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를 떠받히는 보이지 않는 손
-영화계의 노동 환경, 영화제의 정치경제학

1년 남짓한 유학생활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3주전쯤 논문을 마치고 요즘은 런던한국영화제에서 시급제로 일하며 생활비를 버는 중이다. 런던한국영화제는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한국 영화제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올해는 영국의 영상자료원이라 할 수 있는 영국영화협회(BFI) 사우스뱅크에서 <국제시장>으로 개막식을 치른 뒤 장단편을 포함해 50편 내외의 영화를 런던 시내 곳곳의 극장에서 2주간 상영한다. 한국 영화 문화를 대변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영화를 틀어야하다보니 구체적인 정체성을 강조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보다는 상업영화부터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작을 두루 아우르는 프로그램을 완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섹션도 10개가 넘고, 프로그래밍에 참여하는 인원도 자문위원부터 협력 영화제 프로그래머까지 8명 이상이다. 포르투칼 영화제에서 일하는 친구의 말을 들어봐도 런던 안에서 특정 국가의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제로는 상당한 규모인 듯하다.
이런 영화제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하면 함께 영화이론을 공부한 친구들은 ‘좋겠다’는 반응을 곧잘 보인다. 예의상 하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 전공으로 뭐라도 해서 돈은 벌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부러움이 담겨 있다. 그런 반응을 접할 때마다 두 가지 이유에서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하나는 영화’계’ 입성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처한 신자유주의적 노동 환경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일반적으로 영화’제’가 갖고 있는 뿌리 깊은 자본주의적 속성 때문이다.
다른 업계도 마찬가지겠지만 영화계에 들어가 일하기 위해서는 특히 경험과 인맥이 중요하게 여겨진다고 이곳 영화과 출신인들을 얘기한다. 그런데 그 경험과 인맥이라는 것을 타고나는 사람은 없다. 누구든 처음에는 아무 가진 것 없는 상태에서 시작해야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20대 초반의 젊은 학생들이 선택하는 경로란 것이 대게 인턴십이다. 문제는 그들이 아무 가진 것이 없어서 아쉬운 입장이라는 점이 고용주들이 너무 쉽게 이용한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서도 전시 등 특정 예술분야에서는 무급 인턴십이 보편적이라고 들었는데, 미국과 유럽에서는 업종을 막론하고 인턴십 대부분이 무급으로 교통비와 점심 식사비 정도만 제공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내 옆 자리에서 일하는 인턴 친구도 해외 경험을 쌓기 위해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런던에 와 있는 경운데, 하루 10파운드 정도 되는 돈만 받고 풀타임 근무 중이다. 거기다 그 기간동안 유용한 경험과 인맥을 형성하지 못하면 이후 비슷한 인턴십을 전전하게 된다. 청년들이 배고프고 힘든 기간을 버티는 방법은 어딜 가나 비슷하다. 부모님의 도움이다. 그리고 이는 다시 부 세습과 계급 양극화 문제와 직결된다. 예술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종종 하는 말이 있다. 버티는 자가 살아남는다. 핵심은 버틸 수 있는 자가 거의 정해져있다는 사실이다.

영화제의 정치경제학에 있어서도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문제는 심각하다. 칸영화제만 봐도 미국 언론의 환심을 사기 위해 집행위원장을 교체하고 할리우드 스타 초청에 총력을 기울이는 등 최근 노골적인 변화의 길을 걸어왔다. 베를린영화제도 해마다 미국 아카데미시상식 일정에 타격을 덜 받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으며, 다른 중소 영화제들의 상황은 더 말할 것도 없다. 2000년대에 들어 우수죽순 생겨난 수많은 영화제들과 새로운 방식으로 몸집 불리기에 나선 기존 영화제들은 자본의 자기 증식 과정을 위해 필수적인 유통 활성화를 위한 핵심적 사이트들이다. 영화를 위한 축제로 이해되는 영화제는 겉으로 보기에는 문화와 예술을 널리 보급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유익한 행사다. 하지만 가만히 뜯어보면 영화제에 상영되는 영화 중 널리 보급할 필요가 있을 만큼 정말 좋은 작품은 손에 꼽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영화제의 나머지 부분은 자본의 자기 증식에 공헌하고 있을 따름이다. 최대한 많은 영화가 생산되고 유통되는 가운데 부가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영화와 도태되는 영화가 알아서 나누어지며, 전자의 영화들이 전세계의 수많은 영화제들을 돌아다니며 문화자본을 생성, 축적한다. 영화제들의 규모 자랑, 다른 영화제에서 상영된 영화들의 반복 상영, 게스트 초청을 통한 언론 홍보 등도 다 이런 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적 매커니즘의 일부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이 새로운 것은 전혀 아니다. 말해본들 입만 아프지 뭐가 바뀔까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이 무력감이 제일 무섭다. 그 무력감이 우리로 하여금 ‘축제’를 떠받히는 보이지 않는 손을 보이지 않아도 그만인 채로 내버려두게 하기 때문이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4 12:1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