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우발언대] 대학원생의 열정페이

얼마 전 일본의 반빈곤운동의 선두에 선 아마미아 가린이 쓴 󰡔프레카리아트(부제 : 21세기 불안정한 청춘의 노동)󰡕라는 책을 인상깊게 읽었다. ‘프레카리아트’는 이탈리아에서 처음 만들어진 신조어 불안정한(precario)과 노동자 계급(proletariat)을 합성한 단어로 계약직, 인턴, 아르바이트 등의 비정규직 노동자층을 가리키는 말이다.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인 청춘을 착취하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의 문제만은 아닌가보다. 이런 사실이 위안이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세대의 절망이라는 것이 어디에서도 빠져나갈 수 없는 늪처럼 느껴져 슬펐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사회 탓은 하고 싶지 않다, 내가 아무리 불안정하고 가난해도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되게 낫다”고 말하는 프리터(자유(free)와 아르바이터(arbeiter)를 합성한 신조어)들의 이야기였다. 나도 모르게 “지도교수 탓은 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래도 한 달에 10만원 받는 패션계 인턴과는 비교도 안 되게 나으니까”라고 바꿔 읽고 있었으므로.


어쩌면 ‘공부하는 것과 인턴은 엄연히 다르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대학원생들도 공부와 연구라는 이름으로 노동을 착취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도교수의 일을 대신하고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각종 영수증 처리와 회의 준비 같은 ‘잡일’들을 처리하느라 정작 자신의 공부와 연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대학원생들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나는 본의 아니게 우리나라의 진로교육이 얼마나 엉망진창인지를 나의 삶으로 구현해내는 바람에 이공계와 인문사회계의 대학원을 모두 경험했다. 이공계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에는 9 to 10(9시 출근 10시 퇴근)이 룰이었으나, 1, 2학기에는 당연히 선배들보다 일찍 나가 청소를 하고 실험 준비를 해야만 했고 밤을 새가며 실험을 하는 것도 부지기수였다. 정작 공부는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아침시간과 주말을 이용해야만 했다. 내가 이러려고 대학원에 왔나 생각이 들 때마다 ‘다들 그렇게 하니까’, ‘이 모든 게 배우는 과정이니까’ 하고 참고 견뎠다. 그리고 내가 얻은 건 허리디스크를 비롯한 각종 질병이다. 인문사회계의 대학원은 좀 나았을까? 좀 더 인간답게 살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훨씬 나았지만 여전히 지도교수는 프로젝트의 연구보조를, 연구소의 행정업무를 요구했다. 그리고 그때에도 나는 졸업이라는 내 목줄을 쥐고 있는 지도교수의 올가미 안에 자발적으로 갇혀 있었다.  


지도교수와 대학원생의 갑을관계 문제는 물론 어제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성추행과 같은 부도덕한 행위에 대한 갑의 권력에 대해서는 비판의 소리를 높이면서도 정작 노동착취의 문제는 잘 다루어지지 않는다. 연구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지도교수가 시킨 일을 하면서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지 않는 것은 물론 심지어는 노동을 강요받는다(물론 양심적이고 인격적인 교수님들이 존재하겠지만 그런 분들이 다수는 아님에 틀림없다). 아직은 불완전한 연구자이지만 우리도 지식노동자이다. 이 모든 과정을 교육이라고, 훈련이라고 말한다면 열정페이와 다를 바 없다. 아니, 학위를 미끼로 강요한다는 측면에서는 오히려 더 심각하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 지식노동을 강요받으면서도 자발적인 것이라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프레카리아트󰡕의 저자 아마미야 가린의 말처럼 스스로 착취당하는 쪽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스스로의 상황을 긍정할 수 없어서 애써 착취의 현장을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닌지 곰곰이 돌아봐야할 일이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1 19:57: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