. 영리한 투자 배급사와 뛰어난 제작진의 손끝에서 나온 상업영화가 지난 4월의 그 일을 이토록 교묘히 이용하는 방식을 택했음을 확인했을 때, 이 모든 사태가 나를 포함한 대중 관객의 은밀한 욕망이 불러낸 참극은 아닌지 문득 자문하게 됐다. 스펙터클과 서스펜스의 도구로 전락한 아이들의 죽음, 그 비열한 이미지들이 난무할 수 있게 된 것은 아이들의 죽음을 가장 쉽게, 가장 많이 ‘클릭’하곤 하는 우리 대중의 손끝에서 비롯된 상황이 아닐까?

우연히 그로부터 몇 주 뒤, 서울아트시네마의 ‘2014 시네바캉스 서울’ 프로그램 덕분에 스크린으로 다시 볼 수 있었던 마이클 만의 <히트>에서 정반대의 상황을 마주했다. 이 걸작은 아이의 목숨을 볼모로 잡아두는 행위를 가차 없이 응징했다. 닐 맥컬리(로버트 드 니로)가 이끄는 범죄조직의 일원이 도망치다 제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길거리의 아이를 인질로 삼은 채 경찰에게 총질을 해대는데, 그는 결국 뒤로 돌아서자마자 자신의 정수리를 겨누고 있던 빈센트 한나(알 파치노)의 손에 죽는다. 배신자조차 등 뒤에서 총을 쏘는 법이 거의 없는 만의 영화에서 이런 식의 처벌은 매우 모욕적인 것이다.

물론 아이의 죽음을 영화적 금기로 남겨둬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다만 그것이 현재 한국 상업영화에서 나타나고 있는 방식보다 훨씬 신중하고 사려 깊게 이루어져야함을 지적하고 싶었다. 한국 상업영화와 그 앞에 앉아있는 관객들이 이대로 스스로를 방기한다면, 절멸의 시대에 아이의 죽음은 계속 저렴한 상품으로 소비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9 08:53: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