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동향] ‘동아시아 보편평화’ 향한 세계 석학들의 제언

6면 학술동향

‘동아시아 보편평화’ 향한 세계 석학들의 제언

제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 기념 특별 국제학술회의 <동아시아와 보편평화 구상>이 지난 9월16일(수)부터 9월21일(월)까지 연세대학교에서 개최되었다. 이번 회의에는 존 던(캐임브리지 대학교 교수), 베르너 페니히(베를린 자유대학교 명예교수), 고모리 요이치(도쿄대학교 교수), 와다 하루키(도쿄대학교 교수), 가라타니 고진(평론가) 등의 해외 학자를 비롯하여 이부영(민주 평화 복지 포럼 대표), 문정인(연세대학교 교수), 박명림(연세대학교 교수), 김우창(고려대학교 명예교수) 등의 국내 학자들이 참석했다. 평화학(Peace Studies), 화해학(Reconciliation Studies), 치유학(Healing Studies)에 대해 연구해 온 세계적인 학자들은 평화회의를 계기로 한자리에 모여 ‘동아시아와 보편평화’에 대한 견해를 나누었다.
특히 이번 평화회의 개최 기간 중인 19일(토)에는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가능케 한 ‘안보 법안’이 일본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어 주목을 이끌기도 했다. 이는 일본의 무력 행사를 영구히 포기할 것을 명시한 평화헌법 제9조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으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자민당은 평화헌법 무력화에 반대하는 일본 내 여론을 무릅쓰고 법안 처리를 강행했다. 이번 국제 평화회의는 아베 신조의 ‘안보법안’ 강행 처리로 인해 일본 군국주의 부활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며 동아시아에 위기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개최된 것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달랐다.

동아시아 영구 평화 수립의 조건
평화회의 환영사에서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는 ‘폭력 없는 낙원’을 향한 열망은 ‘사람의 본래적인 희구’라며 평화에 대한 논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첫날 존 던 교수는 <동아시아의 보편 평화> 강연에서 “동아시아에서 영구 평화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류가 이성적으로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편견 없고 실현 가능한 조건의 고안 및 수립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심화되고 있는 영토 분쟁과 국민 주체 간 분쟁, 천연 자원을 둘러싼 분쟁들”을 비정치화하여 평화 수립의 기본 바탕을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부영 민주·평화·복지 포럼 대표는 <분단 한국에서의 평화통일운동과 동아시아의 현실>에서 해방 이후에 진행된 평화통일운동에 대한 탄압은 해방 이전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식민지 탄압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부영은 해방공간에서 분단정부 수립을 막기 위해 진행된 ‘평화통일운동’과 1960년 4월 민주혁명 당시의 평화통일론, 1972년 박정희 독재정권의 유신선포 직전에 제기된 천관우, 장준하 등의 <복합국가론>에 대한 논의를 고찰했다. 또한 정지석 국경선 평화학교 대표는 <함석헌의 민중평화론-평화의 정치 사상>에서 20세기 한국의 평화사상가이자 실천가였던 함석헌의 평화사상을 조명했다. 그에 따르면, 함석헌의 반전 평화사상은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 전쟁의 경험에 근거한 절대적 반전 평화주의(Absolute anti-war pacifism)로 요약된다. “전쟁은 ‘절대 악’이며, 군대는 ‘가장 사치한 쓰레기’”라고 강조했던 함석헌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고, 군대 징집 거부를 가르쳤으며, 절대 반핵무기를 주창하는 정치적 실천 사상을 전개했다.

