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형, 『러브 레플리카』, 문학동네, 2016.

환상은 쉽고 희망은 어렵다

  윤이형의 소설에서는 장르문학적 소재들이 자주 차용된다. 「엘로」에서는 미약한 마법사 마르한이 여정을 나서고, 「대니」에서는 안드로이드 베이비시터 대니가 인간의 일을 대신하며, 「인터뷰」(『현대문학』, 2015.7.)에서는 사람들이 신촌의 귀신을 만난다. 그러나 윤이형의 모든 작품이 장르문학적 성격을 띠는 것은 아니다. 가령 「러브 레플리카」는 허언증 환자 최경과 거식증 환자 서이연의 관계의 변화를 보여주고, 「루카」는 기독교인 동성애자 루카를 둘러싼 내적 고뇌와 사회적 갈등을 드러낸다. 윤이형은 장르문학적 코드를 자유롭게 활용하는 순문학 작가다. 이 말의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
  한국에서 장르문학을 순문학보다 저급한 것으로 치부하는 인식의 역사는 한국의 현대문학운동과 그 궤를 같이 한다. 홍명희의 ｢임꺽정전｣이나 이광수의 ｢단종애사｣ 등이 각각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연재되고 있던 1929년에 염상섭은 역사물과 탐정소설 및 통속소설 등을 단순한 오락물로 터부시하거나 혹은 대중들을 순문학 독자로 성장시키기 위한 가교로서의 독서물 정도로 그 의미를 한정시켰다. 이때 순문학을 특별한 것으로 혹은 근대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했던 근간으로서의 문예사상은 자연주의와 사실주의였다. 절대자의 초자연적 권능이나 권선징악을 실현하는 영웅에 대한 불신, 그리고 인생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야 한다는 믿음이 순문학을 낳았던 것이다. 애초에 순문학이냐 장르문학이냐 하는 구분은 어떤 문단에 속해서 활동하는가와 무관하며, 작가는 마땅히 현실을 핍진하게 표현해 내야 한다는 신념에서 파생된 것이다.
  흔히 장르문학을 대중영합적이라 비판하는데 이는 작품의 구독자가 많고 적음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내용이 현실과 괴리됨으로써 작품이 오직 상품으로서의 가치만 획득하는데 그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윤이형은 SF, 판타지, 호러적 소재 등을 통해서 사람과 시대에 대한 인식을 자신의 드러내는 작가다. 그러므로 윤이형의 소설을 충분히 읽고자 한다면 신묘한 소재들의 정체를 밝히는 문제풀이식 독서를 넘어서야 한다. 가령 ｢쿤의 여행｣을 읽을 때는 ‘쿤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그치지 않고, 거기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더해야 한다. 이 짧은 지면에 윤이형의 단편들을 모두 소개하는 것은 무리이므로, 󰡔러브 레플리카󰡕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을 고르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루카｣를 택하겠지만, 여기서는 ｢쿤의 여행｣ 한 편을 예로 들어 윤이형의 소설독법과 시대인식을 제시하겠다.

  ｢쿤의 여행｣은 외과수술을 통해 “쿤”을 자기 몸에서 떼어낸 후에 15세 소녀가 되어버린 40세 여성 “나”를 화자로 내세운다. 대학생활, 취업, 출산을 쿤에게 업혀서 했다는 “나”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 “쿤”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며 거기에 맞춰서 살아가느라 주체적 삶을 살 수 없었던 인물의 부정적 의존성이 육화된 상징이다. “나”의 아버지도 쿤에게 동화된 인물인데 그는 사람들에게 멘토, 선생님, 스승님 등으로 불리며 존경받았지만 집에서는 “나”와 어머니를 때리고 무시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실상 그의 명성은 허상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유년시절에 속수무책으로 아버지로부터 가정폭력을 당했고 이로 인해 견고한 자존감을 형성하지 못한 인물이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 고뇌 끝에 선택하고 행동하며 책임지는 자신으로서 타인 및 사회와 관계 맺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연애를 해도 유일무이한 연인이 아니라 “수많은 커플 중 하나”가(97) 되고, 졸업을 해도 대학의 “공간을 알지 못”하며(101), 정치 관련 트윗을 리트윗 해도 “그게 정말로 나 자신의 관심사인지는”(104) 모르는 삶을 살게 된다.
  쿤을 제거함으로써 “나”는 누군가가 요구하는 역할에 자신을 끼워 맞추지 않고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기로 한다. 대학생 때 가입하려 했으나 취업준비 때문에 하지 못했던 학생극회에 들어가서 더벅머리 선배를 만나 연기를 배운다. “무엇이든 되고 싶은 것이 되어봐”라는(110) 선배의 말은 윤이형이 작품을 통해서 던지고 싶었던 메시지일 것이다. 그러나 마흔 살 여성이 대학생 극단의 이십대 선배로부터 결코 너의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는 정신분석학적 테제를 듣고 깨닫는다는 설정은 지나치게 공상적이므로, 차라리 이것은 화자가 이루지 못했던 과거의 소망에 대한 상상적 해소라고 보는 것이 더 낫다. 윤이형 스스로도 이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녀를 십오 세의 몸으로 변화시키는 설정을 감행했을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40대 중년여성에게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는 주체적 개인으로서의 길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려운 한국사회의 폐쇄성이다.
소설의 결말에서 화자가 죽음을 앞둔 아버지에게 지난 과오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자 아버지는 흐느끼며 미안하다고 말한다. 폭력적 아버지와 의존적 딸 사이의 진실한 대화는 딸이 마흔 살이 되어서야, 아버지가 죽음 앞에 이르러서야 가까스로 이뤄진다. 주체로서 살아가는 것, 타자와 화해하는 것은 이토록 어렵다. 환상은 쉽지만 희망은 어려운 것이 윤이형의 소설세계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5 04:07: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