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와의 대화> 조효제, 『인권의 지평』, 후마니타스, 2016



‘침해 해결’이 아닌, ‘달성’으로서의 인권론을 위하여


  ‘인권의 시대’라는 수사가 그리 어색하지 않은 시절이다.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이 인권의 견지에서 다뤄지고, 인권 침해가 발생할 경우 그 해결을 위해서 각종 제도와 법들이 속속 마련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실제로 인권을 보장하는 사회인가라는 질문 앞에서면 그렇다는 답을 하기에 머뭇거리게 된다. 우리가 인권을 충분히 발화하고 있는 것과 별개로, 사회 전반에서 인권이 존중되고 있는가 하는 체감의 차원에서 그것이 충분히 충족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제도와 법은 인권 침해 문제에 사후적으로 개입하고, 그것을 피한 또 다른 침해 사례들은 우후죽순으로 생겨난다. 그동안 우리는 이미 인권을 너무도 많이 말해 왔지만, 그렇기에 사실은 인권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왔던 것은 아닐까.

  그 답을 듣기 위해 최근 『인권의 지평:새로운 인권 이론을 위한 밑그림』을 발간한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조효제 교수를 만났다. 조 교수는 국제 엠네스티 자문위원과 서울시 인권위원의 역할을 맡아보는가 하면, 인권과 관련된 연구를 꾸준히 진행하면서 국내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인권학자다. 책의 내용과 관련된 질문을 던지기에 앞서, 인권 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를 물었다. “제가 인권을 공부 대상으로 처음 접했던 1980년대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활발하게 인권 담론에 대한 논의들이 오가지 않았습니다. 87년 이전까지만 해도 민주화 운동 진영해서 운동의 일환으로 인권 담론을 이야기 했고, 90년대에 진입해서야 그 말이 이념을 막론한 개념으로 쓰였습니다. 민주화 운동에 직접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던 저는 그런 흐름과는 다르게, 독일 국적의 허창수 신부님의 제안을 받고 엠네스티의 전신인 국제사면위원회에 관여를 하면서 아주 우연히 인권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물론 늘 정신적이고 감성적인 차원에서 시국에 대한 울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인권 공부가 마음을 자극했던 면이 있었지요.

  그런데 그 관심은 당파적인 지점보다, 오히려 ‘보편’적인 지점에서 시작됐던 것 같습니다. 이때의 ‘보편’이란 서구 이론이나 절대성을 의미하는 보편의 의미와는 다릅니다. 인권을 조금 더 보편적인 규범율로서 공부하고 싶었고, 세계적이며 보편적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당시 한국의 상황과 인권문제가 잘못됐다는 점을 밝히고 싶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건대, ‘보편’에 대한 저의 지향은 솔제니친 등의 세계문학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형성됐던 게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구소련의 인권탄압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뤘던 솔제니친이 처음 한국에 소개될 때는 반공작가라는 타이틀 때문에 운동권 진영에서 잘 읽히지 않기도 했습니다만, 저는 보편적인 인권 탄압의 문제를 다룬 솔제니친이 만약 한국에 왔다면 독재에 맞선 민주화 투사가 됐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식의 독서를 즐겨했었고 바로 이런 점들이 인권을 ‘보편성’의 지평에서 바라보게 하는 데 영향을 미쳤던 것 같기도 합니다. 어쨌든 그렇게 저는 ‘인권’이라는 창문을 통해서 광의의 사회운동이나 사회진보의 흐름 속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개별 권리의 총합으로 이해되는 인권담론을 넘어

  그동안 조 교수는 대중적인 차원에서 인권 개념을 알리는 작업, 중요한 인권의 고전서를 번역하는 작업, 스스로 생각하는 인권이론을 직접 구축해가는 작업을 두루 진행해왔다. 이번 책 『인권의 지평』은 새로운 인권 이론을 정립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2007년 발간된 『인권의 문법』의 후속이라고 할 수 있다. “『인권의 문법』은 인권을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것으로 옹호해버리는 태도에서 벗어나, 인권이론의 한계와 특징을 엄밀하고 비판적으로 재구성하자는 목적 아래 쓰였습니다. 맑시즘이나 페미니즘, 상대주의 등의 비판담론이 지적한 인권의 한계를 전면적으로 다루면서 인권담론이 빠지기 쉬운 문제들, 그리하여 앞으로의 인권론이 나아가야할 방향의 단초가 될 만한 것들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런 뒤에 민주주의와 인권의 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일반인들이 인권을 이해하는 방식과 전문가들이 인권의 논의하는 방식 사이에 괴리가 꽤 크다는 점을 간략하게 언급하고 넘어갔습니다. 이 책 『인권의 지평』은 그러한 언급에 대한 구체적인 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권에 대한 일반인, 전문가, 비판적 지식인들의 의견을 모두 듣고 난 뒤에 그것들을 잇고 매개하는 내용을 담고 싶었습니다.”