현대 일본의 평화헌법 수호를 위한 ‘9조 회’ 운동
둘째날과 셋째날에는 일본 학자들의 발표가 주목을 이끌었다. 현재 일본에서 헌법 9조 수호위원회 사무국장을 역임하고 있는 탈식민주의 이론가 고모리 요이치 교수는 <문화에서 생각하는 일본의 평화사상: ‘제 9조 회(會)’의 역할을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고모리 요이치 교수는 “아베 정권이 현행 헌법 하에서 역대 정권이 헌법 9조 위반이라 여겨왔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용인”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현 아베 정권이 미일안보조약체제 하에서 집단적 자위권이라는 명목으로 미국을 비롯한 타 국가 군대에 대한 무력 공격이 있을 경우에도 ‘무력행사를 수반하는 출동이 가능하다’는 해석개헌을 실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모리 요이치 교수는 ‘평화안전법 제정 및 정비 법안’이라는 역설적인 명칭으로 일본 군대의 해외 파견을 가능케 한 이 법안이 “입헌주의 자체를 짓밟는 것”이며, “의회 민주주의를 부정하면서 대미 종속을 우선시 하는 아베 정권 본연의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고모리 요이치 교수는 1990년 걸프 전쟁 이후 일본에서 자위대 해외 파견을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질 당시 결성된 ‘9조 회’ 운동을 중심으로 일본 평화 사상의 현 단계를 고찰했다. ‘9조 회’는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 비평가, 철학자, 헌법 학자 모임으로 2004년 6월 10일 최초로 결성되었다. 9조 회 성명에 참가한 이들로는 이노우에 히사시, 가토 슈이치, 미키 무츠코, 오다 마코도, 오쿠타히라 야스히로, 오엔 겐자부로, 사와치 히사에, 츠루미 슌스케, 우메하라 타케시 등 9명이 있다. 이들은 ‘9조 회’ 결성 성명서에서 “개개인의 일본 국민이 모여 스스로 주권자로서의 자각을 가지고 헌법을 재선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9조 회’ 구성원들이 전국 주요 도시 강연회를 개최하면서 성명에 동참하는 이들이 확산되었고 전국적으로 ‘9조 모임’이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되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권이 ‘우정 민영화’를 둘러싸고 권위적인 행보를 보임에 따라 전국적으로 ‘9조 회’ 결성이 급증했다. 2006년 제1차 아베 정권이 집권한 이후 2007년에 이르러 ‘9조 회’는 6000여개로 증가했다. 당시 요미우리 신문 헌법 여론 조사에 따르면, 헌법 개정에 반대하는 여론은 3년 연속 증가하고 찬성 여론은 감소했다. 더불어 7월 중위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참패하고 9월에 1차 아베 정권이 붕괴했으며 2008년에는 헌법개정 반대를 주장하는 여론이 팽배했다. 고모리 요이치 교수는 이것이 “풀뿌리 여론 전환의 승리”라며 당시 ‘9조 회’ 운동의 성과를 되짚었다. 그는 현 2차 아베 정권이 당시 해내지 못했던 법안 처리를 다시 시도하고 있다며, “제1차 아베 정권 교체 과정의 교훈에 입각해 어떤 운동을 구축할 필요가 있는지” 성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전후 평화주의의 재고찰
한편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는 <일본 전후 평화주의 재고>에서 항복 이후 일본에서 나타난 평화주의를 고찰했다. 최근 와다 하루키 명예교수는 지식인 281명과 더불어 ‘2015년 일한 역사문제에 관한 일본지식인 성명’을 발표하여, 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게 전후 70년 담화에서 사죄와 반성을 명확히 표명하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에 나설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번 발표에서 와다 하루키 명예교수는 전후 일본에서 ‘비무장 평화 국가’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된 기원을 탐구했다. 통념적으로 평화 국가체제 구상이 시작된 것은 맥아더 장군이 1946년 2월 일본 신헌법에 대해 세 가지 주의점(맥아더 노트)을 적어 놓은 이후로 알려져 있다. 맥아더 장군의 노트는 ‘국제 분쟁 해결 및 자가 안보 수비를 위한 전쟁의 포기, 육군, 공군, 그리고 해군의 유지 금지’를 포함하고 있다. 이것이 일본 헌법 9조 2항의 바탕이 되며 일본의 평화국가로서의 바탕을 세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와다 하루키 명예교수는 전후 일본에서 이미 평화주의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첫째는, 미군 공습을 경험하면서 생긴 일본 국민들의 ‘정신적 평화주의’로 이후에 일본 국민들 사이에 반 군사적 감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둘째는 1945년 9월 4일 황제 교서로 반포된 천황의 “평화국가 건설” 슬로건이다. 이는 제국집단의 정치적 계산의 산물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국민들에게 새로운 목표를 제시했다. 셋째로는 전후 일본 사회에서 등장한 비무장 신일본에 대한 학자들의 전망을 꼽을 수 있다. 와라야 대령, 이시하라 간지 장군, 소설가 오사라기 지로, 시인 사토 이치에이, 저널리스트 마루야마 겐지 등은 만장일치로 일본이 비무장 국가로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비무장 국가로 나아가는 것만이 패전국 일본의 자부심을 지킬 수 있는 길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주장했다. 와다 하루키 명예교수는 현재 헌법 9조가 맥아더 노트와 연관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까지 60년 동안 평화 국가가 존속해 오고 있다”며, “이 기간 동안 일본 군인들은 단 한 사람도 영토 외부에서 다른 이를 죽이거나 혹은 죽임 당하지 않았다”며 평화헌법의 의의를 강조했다.

