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의 시네마테크, 영화 체험의 박물관
-이스트 런던의 ‘클로즈업 필름 센터’ 방문기

  며칠 전 친구와 이스트 런던 지역에 최근 새로 생긴 소규모 독립 시네마테크인 ‘클로즈업 필름 센터’에서 토니 리차드슨의 1966년작 <마드모아젤>을 보았다. 한 시골 마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정숙한 이미지의 여교사로 분한 잔느 모로가 동네 야산에서 벌목 일을 하는 목수에 대한 욕망을 억누르지 못하고 방화 등의 기행을 통해 분출하는 모습을 담은 작품이다. 1960년대 유럽영화답게 기이하면서도 다분히 자의식적인 화면 구성과 중성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잔느 모로가 뒤틀린 욕망의 팜므 파탈을 연기하는 모습이 짜릿했다. 하지만 독특한 액센트를 지닌 앞의 절반에 비해 잔느 모로와 목수의 결합을 담은 뒤의 절반은 다소 나태하고 인위적이며 전형적이라 지루했다. 이런 체험들에 대해 극장을 나서며 친구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날씨는 런던답게 내리다말다 하는 비로 인해 축축했고, 자그마한 단관 영화관의 지붕 밑에서 담배 한 대를 나누는 느낌이 아늑해서 좋았다.
  이런 공간의 소중함을 고백하는 데 어색함이 없지 않다. 1985년생인 나는 시네마테크 운동을 했던 세대로부터 한참 떨어져있는 관객이다. 영화가 좋아 서울아트시네마, 시네큐브 광화문, 스폰지하우스, 아트하우스 모모 등 이런저런 크고 작은 시네마테크와 예술영화관을 다니기 시작한 이후에도 딱히 어떤 영화관에 재정적 후원을 하거나 영화관 존폐 위기상황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일은 거의 없었다. 기업주도형 멀티플렉스들이 상업영화, 독립영화, 예술영화를 막론하고 시장을 완전히 장악해나가고 있던 시기에 영화를 열심히 보기 시작한 나로서는 대안적 공간의 존속 가능성에 대해 거의 비관적인 편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거기다 시네마테크와 예술영화관 사이에도 알게 모르게 문화적 권력관계가 작용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완벽한 대안적 영화관이란 어불성설이며 대안은 늘 또 다른 대안을 요구하게 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얼마 전처럼 친구와 기대치 않은 오래된 영화 한편에 대한 체험을 공유할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될 때면, 서울에서는 서울아트시네마 같은 곳들이, 런던에서는 클로즈업 필름 센터 같은 곳들이 오래오래 건강하게 늙어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된다. 영화관을 나와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면서 서울아트시네마 같은 곳들이 문득 더 그립고 애틋해졌다.
  클로즈업에 대해 짧게 설명하자면 일종의 영화를 위한 작은 도서관 같은 곳이다. 정문을 들어서면 중앙으로부터 오른쪽으로 작은 카페 공간이 있고 나머지 공간은 벽을 따라 DVD들이 가득 채워져 있다. 고전기 할리우드 영화부터 동시대 아시아 다큐멘터리까지 꽤 방대한 양의 자료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단돈 10파운드짜리 멤버십만 구매하면 된다. 영화할인까지 원한다면 40파운드짜리 멤버십이 있다. 한국영상자료원 같은 곳에 가면 영화는 물론 도서관까지 모두 무료로 이용이 가능한데 이런 공간이 대수냐 물을 수도 있겠지만, 영국의 영상자료원 격인 영국영화협회(BFI) 극장과 도서관, 미디어테크의 실정을 생각하면 그럴만하다. 국립 아카이브 시설이지만 영화티켓만 해도 10파운드를 웃돌며 DVD도 디지털화된 단 몇백편을 제외하면 7파운드 이상되는 유료 신청을 해야 한다. 매달 유명 배우전과 정전 중심의 감독전만 답습하는 태만한 프로그램 운영 방식은 더욱 실망스럽다. 그에 비해 영화 제목만 달랑 나열해놓은 클로즈업 프로그램은 예상치 못한 영화와의 우연한 만남들로 가득하다. 관객들이 알아서 프로그램을 탐구해야하며, 그래서인지 극장 역시 아는 사람만 아는 씨네클럽 같은 분위기도 풍긴다.
  영화를 역사적 산물로서 보존하고 널리 교육시키는 데에는 제도적 장치가 분명 필요한 것이 맞지만, 개별 영화를 감상하고 여러 사람과 나누는 데에는 비제도적 문화가 훨씬 절실하다고 생각된다. 영화라는 것이 교과서적 프로그램으로 정형화될 수 없는 예술이자 임의적이고 방탕한 사유를 통해 훨씬 더 잘 접근가능한 예술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가 학제 안으로 편입된 이후 세대인 우리 세대가 교과서없이 잡식성 영화보기를 통해 교양을 쌓았던 시네필 세대보다 자신의 힘으로 영화를 꿰뚫어보는 능력이 부족한 것도 그런 이유 탓일 것이다. 필름과 책은 아카이빙과 그를 바탕으로 한 교육이 가능하지만, 영화 체험의 방식은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런 탓에 영화 체험을 둘러싼 문화는 자본과 정부의 교착 속에 더 빠른 속도로 소멸해가고 있다. 필름에 새겨긴 빛과 어둠의 찬란함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방법에 대해 우리는 앞의 세대로부터 무엇을 전해받고 또 뒤의 세대에 무엇을 전해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함께 이루어질 때 시네마테크가 참된 가치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4 00:5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