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송전탑 방문기, 마을 주민과 활동가들의 새로운 공동체>

  밀양역에 도착하자 따스한 봄볕이 쏟아졌다. 밀양역 앞에는 올해로 78세를 맞이한 윤여림 씨가 마중 나와 있었다. 부북면 외양리를 향해 차를 타고 달리는 동안 한국전력공사 건물 앞을 지나쳤다. 이곳에서 밀양시 부북면의 어르신들은 1년이 넘도록 매일 아침마다 1인 피켓 시위를 한다. 부북면 외양리에는 이제 막 벚꽃들이 피기 시작했다. 마을 뒷산에 선 송전탑을 제외한다면 평화로워 보이는 마을이었다. 낮은 돌담길을 따라 정임출 씨 댁으로 들어가자 거실에 봄나물과 추어탕이 올라간 점심상이 차려졌다. 마을 어르신 네 분과 둘러앉아 점심을 먹으니 푸짐하고 속이 든든했다. 밀양의 어르신들은 다른 지역에서 찾아온 분들을 재우고 먹이는 일이 많다고 했다.

송전탑 건설 이후, 무너진 마을 공동체

  송전탑이 건설되면서 마을 공동체는 급속도로 와해되었다. 한전과 한수원 직원들은 외양리 주민들을 찾아다니며 회유했다. 때가 되면 선물을 하고 지금 찬성하지 않으면 보상금을 받을 수 없다는 협박을 덧붙이기도 했다. 현재 송전탑 건설에 찬성하고 보상금을 받은 주민이 대다수다. 외양리에서 끝까지 보상금을 받지 않고 반대 의견을 고수하는 주민은 많지 않다. 정임출 씨 댁으로 들어가는 길 마당에는 CCTV 한 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한전에 지원을 받아 정임출 씨 옆집에서 설치한 CCTV였다. 정임출 씨 댁에 오가는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감시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예전에는 우리가 이렇지 않았어요. 지금 이 근방에서 저희 부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반대파에요. 돈에 눈이 멀어서 한전이 하는 일에 찬성을 해버린 거죠. 찬성한 사람들과 반대한 사람들은 더 이상 대화하지 않아요. 그래서 이 마을 부근에서 저희 부부를 제외하면 아무도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어요. 가끔 다른 마을이나 지역 사람들이 찾아오거나 할 때를 제외하면 하루종일 대화 상대는 저희 둘뿐이에요."

송전탑 투쟁하며 곳곳에 상처 입은 주민들

  올해로 81세를 맞이한 손희정 씨는 대대로 이 마을에서 살아왔다. 조상이 밀양에서 산지 500년이 되었다. 덕촌할매라 불리는 손희정 씨는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밀양에서 자랐다. 손희정 씨는 송전탑 투쟁 당시 경찰과 용역들과 수차례 몸싸움을 벌이면서 몸무게가 30kg까지 빠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했나 싶어요. 아마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아요. 장영식이라는 사진작가가 밀양 투쟁 현장을 동행하면서 찍은 사진이 있는데 이 사진들을 다시 보면 가슴이 너무 아파요. 그 사건들로 저희들 마음에는 깊은 원한과 슬픔이 자리잡게 됐어요."
송전탑 투쟁이 계속되는 동안 주민들은 한전 직원과 용역뿐만 아니라 공권력과도 지속적으로 대립해야 했다. 윤여림 씨는 건설자재를 나르려던 경찰을 막다가 왼발 뼈에 금이 가기도 했다. 밀양에서 반대투쟁을 하다가 병원으로 긴급 후송된 사람만 100여명에 이른다. 마을 주민들이 송전탑이 설치되기로 한 산 주변을 둘러싸자 한전은 헬리콥터로 건설자재를 운반했다. 매일 40여대의 헬리콥터가 외양리 마을 뒷산으로 오갔다. 지옥 같은 나날이었다. 외양리 마을 어르신들은 지금 송전탑으로 765kV의 전류가 흐르지 않는다고 했다. 전력량이 부족해서 반드시 설치해야 한다고 강변했으나 사실상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외양리 주민들은 그럴 거면 어째서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의사를 짓밟고 송전탑을 건설해야 했느냐고 항변했다.

