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애, 『시인의 집』, 문학동네, 2015.

시를 삶으로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인이란 시를 쓰는 사람이고/ 동시에 시를 쓰지 않는 사람이다”로 시작하는 시가 있다. 폴란드의 시인 타데우시 루제비치가 쓴 「시인이란 누구인가」의 첫 구절이다. 루제비치는 나치의 유태인 학살,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던 당시의 폴란드에서 시를 썼다. 가공할 폭력의 시대에 그는 계속해서 삶과 죽음의 의미에 가닿고자 했고 동시에 시와 시인의 의미를 물었다. 그에게 삶과 죽음은 곧 시 자체였으며, 그 의미에 닿고자 하는 것은 곧 시의 의미를 묻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시를 쓰지 않는 순간에도 시인일 수 있었다.
  시인(詩人)이란 누구인가. 시를 짓는 사람만을 시인으로 보는 기왕의 시선을 넘어서 “시를 삶으로 ‘살’ 수 있다면 더 좋겠다”고 다짐하며 살아가는 이를 시인이라고 할 수는 없을까. 전영애 서울대 독문과 교수는 최근의 저작 『시인의 집』에서 시를 삶으로 살겠다는 바람을 몇 번이고 되새긴다. 『시인의 집』은 전영애 교수가 트라클, 첼란, 쿤체, 릴케, 횔덜린 등 13명의 시인의 집을 직접 방문한 뒤 적은 글들을 모은 책이다. 1차 세계대전 때 위생병으로 배치되었다가 부상병들의 고통을 보다 못해 자살을 결심한 트라클은 시대의 문제를 “온몸으로 앓은 듯” 시를 썼고, 사랑의 실패와 방랑 이후 미쳐버린 횔덜린은 어느 목수의 집 뾰족한 탑 아래 작은 방에서 서른여섯 해 반생(半生)을 보내며 제정신이 돌아올 때마다 시를 적었다. 책에서 만난 이들은 삶의 무게를 온전히 견딘 채로 시를 적은 시인들이다. 시를 짓는다는 점에서도, 시를 통해 삶을 살고 견뎠다는 의미로도, 이들은 시인이다. 그 삶과 시의 자취들을 좇아서 시를 삶으로 살고 싶다는 전영애 교수를 만났다.

“한 생애의 발자국들 위에 내 발자국을 얹어본다.”
  책이 만들어진 경위에 대해 묻자 그녀는 이 책이 애당초 기획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 책의 글들은 책 출간을 위한 기획 아래 쓰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시인의 집에 방문하게 될 때마다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쓰였습니다. 시인의 집을 방문한 것도 여행 수기나 르포를 작성하려는 목적 때문이 아니었지요. 제 스스로에게 어떤 물음이 던져지고 그 물음이 절박해졌을 때마다 물음을 들고 시인의 집에 찾아갔습니다. 이때의 물음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겠는데요, 하나는 시에 대한 것, 또 다른 하나는 나 자신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나이가 들었지만 여전히 시에 대한, 그리고 삶에 대한 무거운 물음들이 계속해서 생기곤 하더라고요. 이 글들은 그렇게 하나하나 쓰였습니다. 요절한 시인 트라클의 무덤에 젊은 시인 첼란이 들꽃다발을 놓는 동작, 그 동작은 많은 사람들을 잇습니다. 저도 그런 동작을 했던 것이지요.” 유태인 수용소에서 죽음을 면한 첼란은 이곳저곳을 떠돌다 릴케, 트라클, 하이네의 흔적이 있는 파리에 정착한다. 책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은 첼란의 시를 인용했다. “한 생애의 발자국들 위에 내 발자국을 얹어본다.”
  이어 그녀는 한때 독일어로만 글을 쓰던 시절이 있었다면서 독일어 글쓰기에서 우리말 글쓰기로 넘어올 수 있었던 계기로 이 책 안의 글들을 저술한 경험을 꼽았다. “예전 어느 순간, 한국어가 아닌 독일어로만 글을 쓰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 이유를 스스로 추측해보건대 쓰지 않을 수 없는 글을 쓰는 방편으로 독일어 글쓰기를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평생 글을 안 쓰고 살 수는 없고 우리말로 글을 썼을 경우에는 이 글이 언제쯤 출판될 것인가 하는 등의 허영심에 사로잡힐 것만 같았기 때문에 독일어로 글을 썼던 것이죠. 겨우 세 학기 유학한 제가 쓴 독일어 글이 출판된다는 것은 아예 상상 밖의 일이었습니다. 출판이나 명성에 대한 인정투쟁 같은 외부적 기대를 버리고 오롯이 나를 대면하기 위한 글쓰기를 위해 독일어를 선택해왔던 것이랄까요.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말 글쓰기가 그리워졌습니다. 다시 돌아와 우리말로 글을 쓰고 저 자신과 마주하고 싶었습니다. 그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 시인의 집을 다녀오면서 쓴 이 글들입니다.”

