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면 학술동향 원고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철학

지난 10월30일(금)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회의실에서 본교 HK한국문화연구단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 기획연구팀 주최로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철학> 심포지엄이 열렸다. 김정한(고려대) ｢맑스주의에서 독재와 민주주의｣, 진태원(고려대) ｢‘을’의 민주주의-행복의 정치학, 불행의 현상학｣, 홍태영(국방대) ｢민주주의와 인간권리의 정치: 르포르의 민주주의 구성과 확장｣, 최원(독립연구자) ｢발리바르의 민주주의론｣, 김상운(진보평론 편집위원) ｢로장발롱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론｣, 정원규(서울대) ｢자유의 정의역을 통해서 본 정치적 자유의 공화주의적 출구-아렌트, 페팃, 루소의 자유론을 중심으로｣의 순서로 발표가 진행되었다. 이들 중 르포르의 정치철학을 검토한 홍태영과 발리바르의 민주주의론을 검토한 최원의 논의를 소개한다.

르포르와 아렌트의 민주주의론 비교
홍태영은 ｢민주주의와 인간 권리의 정치: 클로드 르포르(C. Lefort)의 민주주의 구성과 확장｣에서 르포르의 정치철학을 검토했다. 젊은 시기 맑스주의자이자 트로츠키주의자였던 시기를 제외한다면 르포르의 사유에서 ‘정치적인 것’과 민주주의의 문제는 핵심적인 화두였다. 르포르는 정치적인 것에 대한 사유와 인권의 정치를 통해 현대 민주주의를 새롭게 모색하고자 했다. 홍태영은 르포르와 아렌트의 사유와 비교하여 그가 제시하는 민주주의의 동학과 새로운 활로를 검토한다.
클로드 르포르가 사망한 몇 주 뒤, 학술지 <Constellations>은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에서 지적, 정치적 추모 세미나를 조직했고, 그 결과가 2012년 1호에 수록되었다. 니 특집호에는 2009년 5월에 있었던 로장발롱과 르포르의 인터뷰가 실렸는데, 여기서 로장발롱은 르포르의 지적 여정을 되짚으며 그의 작업이 끊임없이 현재와의 관련성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지적했다. 로장발롱은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르포르가 세 가지 역사적 경험에 주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마키아벨리와 근대적 도시공동체의 출현, 둘째는 미국 및 프랑스혁명, 셋째는 전체주의다.
마키아벨리와 관련하여 르포르는 민주주의 사회적 조건으로서의 인민의 출현에 주목한다. 여기서 인민은 권력은 권력을 가진 자라기보다는 저항의 권력으로서의 존재다. 아직은 인민주권의 개념이 정의되지 않았지만, 인민은 억압받지 않기를 원하며 억압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힘을 갖는 것이 필요한 존재로 규정된다. 이러한 인민들은 대항적 민주주의자(counter-democrat)로 규정될 수 있는데, 르포르는 마키아벨리에게서 인민의 욕망,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욕망을 읽어낸다. 마키아벨리로부터 르포르는 두 가지 테제를 이끌어낸다. 하나는 ‘정치적인 것’(le politique)이며 다른 하나는 ‘비결정’(indétermication)이다. 르포르는 두 가지 개념에 근거하여 정치철학의 영역을 확정하고자 한다. 그에게 있어 민주주의 사회는 결코 극복될 수 없는 근본적인 비결정의 시련을 가진 사회다. 르포르는 인격적 권력과 비인격적 권력을 구분하며, 어떤 통치자도 권력을 전유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 민주주의적 혁명의 특징이라 말한다. 이러한 빈 공간이 출현과 정치적 자유의 제도화가 결합되면서 어느 누구의 권력도 아닌 민주주의적 권력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르포르는 민주주의 사회는 권력을 체화할 수도, 전유할 수도 없는, 하나의 공백의 장소(un liue vide)로서 만드는 것이라 주장한다.
