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시대’의 문학을 위한 새로운 제언

       <문학과 사회>

  1920년 7월 25일, 일제 치하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 김억, 염상섭, 남궁벽 등 12명의 문인들이 합심해 발행한 문예동인지의 제목은 ‘폐허(廢墟)’였다. 독일의 시인 J.C.F. 실러의 시구 “옛것은 멸하고 시대는 변하였다. 내 생명은 폐허로부터 온다”에서 따온 제호였다. 제국/식민권력의 억압과 검열이 횡행하는 암울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3·1운동의 섬광과 함께 탄생한 문예지는 그렇게 ‘폐허로부터 길어올린 생명’을 꿈꾸었다. 이 시대가 ‘폐허’와 같다는 인식은 1970년대에도 다르지 않았다. 1970년 <문학과 사회>의 전신인 <文學과 知性(문학과 지성)>의 창간사에서도 문인들은 “무엇이 이 시대를 사는 한국인의 의식을 참담하게 만들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2016년의 현재, 우리는 여전히 이 질문이 유효하다는 것을 확인한다. 기대와 절망 사이에서, 문학은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좌절하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해왔다.

문단권력 논란 그 이후
‘창조와 저항의 거점’으로서의 창간 정신 되살려야

<창작과 비평>
  지난해, 신경숙 표절 논란 이후로 문학계에서는 ‘문단권력’에 대한 논쟁이 점화되었다. 한국의 3대 문예지로 일컬어지는 <창작과 비평>, <문학과 사회>, <문학동네>가 문단권력의 주축으로 지목되면서, 이들에게 비판과 자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창작과 비평>(통권 171호)이 창간50주년 기념호를 발행하기에 앞서 백낙청 편집인, 김윤수 발행인, 백영서 주간이 퇴임했다. 그리고 신임 주간은 한기욱(인제대 교수), 신임 부주간은 이남주(성공회대 교수)로 교체되었다. 1966년 겨울, <創作과 批評> 창간호가 발행될 당시 백낙청은 ｢새로운 창작(創作)과 비평(批評)의 자세(姿勢)｣라는 글로 권두언을 열었었다. 백낙청 씨가 명예편집인으로 물러나고 신임 편집위원들이 들어선 <창작과 비평>은 이번 봄호부터 체재 개편을 시도했다.
<창작과 비평>의 첫 번째 특집은 국내외 문인, 연구자, 시민운동가, 편집자의 인터뷰로 구성되었다. 김진호(한백교회 담임목사, 한국신학연구소 연구원), 김행숙(시인), 이계삼(전 국어교사, 교육운동가), 이항규(한양대 에리카캠퍼스 글로벌다문화연구원 연구원 연구교수), 조효제(성공회대 교수), 오시까와 쥰(일본 인문잡지 <겐다이시소오(現代思想)> 편집자)가 <창작과 비평>를 구독한 후의 소감과 향후 <창작과 비평>의 혁신을 위한 견해들을 제안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창조와 저항의 거점’으로서의 창비의 창간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사회 대전환을 위한 제언

