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문학동네, 2015.


너와의 사랑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기 위해서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있다. 둘은 서로에게 운명처럼 이끌린다. 불의의 사고로 인해 그들은 헤어지지만, 상대방을 잊지 않고 성인이 되어 운명처럼 다시 만난다.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을 때까지 둘은 서로를 사랑한다. 만남, 이별, 재회의 화소들로 구성된 이것은 익숙한 연애서사이다. 살을 붙여서 다시 말해보자. 한 남자가 있다. 초자연적 존재인 우주 알과의 접촉을 통해서 남자는 과거와 미래를 투시할 수 있는 능력을 얻는다. 어릴 적 인연을 되찾기 위한 시도를 하면 오래 지나지 않아 목숨을 잃게 된다는 것을 그는 안다. 그녀를 만나지 않고 부자가 되어 장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만나러 간다. 마찬가지로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을 때까지 둘은 서로를 사랑한다.
후자에서 도드라지는 것은 남자의 선택이다. 그는 그녀가 없는 삶의 가능성을 스스로 폐쇄시킴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한정시켰다. 진실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자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단, 연인과의 관계를 완전히 차단하는 것만은 제외하고 말이다. 배제할 수 없는 하나의 관계는 결국 또 다른 타자와의 불편한 조우로 이어진다. 그래서 장강명의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하 『그믐』)에 대한 설명은 조금 더 확장된다. 학교폭력을 당하던 한 남자 고교생이 있다. 그는 자신을 괴롭히던 동급생을 칼로 찔러 살해하고 구 년간 징역을 산다. 과거를 망각할 수 없는 남자는 피가 낭자하던 그날 그 뜨거운 정념의 순간을 현재처럼 생생하게 목격한다. 출소와 정신병원 퇴원 이후 남자는 자신이 죽인 동급생의 어머니를 만난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명확히 구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진행되는 복수와 속죄의 서사가 어떤 결말을 맺을지 궁금하다면 직접 『그믐』을 읽어보기 바란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흔한 연애서사의 수준은 충분히 넘어섰다는 것이다.
장강명은 『표백』(2011)으로 등단하고 『한국이 싫어서』(2015)로 대중적 명성을 얻었다. 『표백』에서 그는 "완성된 사회"라는 논쟁적 관점을 제출했다. 현재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와 수정자본주의를 뛰어넘을 수 있는 구체적 이념의 가능성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청춘들이 역사의 담지자가 될 기회를 박탈당했다는 사실을 고발하는 것은 "구약시대의 예언자"와 같은 세연이다. 그녀는 자살선언을 통해 지워지지 않는 하나의 사회적 얼룩이 되어 "완성된 사회"에 내재하는 분열을 가시화했다. 『한국이 싫어서』에서 한국이 싫어서 호주로 이민을 떠나 시민권을 획득하는 계나 역시 국가가 새로운 세대를 양육하는 공동체적 기능을 상실했다는 점을 드러낸다. 『표백』의 세연이 자살선언이라는 극단적 인식과 실천을 통해 시스템의 문제를 강렬하게 지적했다면, 계나는 보다 발랄하게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행위 그 자체로 국가라는 상징적 구조의 틈을 밝힌다. 그런데 이 두 작품에서 장강명의 특성을 찾는다면 『그믐』은 다소 의아한 일탈로 여겨질 수 있다. 자본주의 시대의 문제를 세대론적 차원에서 접근해서 묘파해낸 작가가 초자연적 모티프를 차용한 연애소설이라니. 그러나 『그믐』은 장강명이 지금까지 보여준 작품세계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우선 소재를 보자. 우주 알이라고 하는 하나의 인격이 주인공에게 들어간다는 『그믐』의 미신적 설정은 이미 「박쥐 인간」(『뤼미에르 피플』, 2012)에서 다뤄진 바 있다. 박쥐의 혼이 들어간 자는 타인의 슬픔과 비애를 먹고 사는 존재가 된다. 『호모 도미난스』(2014)에서는 숙주에게 정신조종능력을 주는 'X-인자'라는 것이 등장한다. 과거와 미래를 투시하는 능력은 「되살아나는 섬」(『뤼미에르 피플』)의 새홀리기 당주가 지닌 신력이기도 하다. 사실 장강명은 『월간 SF 웹진』의 편집자로 활동하기도 했던 SF매니아이며, 공상으로부터 자신의 창작 양분을 얻는 작가이다. 무엇보다 장강명 소설에서는 유사한 세계관과 주체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결정론적 닫힌 세계가 후경으로 제시되고, 환경에 지배당하기를 거부하는 특별한 개인이 전경에 배치되는 것이 장강명 소설의 구조이다. 미래에의 가능성이 닫힌 곳에서 패턴의 반복에 불과한 인생을 영위하면서도 주인공은 가치를 향한 여정을 포기하지 않는다. 사랑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타자의 온전한 수용과 환대가 아니라 사랑을 위해 온전히 자기를 버리겠다는 용기일 것이다. 이것은 자아도취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에 취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디에 취해야 한단 말인가? 『그믐』은 아포리아의 자유인에 주목하는 장강명식 연애소설이다. 남자는 “너와의 시간은 내 인생 최고의 순간들이었어. 난 그걸 절대로 후회하지 않아.”라고 말한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4 10:4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