  이어 조 교수는 개별 권리에만 집중하는 방식으로 가는 기존 인권담론의 이해방식을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우리 사회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 학문의 자유, 이동과 거주의 자유 등, 개별 권리의 조각들로서 인권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개별 권리의 조각들을 더 세분화하고 전문화하는 과정에서, 조금 더 미시적으로 법과 제도를 만들어 문제를 해결하려는 입장을 강하게 가지고 있지요.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게, 1948년 채택된 <세계인권선언>에서는 ‘인권을 충족시키는 조건들이 중요하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인권 침해를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해결의 문제가 아닌 충족의 문제로서 인권에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일 터입니다. 다시 말해 인권에 대한 근본적인 조건들을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런 부분을 간과한 채 인권 문제를 논해왔습니다. 거시적 차원에 대한 고민이 적극적으로 반영되지 않은 채 개별 권리를 말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인권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숲 전체를 그리는 인권론으로의 접근이 필요

  그렇다면 거시적 차원을 고려해서 새로운 인권론을 구성해가야 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 “법이나 제도도 중요하지만, 모든 것을 법이나 제도로 환원해서 생각하는 것은 근본적인 인권 문제의 해결 방식이 될 수 없습니다. 실제로 한국의 인권 관련 법과 제도는 완성도로만 봤을 때는 세계적인 수준인데, 실질적으로 인권이 보장되고 있으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인권과 관련된 구조적 차원, 이데올로기적 차원, 국제관계적 차원, 사회심리적 차원 등 전방위적으로 인권이 달성될 수 있는 인권 친화적인 환경이 마련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인권 친화적인 정부가 들어서는 것도 중요하겠고요. 이런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채 개별 침해 문제 해결로만 인권 문제에 접근 했을 때, 그것은 마치 망가져 가는 숲을 염두에 두지 않고 썩어가는 나무 가지만을 치료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낼 수밖에 없습니다. 숲 전체가 병들어 있는데 나무 하나하나를 살리고 나무 가지 하나하나를 돌보려 하면 안 되겠지요.”

  이런 맥락에서 조 교수는 인권의 ‘내재적으로 표출적인 역할’을 강조한다. “근대 인권이 처음 생겼던 17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인권은 일종의 정치적 기획 하에 있는 개념이었습니다. 교회나 공동체로부터 벗어나 개개인이 자신의 의지로 모여 전체 권력을 형성하는 주권재민사상의 중요한 원리였고, 민주주의가 잘 돌아가게 하는 원활유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죠. 물론 이런 식의 인권은 제도와 법에 비할 때 추상적인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정치적 원리로서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권의 내재적이고 표출적인 역할입니다. 이러한 면을 되찾고 인권론을 재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권은 그 자신의 소멸을 지향한다.”

  거시적 차원을 함께 고려해서 인권을 ‘달성’해가는 과정의 지난함, 그리고 현실적 가능성에 대해 물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사람 사람들은 너무 추상적이고 막연하며 모호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지점을 이겨내고 돌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사회 문제는 쾌도난마식으로 단칼에 해결되지 않습니다. 느리고 어려울 지라도, 사회 전체가 좋아져야 인권문제가 좋아질 수 있다고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흔히 북유럽의 인권 현황이 긍정적이라고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안을 들여다보면 법적 제도적으로 인권 담론이 그리 활성화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민주 정치가 실현되고 있고, 사회 복지가 잘 갖춰져 있으며, 권위적이기 보다는 수평적인 관계의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인권을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바로 이것입니다. 인권은 자기 자신의 소멸을 지향합니다. 인권이 있으면 인권이라는 말은 사라지고, 인권이 없으면 인권이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겠죠. 모순적으로 들리시겠지만 인권은 인권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 상태를 원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그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 인권과 관련된 각종 제도나 법에 신경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거기에 더해 궁극적으로는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들기 위해서 인권의 근본조건부터 생각하고 그것을 달성하게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인터뷰의 주요 독자인 대학원생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대학원 과정을 전문연구자가 되기 위한 과정이라고 본다면, 이 때가 본인이 가장 열심히 공부하고 헌신과 관심을 쏟을 수 있는 시기일 것입니다. 실제로 박사논문을 쓰기 위해서 들였던 노력과 집중도를 되찾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학위 받은 연구자들이 많이 하지요. 지력과 성의와 공력이 합쳐서, 지성의 응축을 볼 수 있는 다이아몬드 같은 시기에 계신 것입니다. 그만큼 불확실한 미래를 감당해야 하고 불안한 현재를 견뎌야 하는 시기라는 것도 잘 압니다. 원래 위대한 결과는 안온하고 결과가 보장되는 확실한 상태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부디 힘을 내셔서 좋아하는 공부에 순수하게 집중하고 지적으로 헌신하시길, 그렇게 스스로를 단련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인터뷰·정리: 최은혜 기자 sinedoque@naver.com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9 15:2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