  새롭게 개편한 <창작과 비평>에서 마련한 첫 특집은 <대전환, 어디서 시작할까>였다. 먼저 한기욱은 우리의 삶이 87년체제, 분단체제, 자본주의 세계체제라는 세 차원의 체제상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진단했다. 87년체제가 새로운 체제로 도약하지 못한 채 퇴행했고 남북관계 또한 악화되어 분단 한반도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또한 인류와 지구를 위험에 빠뜨리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위기 역시 지속되고 있다. 한기욱은 “실천적 집단지성의 구심이자 대전환을 일궈낼 ‘창조와 저항의 거점’”으로서 창비가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문학의 열린 길: 어그러진 세계와 주체, 그리고 문학｣에서 그는 선입견과 담론에 포획되지 않는 ‘문학의 열린 길’을 갈 때에만 문학의 진정한 정치성과 창조적 가능성이 복원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최근 진은영 등에 의해 제기된 문학의 아토포스(비장소론)에 이르기까지의 문학장(場) 논의의 흐름을 되짚으며, 백무산의 시와 김금희의 소설 등이 한국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담아내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들의 문학에서 이른바 문학의 아토포스가 구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이남주는 ｢수구의 ‘롤백 전략’과 시민사회의 ‘대전환’ 기획｣에서 현재 한국사회의 위기가 분단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수구세력의 도전에 민주개혁세력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결과라고 강조했다. 이남주는 민주적 거버넌스를 무너뜨리는 수구세력의 행태를 ‘점진적 쿠데타’로 규정하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야권과 시민사회가 ‘대전환’을 기획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백영경은 ｢소수자 인권과 한국사회 시민권의 구성｣에서 1987년 이래 한국 사회에서 성장해온 소수자 운동과 담론이 퇴행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이는 소수자 운동과 담론을 단순한 인권보호 차원에 국한하여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백영경의 주장이다. 우리 사회에서 ‘시민’의 범주와 ‘인권’ 적용의 한계와 제약이 무엇인가를 면밀히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소수자 인권과 시민권이 한국사회의 대전환을 위한 핵심적인 과제라고 천명했다.

‘문학의 자율성’에 대한 비판적 숙고
  한편 올해로 45주년을 맞은<문학과 사회>(통권 113호)는 문학의 자율성에 대한 비판적인 숙고를 보여주었다. <문학과 사회>는 특집 <문지와 모더니즘>에서 문학과지성사가 걸어온 역사적 경로를 분석하는 두 편의 글을 수록했다. 먼저 황종연은 ｢팝 모더니즘 시대의 비평｣에서 문학과지성의 비평에 대한 메타 분석을 시도했다. 그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문학적 엘리트주의로 비판 받는 문지 비평 그룹이 대중문화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열린 태도를 취해 왔다. 황종연은 문지가 실천하는 모더니즘 태도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성찰했다. 또한 천정환은 ｢한국 자유주의/모더니즘 문예사의 재인식을 위하여｣에서 ‘문지’/‘창비’의 대립 구도 속에서 이해되던 좁은 의미의 모더니즘사를 넘어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더니즘을 ‘양식’의 하나로 이해하거나, ‘자유주의’라는 좁은 이데올로기로 귀속시키지 않으면서, 한국 모더니즘의 역사적 위치를 조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천정환은 이를 위해서는 특정한 역사적 국면 속에서의 모더니즘을 역사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작년 타계한 석학 재조명
르네 지라르 · 피터 게이의 삶과 사유

  한편 이번 <문학과사회> 봄호에는 작년에 타계한 지성사의 두 거장 르네 지라르(René Girard, 1923-2015)와 피터 게이(Peter Gay, 1923-2015)의 삶과 사유를 재조명하는 글이 수록되기도 했다. 먼저 ｢기독교는 인문학인가Le christianisme est-il une science hamaine?｣는 2004년 9월 <Sciences Humaines>지에 수록된 니콜라 주르네(Nicolas Journet)와 르네 지라르의 대담을 번역·수록한 것이었다. 르네 지라르는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1961), <폭력과 성스러움>(1972), <세상 설립 이래 감추어져온 것들>(1978), <희생양>(1982) 등을 발표하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종교학, 인류학, 철학을 아우르는 독특한 사유를 창안한 바 있다. 특히 1979년 <세상 설립 이래 감추어져온 것들> 출간 이후에 열린 토론회에서 지라르는 ‘희생양 메커니즘’의 속임수가 폭로된 것을 기독교의 핵심적인 공헌이라 지적했었다.