아렌트가 ‘정치적인 것’을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 속에서 개념화하며 선험적으로 정치적인 행위를 규정하는 것과 달리, 르포르는 선험적이고 초시간적인 ‘정치적인 것’의 개념 정의를 거부한다. 르포르는 정치적인 것이란 사회의 정치적 형태를 둘러싼 범위 내에서, 그것이 발생하고 실현되는 정치적 지평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르포르가 두 번째로 주목하는 것은 미국과 프랑스에서의 혁명이다. 아렌트 역시 󰡔혁명론󰡕을 통해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에 대해 세밀한 분석을 가한다. 르포르와 아렌트는 모두 미국혁명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반면에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아렌트는 미국혁명의 방향이 자유를 확립하고 지속적인 제도들을 설립하는 데 집중했다면, 프랑스혁명은 궁핍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절박성에 의해 결정되면서 자유를 확립하지 못하고 공화국의 제도도 실현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아렌트는 미국혁명과 프랑스 혁명을 비교하며 중요한 잣대로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관계를 내세운다. 미국혁명의 경우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분리가 명확했으며 미국혁명가들은 사회질서보다는 정부형태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반면에 프랑스혁명은 ‘사회문제’에 주목했으나 이것이 폭력적인 사건으로 이어졌을 뿐 정체수립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반면에 르포르는 프랑스혁명과 미국혁명을 ‘정치적인 것’을 드러내는 방식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르포르는 프랑스혁명이 실패한 이유가 새롭게 탄생한 ‘비결정’으로서의 근대적 권력의 자리를 비워두는 것이 아니라 인민의 대표의 이름으로 채우려 했던 것이 문제였다고 지적한다.
아렌트와 르포르는 모두 전체주의를 민주주의의 퇴행적 흐름의 결과로 인식한다. 그런데 유사한 문제의식에 대해 아렌트와 르포르가 전체주의로부터 탈피하기 위한 접근법은 상이하다. 아렌트의 경우 민주주의의 문제와 관련하여 제시할 수 있는 길은 정치의 복원, 특히 고대 아테네에 존재하였던 의미의 정치적 자유, 시민적 덕성의 복원이다. 하지만 르포르의 경우 아렌트의 정치 관념을 비판한다. 아렌트가 이해하는 정치는 실재 속에서 체현될 수 없으며, 실재의 정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대비하여 르포르는 민주주의적 공간을 구성하는 요소로 ‘인간의 권리’와 그에 근거한 정치를 든다. 그는 인간의 권리를 공적 공간의 구성요소로 파악하며 인간의 권리가 개인들 각자에게 부착된 권리로 이해되는 것을 비판한다. 인간의 권리를 개인의 권리로 환원시킬 경우 민주주의를 단순히 개인과 국가의 관계로 환원하게 된다. 따라서 르포르는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 나타난 각 조항들이 ‘개인의 자유’라기보다는 ‘관계의 자유’에 대한 것이라 주장한다. 그는 권력에 대한 권리의 선차성을 주장한다. 인간의 권리는 생각, 의견, 말, 글의 소통과 순환에 있어서 법이 정하는 특정한 경우를 제외하면 그것을 종속시킬 어떤 권력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정치적 자유란 곧 ‘억압에 대한 저항’이라 주장하며 상상, 표현, 집회의 자유 등을 개인의 속성이 아닌 관계의 자유, 즉 민주주의적 공론장의 속성에 근거하여 규정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권리는 인간적 관계를 형성하고 그 형태가 정치적 범위를 형성할 때만 정당한 형태를 갖는다는 것이다. 인권의 정치에 대한 르포르의 확장된 해석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라는 상황이 만들어내는 국민국가 내부의 시민권의 위기 그리고 국민국가 경계를 넘어서는 이들의 권리의 문제 등에 대해서 실마리를 던져준다.
르포르는 고대 아테네의 이상적 정치의 흐름에서 논거를 찾는 아렌트와 달리 현재의 실재 속에서 민주주의가 가지는 난점들로부터 해결의 실마리를 도출하고자 한다. 르포르가 제기한 정치적인 것의 개념은 열려진 공간과 민주주의의 무한한 확장을 의미한다. 홍태영은 르포르가 제기한 정치적인 것의 문제가 공동체 구성원의 공존양식에 대한 공동체 구성원의 적극적인 고민으로부터 형성된다고 말한다.

발리바르의 민주주의론
최원은 ｢발리바르의 민주주의론｣에서 2010년 출판된 에티엔 발리바르의 저서 󰡔평등자유명제󰡕에 나타난 그의 민주주의론의 주요 관념들을 고찰했다. 발리바르는 이 책을 ｢시민권의 이율배반｣이라는 제목을 붙인 서론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그는 시민권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본질적으로 이율배반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이때 시민권이란 고대 그리스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상들을 가져왔던 ‘역사적 제도로서의 시민권’을 일컫는 것으로, 발리바르는 시민권이 하나의 형상에서 다른 하나의 형상으로 이행할 때면 언제나 그것이 ‘정치 변혁의 동력으로서의 민주주의’와 맺는 이율배반적인 관계에 의해 추동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발리바르는 정치를 시민권과 민주주의 사이의 긴장을 통해 사고함으로써 그것을 단지 제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운동과 세력관계를 포함하는 변증법의 문제 및 이론과 실천의 접합의 문제로서 바라본다.
