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와의대화]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편, 『아카이브 스토리: 김달진과 미술자료』,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2015.


“단 한 명의 작가라도 잊히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제 소명입니다”

김달진과 한국근대미술 세계




한국 근대미술자료를 수집해온 수집가이자 한국근대미술 아카이브를 최초로 창립한 아키비스트(Archivist), 김달진을 만났다. 벚꽃이 만발하던 4월, 서울 홍지동에 새롭게 개관한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에서였다. 관장실 입구로 들어섰을 때, 한쪽 벽면에는 세로 50cm 가량의 흰색 파일 백여 권이 서가에 빼곡했다. 파일 상단에는 구본웅, 김환기, 김흥수, 나혜석, 이인성 등 근대미술가들의 이름이 가지런히 적혀 있었다. 김달진 관장은 최근 타계한 김흥수 화백의 이름이 적힌 스크랩북을 펼쳐 들었다. 예산 부족으로 한때 폐관 위기에 처했던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이 미술계 각종 인사들의 지원으로 새롭게 개관한 것에 대해 그는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한국미술자료의 본산,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김달진미술연구소와 박물관이 종로구 평창동, 통의동, 창성동, 마포구 창전동 시절을 지나 홍지동에서 새롭게 개막되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시작한 스크랩북이 박물관으로 건립되기까지 40여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지난 2013년 폐관 위기에 처했던 박물관이 많은 분들의 후원으로 새롭게 개관할 수 있었던 데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저희 박물관에는 한국 미술에 관한 구술과 기록 자료가 총체적으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한국 작가를 포함하여, 주목할 만한 전시, 비평, 미술사를 비롯한 각종 학술행사, 미술을 둘러싼 다양한 사건이 총망라되어 있지요.”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에는 한국에서 발행된 대다수 미술잡지의 창간호가 소장되어 있었다. “자료와 아카이브의 차이점은 원본성에 있습니다. 자료가 복제를 통해 대량생산될 수 있다면 아카이브는 복제가 불가능한 원본들이지요. 1961년 창설된 <앙가쥬망> 동인회의 활동지와 같은 희귀 자료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앙가쥬망 회원들이 당시 모임에서 토로되었던 말들이 생생하게 보존되어 있습니다. <앙가쥬망> 동인의 작품을 연구하려는 연구자가 있다면 이 자료들은 대단히 소중한 기록이 될 것입니다.”


서양명화 스크랩북 들고 미술사가 이경성 방문

김달진 관장이 처음 미술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한 것은 모친이 별세한 이후 『여원』, 『여상』, 『주부생활』, 『선데이서울』 등에 실린 ‘세계의 명화’ 작품들을 스크랩하면서부터였다. “학창시절부터 미술자료 수집하는 일이 너무나 행복하고 즐거웠습니다. 미술 기사들을 스크랩하다 보니 당시 비평가이자 홍익대 박물관장으로 계셨던 이경성 선생님의 글이 미술잡지에 많이 실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이경성 선생님께 여러 통의 편지를 보냈지요. 프린터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등사판에 원지를 놓고 롤러로 밀어서 편지들을 인쇄했습니다. 편지를 여러 통 보내니 이경성 선생님께서 한 번 보자시더군요. 스크랩북 열 권을 보따리에 싸서 무턱대고 홍대 앞으로 찾아갔습니다. 이경성 선생님이 얼마나 대단한 분이신지 아니까 다리가 후들거리더군요. 다행스럽게도 선생님께서는 정성이 대단하다면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일하도록 주선해주셨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10년간 근무하다 가나아트센터 자료실장으로 근무처를 옮겼던 김달진 관장은 2002년 김달진미술연구소를 설립하고 <서울아트가이드>를 창간하며 독립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오늘날 제가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장과 김달진미술연구소장, 그리고 월간 서울아트가이드 편집인이자 한국아트아카이브협회장으로 근무하게 된 데에는 미술사가이자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역임하셨던 고(故)이경성 선생님과의 만남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이경성 선생님은 자식이 없었던 탓에 저를 아들처럼 아껴주셨습니다. 그 분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저도 없었겠지요.”


미술계의 잊혀지는 작가들에 대한 안타까움

처음 서양미술에 관심을 가졌던 그가 한국미술에도 관심을 지니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72년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근대미술60년展》이었다. 입장료가 70원이던 시절 전시를 관람했다는 김달진 관장은 ‘근대미술 6대가’나 이중섭이나 박수근의 자료는 있는데, 다른 작가들의 자료는 없는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고 했다. 그 후로 주말이면 한쪽 어깨에 가방을 둘러매고 미술 전시 티켓, 브로슈어, 도록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금요일마다 일대 화랑과 미술관에 나타났던 탓에 ‘금요일의 사나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수많은 작가들의 연혁을 소상히 외우던 탓에 ‘걸어다니는 미술 사전’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활동해온 수많은 미술 작가들이 잊히는 게 안타까웠습니다. 밤하늘을 보면 일등 별, 이등 별만 빛나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별이 빛나고 있잖아요. 미술계에서 이름 없는 별처럼 스러져가는 작가들까지도 기록해두고 싶었습니다. 저는 미술이 인간에게 대단히 소중한 분야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여기에 종사하는 사람들 또한 기억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요.”

김달진 관장은 미술계의 정책적인 지원이 비엔날레와 같은 가시적으로 성과가 드러나는 행사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미술자료로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작업이 의미 있는 일이라는 점에는 모두가 공감하지만 수익성이 적기 때문에 지원이 협소하다는 것이다. “향후에는 지금까지 축적한 아카이브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중입니다. SNS와 연계하여 자료를 대중들에게 공개하는 방향도 도모하고 있어요. 국내외를 방불하고 한국미술을 연구하려는 연구자들에게 저희 박물관이 구축한 아카이브는 소중한 연구 자산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대학원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묻자 김달진 관장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조언을 덧붙였다. “첫 번째로는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열정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스스로 좋아하는 일 중에서도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자신에게만 좋은 일을 하는 것은 무가치합니다. 자신에게 즐거움을 주면서도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어야지요. 마지막으로 무엇을 하든 천천히, 차근차근 하라는 말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처음부터 너무 큰 꿈을 좇는 것보다는 작은 것 하나부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도 박물관을 건립하겠다는 큰 목표를 세우고 미술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의 자료를 스크랩하는 작업이 즐거웠고 수십 년간 지속해왔을 따름이죠. 저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성경 <욥기>에 나오는 “네 시작은 미미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는 구절을 늘 생각합니다. 미미하게 시작했어도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추구하다보면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창대함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인터뷰 정리: 선민서 기자 minseo@korea.ac.kr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1 09:29: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