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의 역사는 진보의 역사가 아니다/ 스티븐 제이 쿨드, 『풀하우스』, 사이언스북스, 2002

한영인(인문학협동조합)


  진보와 진화는 엄격하게 구별되어야하는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자주 혼동되는 대표적인 개념들이다. “고화소, 흔들림 보정 기능과 매뉴얼 촬영, 대구경 조리개에 이르기까지 스마트폰 카메라 성능은 꾸준히 진화해왔다.”로 시작하는 한 기사의 문장은 이러한 혼동의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설명에는 구형 모델이 신형 모델에 비해 객관적으로 열등하다는 가치판단이 내재되어 있는바, 이때는 스마트폰 카메라의 성능이 진화한 것이 아니라 진보한 것이라고 해야 옳다. 진보와는 달리 진화는 뚜렷한 목적을 지향하면서 변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이 차이를 강조하는 일이 단순한 말꼬리 잡기로 비칠 수도 있으나, 진화를 열등한 것에서 우등한 것으로 나아가는 선형적인 발전 단계로 인식하는 사고의 위험성을 생각해보면 문제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가령 우생학과 사회진화론이 제국주의와 맺었던 역사적 친연성을 떠올려보라.
스티븐 제이 굴드의 <풀하우스>는 진보와 진화를 혼동하는 끈질기고 유구한 인습적 사고를 돌아보게 만드는 진화론의 고전이다. 속류 진화심리학과 사회생물학이 ‘과학’의 탈을 쓰고 횡행하는 요즘과 같은 시대에 굴드의 이 책은 이러한 편향을 교정해줄 관점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물론 진화심리학과 사회생물학에 대한 수준 높은 이해를 도울 책들이 다수 출간된 지금의 상황에서 <풀하우스>만이 진화론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책이라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책에서 펼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과 진화를 이해할 때 전체 시스템의 변이와 확산에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은 진화론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 간직할 만한 지침이 되어준다.
  굴드는 이 책에서 인류의 탄생이 진보적 성질을 가진 생명진화의 예정된 결과가 아니라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자연사 박물관이나 각종 과학책에서 흔히 보게 되는 생명 진화의 역사에 관한 그림과 도식들이야말로 진화의 경향에 대한 오류를 잘 보여주는 동시에 재생산하는 기제라고 주장한다. 그 그림들은 고생대 무척추 동물에서 시작하여 어류, 파충류, 포유류, 영장류로 진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것들은 진화의 역사를 마치 열등한 생명체에서 호모 사피엔스라는 우등한 생명체로 발전해나가는 것처럼 여기게 만들지만 굴드에 따르면 이는 “척추동물의 역사에서 지극히 미미한 한 갈래에 지나지 않는” 인간들을 “모든 다세포 생물들의 표본이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비록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가장 복잡한 생물의 정교함이 증가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는 전체 생명체의 역사에서 아주 제한되고 사소한 부분을 확대해서 해석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굴드는 간단한 통계학적 방법론을 활용한다. 그는 한 시스템의 변이를 올바르게 측정한다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생명의 역사를 도수분포로 그려놓고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그 다음 평균값이나 최빈값과 같은 추상적인 중심경향성에 현혹되지 말고 그가 “전체 시스템”의 은유로 사용하는 ‘풀하우스’의 변이에 초점을 맞춰 현상을 해석할 것을 주문한다. 이렇게 하면 진화의 과정에서 진보의 경향성이 관찰된다는 흔한 믿음은 시스템의 가장자리가 확장되거나 위축되는 변이의 한 극단에서 찾아낸 희귀한 대상에 근시안적 초점을 맞춘 결과라는 사실이 드러난다고 굴드는 말한다. 이러한 굴드의 주장은 진화를 경쟁을 통한 생존이 아니라 다양성과 변이의 증가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을 우리에게 제시해준다.
  이 책은 또한 야구의 오랜 고전이기도 하다. 여기서 그는 위에서 언급한 자신의 통계학적 방법론을 활용해 ‘4할 타자’가 실종된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이것은 시스템 전체의 변이를 어떻게 이해할 지에 대해 매우 생생한 실례(實例)를 제공하는데, 이를 통해 독자들은 생명 진화의 역사를 전체 시스템의 변이 속에서 이해한다는 것의 의미를 한층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야구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여기에 초점을 맞춰서 읽는 것도 좋을 것이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9 11:4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