영구평화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 필요
진보된 형태의 연합, 연대 추구해야
마지막 날 강연에서 일본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은 <반복-강박으로서의 평화를 넘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의 평화헌법은 사실상 군대를 불허하지만, 실제로는 일본에 명백하게 자위대가 존재하며 세계 최고 수준의 예산을 방위비에 투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가라타니 고진은 논리적으로 본다면, 평화헌법을 개정 혹은 폐기하거나 자위대를 없애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지만 현재 일본이 그렇지 않은 까닭은 평화헌법이 일본인들의 집단적 양심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현재 일본의 평화헌법은 일본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정치권은 이를 계몽적 좌파의 영향이거나 반성의 결과로 해석하지만, 만약 이에 머물렀다면 평화헌법 9조는 이미 폐기되었을 것이다. 정치권은 이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가라타니 고진은 지적했다. 그는 현대 일본인들의 심성 구조를 프로이트 이론에 기반하여 분석했다. 프로이트는 전쟁에 참가했던 군인들이 전쟁 이후에도 전쟁에 관한 꿈을 반복적으로 꾸는 식의 ‘반복 강박 노이로제’를 무의식적인 죄책감의 발현이라 분석한 바 있다.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 국민들의 평화헌법 9조에 대한 지지는 “자발적이거나 의식적인 지지가 아닌” 무의식적인 층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처음부터 헌법 9조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군과 같은 외부 세력에 의해 강제된 조약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공격 본능의 포기가 강제되었고, 무의식적 차원에서 국민적 죄책감이 자리하게 되었다는 것이 가라타니 고진의 설명이다. 그는 이 과정에서 평화헌법에 대한 수호가 집단적인 양심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베 정권이 이웃 국가와 긴장 관계를 형성하고 여론을 호도하는 방식으로 전쟁에 대한 불안감을 조장하고 있지만, 아베 정권이 의식적 차원에서는 성공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결코 일본 국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는 없을 것이라 일축했다. 그는 “일본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며 긍정적인 전망을 제출했다.
또한 가라타니 고진은 이번 강연에서 “칸트가 이야기한 영구평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형태의 연대와 연맹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국제 연맹이 와해되기 쉽다는 점을 확인한 만큼, ‘진보된 형태의 UN’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국가와 자본에 저항하는 여러 형태의 시민운동들과 혁명들 간의 연대가 필요하다”며, “이러한 생각이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이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지만, 자연의 간계(cunning of nature)를 인정하게 될 날이 올 것”이라는 확신을 표명했다.

평화의 초월적 개념과 내적 영역에 대한 고찰
‘평화를 보편화하는 문화’ 정착시켜야
이번 평화회의는 김우창 명예교수의 <영구 평화를 기다리며-평화의 초월적 개념과 내적 영역> 강연으로 막을 내렸다. 그는 이 강연에서 칸트의 영구 평화에 관한 에세이를 바탕으로 평화 개념을 검토했다. 그는 평화 개념을 성찰하고 실질적으로 제도화하기 위한 탐색이 필요하다며 이를 위한 다양한 방법론적 토대를 고찰했다. “세계시민주의의 가능성에 대한 철학적이고 성찰적인 사유들(Nussbaum Stoicism)을 검토하고, 공격과 화해의 심리적 토대에 대해서 연구하고(Nussbaum, Anthony Storr), 개인적이며 집합적인 존재의 기초로써의 공격의 개념을 제거하는 인간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인 분석(Heidegger)을 탐색하고, 인간의 정신적 존엄성에 대한 감정의 공유에의 호소(Simone Weli)에 대해 검토하고, 인간 공동체에 대한 수행적인 규제(Confucius, Finagarette)를 살펴”봄으로써 평화 개념에 대한 깊은 이해를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한편 김우창 명예교수는 칸트의 영구평화 제안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현대에 들어와 고려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요소들로 세계 빈곤 문제와 환경 및 생태 문제를 손꼽았다. 그는 “세계의 빈곤 문제를 해결하는 시도 없이, 세계에 정의롭고 안정적인 평화 질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묵시론적 종말의 그림자로 인류를 위협하는 환경적이고 생태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지구적 평화는 물론 인간과 다른 생물체들의 서식지로써의 지구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어서 그는 보편적인 평화의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국가 내의 혹은 국제적인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안했다. 그는 국제기구에서 진지하게 후원하는 평화학 프로그램 마련을 제안하며, “평화를 보편화하는 문화에 기여할 수 있는 문화적 자원을 발굴”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김우창 명예교수는 이러한 프로그램들이 “칸트가 1795년에 상상했던 것과 같고, 또 인류가 끝없는 전쟁을 통해 기다려 온 영구 평화를 실체화시킬 수 있는 국가 연방의 탄생을 이끌어”내는 데 기여할 것이라는 전망을 제시하며 이날 강연을 마무리했다.

신아현 기자(ltas@naver.com) · 선민서 기자(minseo@korea.ac.kr)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4 14:2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