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우발언대>

책상물림의 사회생활  

얼마 전 학부 시절의 동기들과 선후배들이 함께 모이는 자리가 있어 참석한 일이 있었다. 소위 ‘명문대’로 분류되는 대학의 인문계열 전공자가 졸업한 뒤에 택할 수 있는 진로에서 거의 모든 경우의 수를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많은 사람들이 대기업에 다니고 있었고, 행정고시와 CPA에 합격한 사람도 있었으며, 방송사 PD와 아나운서도 있었고, 로스쿨에 다니는 사람, 출판사에서 일하는 사람, 교직원이 된 사람도 있었다. 자리에 모인 사람들 중에서 아직도 학교에 다니고 있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다들 열심히 살고 있었다. 대화의 소재는 다양했다. 우리는 각자가 속한 직업군에서 겪을 수 있는 고충들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결혼과 연애, 더 나아가 출산과 육아까지도 화제에 올랐다. 자리가 길어지고 좀 더 편안하게 속얘기를 펼쳐보이면서, 돈, 집, 차, 주식, 재테크 등의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들을 수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많은 인문학 전공 대학원생들이 쉽게 예상할 수 있듯, 내가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주제는 거의 없었다고 보면 된다.  
솔직히 말해 열등감을 느꼈느냐, 하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밖에는 할 말이 없다. 30대가 된 지도 훌쩍 지났지만 모아놓은 자산은 제로에 수렴한다. 매 달 용돈을 받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던 대학생 시절과 전혀 달라진 바가 없이, 한 달을 벌어 한 달을 먹고 산다. 앞으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길이 훤하게 열려있느냐면 그것도 아니고, 언제쯤 이런 한달살이 인생이 끝날 수 있을는지 장담할 수도 없다. 비교를 안 할 수 있을 만큼 담대하지도, 자신이 있지도 않다.
무엇보다 그 자리에 있는 몇몇은, 내가 기억하고 있던 모습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들은 나를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책상물림’ 정도로 대했다. 그러니 내 열등감이 더욱 폭발할 수 밖에. 그들 눈에는 내가 하는 공부라는 것이 너무나도 쉽고 즐거운 ‘풍류’로 보이는 것 같았고, 그래서 나를 팔자 좋은 ‘한량’으로 보는 것 같았다. 그들이 말하고 있는 세상물정이라 함은, 돈을 버는 법, 리스를 해서 좋은 차를 타는 법, 부동산 시세에 대해 빠삭해지는 법, 인간 관계를 둥글게 잘 만들어가는 법, 회사에서 실적을 뺏기지 않고 살아남는 법, 상사에게 욕을 처먹지 않는 법, 술자리에서 그럴싸한 건배사를 읊는 법,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여자들을 후려치는 법 등이 포함된 개념으로 보였고, 그리고 그 무엇보다 중요한 사항은, 다른 사람들에게 세상 물정을 잘 아는 현명한 사람으로 보이는 법인 듯 보였다. 그렇게 보이기 위해 그들이 무진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을 나는 술자리가 한참이나 진행된 뒤에야 알 수 있었다.
지난 몇 년동안 소위 사회생활이라는 것을 통해 남성주의적이고 위계서열적인 논리를 습득하고 체화한 뒤, 마치 그것이 진짜 세상의 전부인양, 별 대단치도 않은 통찰을 쏟아내는 그들의 모습에서 나는 심한 데자뷰를 느꼈다. 그들은 누군가들을 흉내내고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사회생활의 선배로서 충고를 해주었다. 인맥을 어떻게 쌓아가야 하는지, 교수님들 뻘 되는 기성 세대의 남자들에게 어떻게 잘 보일 수 있는지에 대해 알려주었다. 웃기는 일이었다. 그렇게 올드하고 얄팍한 수로 뭔가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나이브함의 진수가 아니겠는가. 세상물정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하는 그 태도, 그것이야말로 세상물정을 제대로 알지 못함의 증명이다. 하지만 나는 싫은 내색 없이 적당히 장단을 맞춰 주었고,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즐겁게 헤어졌다. 너희들만 사회생활을 할 줄 아는 것은 아니므로.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4 08:43: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