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말을 찾아서

원우발언대에 발언하겠다고 해놓고 사실 나는 오랫동안 발언할 만한 말을 찾지 못했다. 대학원생으로서 할 말이 잔뜩 쌓였다고 생각했는데 내게 앞섰던 것은 그저 발언하고 싶은 ‘기분’뿐이었다. 기분은 아무 것도 되지 못한다. 기분을 논증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소박한 주장 하나에도 위대한 근거를 들어보겠다고 대가들의 논저를 마구잡이로 뒤져보던 초보 연구자의 습관 때문일까, 내게는 하고 싶은 말보다는 할 수 있는 말들만 남아버린 것 같다. 수업에서, 세미나에서, 또 지면 위에서 쉴 새 없이 말을 만들고 제련하는 것이 이곳 문과 대학원 생활의 전부인데도 어느새 나는 그 생활 속에서 ‘내 말’을 잃어버렸다.
할 말이 없다는 이 막막한 느낌에 직면하게 된 일이 얼마 전에도 있었다. 며칠 전, 떨어져 살고 있는 아버지로부터 느닷없이 장문의 문자가 전송된 것이다. 딸! 하고 특유의 호탕한 말투로 시작하는 아버지의 문자는 ‘이제 그만 빈둥거리고 네 살길 찾아라.’로 요약되었으며, 얼마 되지도 않는 행간에는 ‘대학원은 이제 그만두고 취업해라.’는 내포 의미가 번뜩이고 있었다. 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하루 이틀일은 아니기에, 딱히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도저히 답장을 보낼 수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빈둥거리지 않는다고, 나는 대학원을 그만 둘 수 없다고, 어떻게든 살길을 찾아볼 것이라고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나름대로 필사적인 내 삶의 질서와 공간이 아버지의 세계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그 간극을 어떤 말로 채울 수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이 일을 생각해보면 내가 말을 잃어버린 것은 꼭 초보 연구자의 나쁜 습관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대학원생으로서 내 생활을 언어로 엮어 세상의 논리에 편입시키는 일은, 때로는 논문을 쓰는 일보다 훨씬 어렵게 느껴진다. 사회현안에서부터 인간관계, 개인 간의 사소한 말다툼까지 저마다의 논리로 분석하고 해부하는 것을 즐기는 대학원생 특유의 사담의 장에서, 유독 그 분석과 해부의 날이 무뎌지는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들의 ‘기분’ 혹은 ‘신세’에 대한 것이다. 대학원생으로서 느끼는 암담함과 외로움, 억하심정 같은 두루뭉술한 기분이나, 안전망이 전무한 비정상궤도를 살아가는 신세는 원인 분석이나 전망 모색을 건너뛰고 그저 하소연으로 흐려질 뿐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마도 너무 가혹하거나, 너무 무용하거나 혹은 너무 어려운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의 문자를 본의 아니게 ‘씹게’된 것은 정말로 죄송하지만, 답할 말을 찾지 못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너무 어렵고, 또 너무 가혹해서. 나는 마냥 빈둥거리지 않았다. 나는 학생이자 연구자, 동시에 조교이면서 과외 교사이며 때때로 대필 작가 노릇을 하며 바쁘게 살아간다. 그러나 가끔씩 아버지에게 자금 조달을 받아야 할 만큼 빈궁하며 보험은 물론 저축은 꿈도 못 꾼다. 내가 빈둥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살 길’에 대해 말하자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내가 앞으로 어떤 직업을 가지게 될지, 생계를 유지할 어떤 방안을 준비하고 있는지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매일 같이 학교에 나가 말을 짓고 근거를 찾는 나에게 ‘내 삶’에 대해서 ‘내 말’을 하는 일이 이처럼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것은 도대체 왜일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값비싼 등록금, 보장되지 않는 연구 공간, 장학금의 부족, 축소되는 연구 지원, 막막한 진로…….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각종 문제들이 산재한 이곳에서, 우리 스스로에 대한 말들은 아무래도 아직 충분히 지어지지 않은 것 같다. 내 생활의 우울에 대해서, 이곳의 암담함에 대해서 나는 이제 한탄이 아니라, 제대로 된 말을 하고 싶다. 잃어버린 말들을 찾고 싶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4 10:4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