섬세하고 따뜻하며 올곧은 시적(詩的) 삶
  시인의 공간을 찾는 것이 시에 다가서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까. “시인들의 시와 생애를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그 공간에서 무엇을 보라보며 그런 구절을 적었을까를 가깝게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창밖을 내다보며, 길모퉁이를 지나며 무엇을 바라보았을까, 어느 나무와 꽃이 시가 되었을까, 그것은 어떤 구절로 결정(結晶)되었을까, 시인의 눈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했던 것이죠. 다시 말해 힘들고 고된 삶 속에서 시인들이 바라본 것들은 어떻게 시가 되고 그들의 삶을 견디게 했던 것일까 생각했습니다.”
  시의 구절이 어려운 삶을 견디는 과정에서 나온 결정체라면, 그렇게 남은 시는 후래자들에게 어떤 영향으로 남을 수 있을지 물었다. “시구의 힘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그것은 매우 작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미치는 영향은 상당히 깊을 수 있어요. 시인들은 주의 깊게 삶을 바라봅니다. 삶을 바라보는 그 깊은 시선은 따뜻하고 섬세하면서 동시에 올곧다는 점에서 특별하죠. 물론 드물게 시인 개개인의 삶이 파행적일 때가 있기도 하지만, 그런 외적인 것을 떠나 시 자체, 시인 자체는 그런 것 같아요. 오롯이 실험적인 것, 반짝하는 재주로만 오래 남는 시는 별로 없습니다. 시가 당장 많이 읽혀서 파문을 일으키고 책이 많이 팔리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삶을 잘 견뎌내고 감당해온 자가 쓴 시, 그리하여 그걸 읽는 사람들 또한 삶을 견디고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시가 오래 남지요.
  지난 여러 해 동안 제가 특히 주목해온 연구 테마가 ‘시어의 힘’입니다. 어떤 말은 평범한데도 힘이 있고, 어떤 글은 엄청난 미문인데 다 읽고 나서 마음을 움직이지 않기도 합니다. 참 신기하게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이란 저자가 많은 것을 담은 글, 본인의 삶과 사유와 감정을 온전히 담은 글이더라고요. 이런 시들을 읽고 시인들을 만나며 지낸 것이 저한테도 큰 도움이 됐어요. 문학이 주는 현실적인 소득들을 생각하지 않으며 지내왔는데, 그러다보니 하나마나한 말은 안 하고 빈말은 안 쓴다 하는 것만큼은 배웠어요. 여러 시인들을 만나면서 그런 용기를 얻었습니다. 제게 있어 시를 삶으로 살고 싶다는 것은, 결국 세심하고 따뜻하고 바르게 살고 싶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반적인 삶의 태도에 대한 것이죠.”

또 다른 시인들의 집을 위하여
  이 책의 마지막은 그녀의 공간에 대한 이야기로 맺음된다. 또 다른 ‘시인의 집’이라 할 수 있는 그 공간에 대해 물었다. “책에 나온 공간은 제가 거주하는 집이고, 이 집을 얻은 뒤 만들게 된 것이 여백서원입니다. 모두 여주에 있어요. ‘여백’의 의미를 비어있는 부분(餘白)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는데요, 그렇게 생각해주시는 것도 참 감사하지만 사실 여백은 같을 여(如) 흰 백(白)을 써서 맑음과 같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저희 아버지의 호이기도 하지요. 제가 독일에서 정자를 지을 때 아버지가 정말 좋아해주셨는데, 여백서원을 짓는다니까 평생 아껴서 모은 일억을 보태주셨어요. 국가나 다른 기관의 지원을 받지 않고 만들어서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도 있었지만, 보이기 위한 성과나 자료를 만들 필요가 없어서 좋아요. 맑은 사람들이 모이고 모인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공간을 원했습니다. ‘맑은 사람들을 위하여, 후학을 위하여, 시를 위하여’는 여백 서원의 모토입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은 일반 공개일이라 다양한 행사들이 열리고 있습니다.”
  그녀는 지난 해 발간된 에세이집 『인생을 배우다』에 이 여백서원을 지으면서 들었던 마음들이 고스란히 들어있다고 전하며 다음의 구절을 읊었다. “한편으로는 세상이 무법천지 같아, 무슨 수든 쓰지 않고는 못 살 듯하지만, 살아보니 바르게 살아도 살아진다. 남을 배려하고 격려하며 살면, 조금 더 잘 살아진다. 쓸데없는 계산하느라, 남들과 비교하느라 힘과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면 제법 많은 것을 이룰 수 있기도 하다. 내가 거쳐 온 시간이, 내가 만난 사람들이, 그것을 깨닫게 했다.”

  앞길이 까마득하기만 하던 이십대 후반의 대학원 시절, 카프카를 한 자 한 자 옮겨 적고 번역하면서 마음의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는 책의 한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건넸다. 대학원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묻자 그녀는 “공부는 바보 같은 사람들이 하는 것 같아요.”라며 운을 뗐다. “그 시절에는 일 년에 한 명만 독일 유학을 갈 수 있었고, 게다가 여자가 공부를 계속하는 것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습니다. 먹고 살길도 막막했고요. 어떤 선생님께서는 제가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 하니까 ‘비극의 씨앗’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시절의 힘든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방에 박혀 카프카를 깊이 읽었고 그로부터 위안을 받았습니다. 그 때 번역했던 원고들은 여전히 책상 서랍 안에 있어요. 당시에는 예기치 못했지만 그렇게 한 작가의 세계를 집중해서 읽은 경험은 제가 지금까지 글을 읽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최근에 와서는 제가 비극의 씨앗을 뿌린 것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하는 일을 힘들게 느낍니다. 어떤 것이 더 나을까 계산하면서 말이죠. 그러나 공부를 하고 싶다면 이것저것을 재기보다는, 역시 바보같이 하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 인터뷰·정리: 최은혜 기자 sinedoque@naver.com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4 05:3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