  이 인터뷰에서 르네 지라르는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초석적 살해’ 메커니즘을 분석하며 복수의 사이클이나 폭력의 분출을 중단시키는 ‘희생양 메커니즘’이 모든 제의의 기원이라고 주장했다. 예컨대 고대 파르마코스 제의에서는 불행한 일이 한 도시를 덮쳤을 때 미리 준비한 사람이나 동물을 희생시킨다. 희생양에게 죄가 있으며 폭력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믿음으로써 공동체 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을 종식시키는 것이다. 이 대담에서 지라르는 기독교의 독창성이 희생의 본질을 막고 있던 장막을 걷어내었다는 점에 있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기독교는 예수를 처형한 군중들의 시각과 그와 같은 헛된 생각에서 벗어나 있는 소수자들로서의 제자들의 시각을 병치시킴으로써 ‘희생양의 무고함’을 인식할 수 있게 만든다. 고대 신화와 종교들이 ‘집단살해’의 방식으로 인간의 폭력과 모방적 욕망에 출구를 열어주었다면, 기독교는 희생양 메커니즘을 해체하고 희생의 안쪽 면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이때의 기독교란 단순한 교리로서의 기독교가 아닌 인간 본성을 폭로하는 기독교를 말한다. 르네 지라르는 ‘모방 욕망désir mimétique’ 개념을 주창하며 모방이론을 전개한 바 있다.

  또한 조효원은 ｢계시에서 계몽으로―피터 게이의 역사 쓰기｣에서 지성사가이자 역사학자인 피터 게이의 사유의 계보를 추적했다. 페터 요아힘 이스라엘 프뢸리히(Peter Joachim Israel Fröhlich)라는 본명을 지녔던 그는 1939년 부모와 함께 나치 독일을 탈출하여 미국으로 이주한 후에 본래 이름을 버리고 피터 잭 게이(Peter Jack Gay)라는 이름을 얻었다. 계몽주의의 역사에 대한 발군의 연구로 지성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피터 게이는 <볼테르의 정치학―현실주의자로서의 작가>(1959), <인문주의당―프랑스 계몽주의에 관한 논고들>(1964), <계몽주의: 하나의 해석>(1966), <바이마르 문화>(1958), <프로이트>(1988) 등 다수의 저작을 남긴 바 있다. 타계하기 전 피터 게이는 <왜 낭만주의자들이 중요한가>(2015)라는 저작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조효원은 볼테르, 디드로 등의 연구를 아우르는 피터 게이의 계몽주의 프로젝트의 근저에 놓인 ‘계시’와 ‘계명’(이라는 근본 형식)의 위상을 검토한다. 조효원은 피터 게이가 저술 과정에서 정황상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누락한 사상가인 라인하르트 코젤렉과 카를 슈미트의 사유가 지닌 비의적 요소를 지적하며 이들의 사상이 피터 케이의 사유에 ‘부재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피터 게이가 계시의 근원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지점들을 포착하며 “계시에서 출발하는 계몽, 계시 위에 건축되는 계몽, 계시를 정복할 수 없는 불완전한 계몽”이라는 역설이 게이의 역사 쓰기의 모태라고 주장했다. 테오도어 도이블러(Theodor Däubler, 1876-1934)의 <북극광>에서 인용된 제사처럼 “먼저 계명이 있고, 인간은 그 다음에 온다”는 것을 계몽주의 사상가인 피터 게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있었으리라는 것이 그의 견해다.



<창작과 비평>·<문학과 사회>의 혁신 시도
  한편<문학과 사회> 이번 봄호를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편집을 맡아온 김형중, 강계숙, 이수형이 편집동인에서 물러나고 새로운 편집동인들(강동호·금정연·김신식·이경진·조연정·조효원)이 기획을 맡게 되었다. 다음에 발간될 여름호를 기점으로 <문학과 사회>의 새 편집동인들이 혁신의 방향성을 구체화 할 방침이다. 한국문학에 대한 패배주의가 만연한 이 시대에 이들이 내건 구호는 ‘진정한 문학주의’와 ‘비평 정신의 복원’이다. 이로써 창간50주년을 기념하여 체제를 개편한 <창작과 비평>을 비롯하여 <문학과 사회> 역시 새로운 체재 개편의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1966년 1월 그리고 1970년 8월에 창간의 막을 올리던 첫 자리에서처럼 <창작과 비평>과 <문학과 사회>가 한국의 문학계와 지성계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선민서 기자 minseo@korea.ac.kr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5 04:4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