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걸작 보기의 즐거움, 행복과 불행 사이

이후경 영화평론가


<그림> 오즈 야스지로(1903~1963)
<그림> 존 포드(John Ford, 1894~1973)
<그림> 장 르누아르(Jean Renoir, 1894~1979)



극장 개봉작을 보지 않은 지가 꽤 되었다.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에서 열었던 ‘레이트 터너’전을 본 뒤 마음이 동하여 상영 종료 전 부랴부랴 달려가 본 <미스터 터너>가 가장 최근 관람작이다. 보통 전기 영화처럼 스토리를 이어나가는 대신 갤러리에 그림을 배치해나가듯 삽화적 구성을 취한 뒤, 그 사이에 터너라는 기이한 예술가 캐릭터를 일부러 부조화스럽게 그려낸 방식이 묵직한 느낌을 주었다. 더 좋았던 것은 터너가 어떤 작품들을 어떤 인상에서 출발하여 그리게 된 것인지를 붓터치처럼 짧은 찰나로 담아낸 장면들이었다. 터너의 그림들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스쳐지나가는 아름답고도 강렬한 어떤 인상들을 포착해낸 작품들임을 핵심적으로 보여주는 데 마이크 리 감독은 어느 정도 성공한 것 같았다.

동시대 영화들이 간혹 이렇게 좋은 감흥을 일으키는 경우가 적지 않다. 불과 2년 전인 2013년에는 <라이프 오브 파이>처럼 보면 볼수록 더욱 아득하고 신묘하게 느껴지는 우주적 영화도 있었고, <마스터>처럼 혹시 다시 보게 될 때마다 그 전에 받았던 무섭도록 쓸쓸한 느낌이 생각나 심지어 피하고 싶어지기까지 하는 정신적 영화도 있었다. 하지만 2015년이 된 지금 그 영화들이 주었던 감흥은 얼마간 누그러져 그때와 같은 느낌이 남아있진 않다. 그동안 나온 새로운 영화들이 새로운 감흥들로 이전의 영화들이 준 이전의 감흥을 상당 부분 밀어내버린 탓이다. 그렇게 여간한 동시대 영화들은 내 마음에서 마치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그리고 몇 년이 흐른 뒤에는 다시 생각할 일이 거의 없는 영화가 되어버린다.

한편 오고 가는 영화들이 뒤섞여 있는 내 기억의 망망대해 중에 거대한 암초 혹은 뚝섬처럼 콱 박혀 결코 떠내려가지 않는 영화들이 있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들, 존 포드의 영화들, 장 르누아르의 영화들, 그리고, 또 그리고…. 그들의 영화들을 보고 있으면 동시대의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감독들이 아무리 난리법석을 떨며 자신들의 예술혼을 불사른다한들 평생 그들의 범작만한 영화 한편도 만들지 못할 것이란 맹랑한 생각이 든다. 아마도 영영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최고로 잘 만든 영화 한편이 오즈의 못 만든 영화 한편을 넘기 힘들 것이고, 코엔 형제의 최고로 잘 만든 영화 한편이 포드의 못 만든 영화 한편을 넘기 힘들 것이며, 파트리스 르콩트의 최고로 잘 만든 영화 한편이 르누아르의 못 만든 영화 한편을 넘기 힘들 것이다.

오즈, 포드, 르누아르의 영화들은 감상의 차원을 넘어서는 세계의 깊이를 지니고 있다. 세계란 한 개인이 평생을 애써 더듬어도 온전히 알 수 없는 무언가이다. 그런 세계를 품고 있는 영화들이기에 수십 년의 세월동안 아카데미와 저널을 바탕으로 한 온갖 담론에 의해 그 의미가 소모되고 또 소모되었음에도 여전히 소모될 무언가가 남아있어 우리로 하여금 계속 소모시키게 한다. 스탠리 카벨이라는 미국의 영화철학자는 이 완전한 소모의 불가능성이야 훌륭한 영화의 덕목이라 말한다. 그리고 프랑크 카프라의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하워드 혹스의 <베이비 길들이기>, 킹 비더의 <스텔라 댈러스>, 막스 오퓔스의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 같은 영화들을 평생에 걸쳐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본다. 그래도 들여다볼 것이 남아있어서다.

저널에서 아카데미로 옮겨온 입장에서 아카데미는 야심과 전략만 잘 조절한다면 시대적 흐름에 관계없이 고전 걸작들을 마음껏 들여다보고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썩 즐거운 곳이다. 과제를 핑계 삼아 지난 학기에는 버스터 키튼의 영화들을, 이번 학기에는 존 포드의 영화들을 주구장창 보고 있다. 행복하다. 저 행복에는 놀라움과 연민과 쓸쓸함과 절망감과 환희와 번민과 또 수많은 복잡하고도 신비로운 감정들이 모두 담겨있다. 그 모든 것을 풍요롭고 조화롭게 느끼게 하는 영화를 봐서 행복하다는 뜻이다. 포드가 모뉴멘트 밸리를 찍고 또 찍고, “This is Dixie” 노래를 쓰고 또 썼듯, 우리도 많은 다양한 영화들보다 소수의 정말로 좋은 영화들을 보고 또 보면서 좀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

고전영화가 현대영화보다 훌륭하다는 일반론을 펼칠 생각은 없다. 영화사의 진화론이 아닌 역진화론을 주장할 생각은 더욱 없다. 우리는 늘 현재에서 과거를 해석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을 뿐이므로. 하지만 영화가 조금씩 나빠지고 있다는 것만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다. 우리에게 우리와 동시대를 사는 포드, 오즈, 르누아르…가 없다는 사실은 끔찍한 결핍이다. 다만 우리가 그들이 살았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그들을 우리가 사는 시간 속으로 당겨오는 것만이 가능하다. 노스탤지어와 시대착오만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쾌락.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만이 우리의 현재 혹은 미래라면 차라리 노스탤지어와 시대착오에 빠지기를 택하고 싶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5 04:1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