투쟁의 끝, 연대의 출발

  밀양 송전탑 건설은 외양리 주민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이전에 사회문제들에 큰 관심이 없던 주민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누구보다도 열심히 국내의 사건들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최근에는 대만과 일본 후쿠시마 지역의 활동가들이 밀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밀양이 탈핵 탈원전 운동의 메카가 되어가는 것이다.
밀양 송전탑 관련 보도가 국내에 알려지기 전까지 밀양 주민들은 외로운 싸움을 이어나갔다. 이치우 어르신의 분신은 밀양 송전탑 투쟁의 분기점이 되었다. 희망버스가 밀양으로 왔고 3000여명의 시민이 밀양시청부터 한국전력공사 본사 건물까지 행진을 했다. 외로운 싸움을 이어나가던 주민들은 그 순간 함께 연대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너무나 감사하고 기뻤다고 말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외양리 주민들은 탈핵운동 전문가가 되었다. 밀양 송전탑 사건과 같은 일이 비단 밀양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권력 앞에서 무참히 짓밟히는 경험을 한 이들은 다른 사건을 볼 때마다 남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을 조직하여 다른 투쟁의 현장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연대의 움직임을 그렇게 계속되었다. 서종범 씨는 가족여행으로 제주도에 갔을 때도 다른 곳은 제쳐두고 먼저 강정마을로 향했다고 했다. 서종범 씨와 정임출 씨는 최근에 경주에 건설된 핵폐기장처리시설 지하에도 방문하기도 했다. 그렇게 밀양 주민들이 전국 각지를 돌며 원전 반대 투쟁의 현장을 방문한 기록은 최근에 <탈핵 탈송전탑 원정대>라는 책으로도 출간되었다. 2014년에 출간된 이 책에는 밀양 주민들이 타지역의 원전 반대 투쟁 현장을 방문하고 연대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최근에는 세월호 유가족 분들도 밀양에 왔다 갔어요. 그분들도 공권력에 의해 희생된 분들이고, 정부가 엄떤 식으로 거짓말하는지를 똑똑히 지켜 본 분들이에요. 세월호 어머니들이 밀양에 오더니 친정에 온 것 같아서 마음이 따듯해진다고 말을 했어요."
정치에 관심이 없던 외양리 주민들은 송전탑 건설 이후로 녹색당에 가입했다. 지금 이들은 녹색당 당원으로서 대한민국에 지어지는 원전 관련 사건들에 자신의 일처럼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가 이런 운동을 하는 게 그냥 우리만을 위한 게 아니에요. 후손들을 위한 거예요. 저희는 이제 죽을 날도 얼마 안 남았어요. 하지만 저는 제 자식들에게, 손자들에게, 그리고 후손들에게 떳떳해지고 싶어요. 적어도 지금과 같은 세상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요.“

밀양대책위 활동가와 마을 주민들의 공동체

  밀양송전탑대책위에 소속되어 있는 활동가들은 마을 주민들과 지속적인 유대 관계를 맺고 있다. 밀양 출신인 이계삼 씨는 밀양 765kV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 사무국장으로 일하면서 밀양 송전탑 투쟁에 함께했다. 그 외에도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활동가들이 밀양으로 모여들었다. 밀양 주민들은 이들 활동가들과 아직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 연락을 주고받는다. 국내에서 사건이 일어난 현장에 연대 방문을 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외양리 주민들은 밀양과 같은 일이 다른 곳에서는 절대로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념으로 다른 현장에 연대 방문을 하곤 한다고 말했다.
"예전에 천주교 쪽에 한 신부님이 찾아오셔서 저희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밀양 사람들이 일제 시대로 따지면 독립운동가들이라고요. 물론 저희가 독립운동하신 분들에게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이야기해주시는 게 너무나 감격적이었어요."
전기가 인간보다 소중한 것처럼 여기는 정부와 한전을 향해 인간과 인간적인 삶의 가치가 소중하다고 외치는 이들은 이 사회의 소수자다. 당연하고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는 이들이 소수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인터뷰를 마칠 때쯤 밀양 어르신들은 밀양대책위 소속 김태철 활동가들과 통화를 했다. 내일 기장으로 향할 약속을 잡는 것이었다. 기장은 원전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는 지역 중 하나다. 마을 어르신들은 이곳에 방문하여 투표 독려 활동을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런 조그만 움직임들로 변화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저희가 그토록 투쟁했음에도 결국 송전탑이 들어섰습니다. 하지만 그 싸움의 과정에서 저희는 다른 곳에서 비슷한 곤경을 겪는 분들이 얼마나 비참하고 비통한 심정인지 알게 되었어요. 이제 저희는 그분들과 함께할 겁니다."

선민서 기자 minseo@korea.ac.kr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4 17:2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