최원은 발리바르가 민주주의를 하나의 ‘정체(régime)’로 바라보는 대부분의 정치철학적 전통과 거리를 둔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것을 하나의 ‘과정’으로 파악하는 아리스토텔레스, 마키아벨리, 스피노자, 맑스, 그리고 자크 랑시에르와 같은 이들의 편에 스스로를 위치시킨다는 것이다. 이는 곧 민주주의를 ‘시민권의 헌정’의 유형에 주어진 이름이 아니라 ‘민주정’을 포함하여 모든 시민권의 헌정에 적용해야 할 ‘진리’로서 사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발리바르는 2001년에 쓴 ｢민주주의적 시민권인가 인민주권인가?｣라는 글에서 ‘민주적 시민권’을 ‘인민주권’보다 선호하는 헌정주의적 경향에 반대하여, ‘인민주권’이 보다 근본적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결국 발리바르에게 있어서 민주주의란 모든 제도화된 역사적 시민권에 대하여 인민주권을 발동하여 ‘평등자유’의 진리를 적용함으로써 그것을 탈구축하는 문제로 사고되는 것이며, 그것은 역으로 모든 시민권은 그것이 “민주적”이라고 일컬어질 때조차 좀 더 민주화되거나 반대로 탈민주화(de-democratization)될 수 있는 ‘상대적인 것’으로 사고된다.
‘평등자유(égaliberté)’라는 말은 발리바르가 ‘평등과 자유의 실천적 동일성’을 지칭하기 위해 만든 합성어다. 둘 가운데 하나를 부정하면 반드시 다른 하나마저도 부정하게 되는 사태를 이론적으로 지시하기 위해 만든 합성어인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오늘날 우리가 민주주의(démocratie)라고 부르는 단어의 기원이 되는 ‘이소노미아(isonomia)’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통상적으로 ‘평등한 권리’ 또는 ‘법 앞에서의 평등’이라 옮겨지곤 한다. 발리바르는 고대 로마의 정치철학자 키케로가 이 단어를 라틴어로 옮길 때 ‘평등한 자유(aequa libertas)’라고 새긴 것을 지적한다. 최원은 발리바르 이전에 ‘이소노미아’라는 단어를 통해 평등과 자유의 동일성을 사고하려 했던 근대 철학자로 한나 아렌트를 언급했다. 아렌트는 자신의 저서 󰡔혁명에 대하여󰡕(1963)에서 이소노미아의 의미를 논하면서, “토크빌의 이해를 좇아 우리가 종종 자유에 대한 위험으로 보곤 하는 평등이 기원적으로는 거의 자유와 동일했다”고 주장하면서 “자유와 평등의 상호연결”을 강조한 바 있다.
최원은 대부분의 근대 정치철학자들이 자유와 평등을 대립시키거나 양자 사이의 ‘위계’를 도입하려 해왔다고 주장했다. 대표적인 예로 존 롤즈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정의론󰡕에서 ‘평등한 자유’를 주장하면서도 자유를 평등보다 선행하는 원리로 파악하는 ‘사전적 순서’를 도입했다. 최근의 사례로 가라타니 고진은 󰡔철학의 기원󰡕에서 이소노미아를 논하면서 ‘자유가 평등을 만들어낸다’고 봄으로써 자유를 보다 근본적인 범주로 파악했다. 반면에 랑시에르나 알랭 바디우의 경우는 평등을 자유보다 더욱 근본적인 범주로 사고하며, 이로 인해 불평등과 배제에 맞선 투쟁만을 중시한다. 발리바르는 이처럼 평등과 자유 가운데 어느 하나를 우선시하는 태도가 정치를 시민권과 민주주의의 변증법적이고 내적인 긴장을 통해 사유하기보다는 정치를 그 중 어느 한쪽에만 일방적으로 귀속시키려는 경향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주장한다.
평등자유의 원리는 시민권 헌정의 긍정적 원리라기보다는 부정적 원리이며, 저항, 불복종, 봉기 등을 통해 그것을 위협하는 아나키의 원리(an-archie), 곧 ‘비-지배’의 원리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발리바르는 이를 시민권의 헌정 그 자체 안에 기입되어 있는 내적인 이율배반의 문제로서 사유하고자 한다. 예컨대 ‘저항권’을 명시적으로 시민의 권리로 인정하는 프랑스 혁명의 󰡔선언󰡕이나 대항권력의 존재를 민주주의의 핵심으로 파악하는 미국 헌정의 사례를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시민권의 헌정 안에 그것을 위협하는 저항권, 봉기권, 시민불복정권 등의 부정적 권리가 기입되어 있는 것이다. 정치란 시민권과 민주주의의 이율배반과 그 내적 긴장의 영속적 전개이며, 그 변증법의 한 쪽을 소거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 발리바르의 주장이다.

선민서 기자 minseo@korea.ac.kr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4 00:2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