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호가트, 『교양의 효용』, 오월의 봄, 2016.

‘문화 연구’의 고전을 읽다

  리처드 호가트의 『교양의 효용』이 번역되어 나왔다. ‘문화 연구’(cultural studies)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두었던 사람이라면 사뭇 관심을 가지고 이 책의 도착을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비록 레이몬드 윌리엄스나 스튜어트 홀 만큼 유명하진 않지만, 리처드 호가트는 저명한 문화연구자들을 배출했던 버밍엄 대학의 현대문화연구소(CCCS)의 초대 소장을 지냈던 문화 연구의 개척자이며 이 책은 20세기 초중반 영국 노동자계급의 문화를 저자의 경험과 수많은 문헌을 버무려 핍진하게 그려낸 역작이다.
  호가트는 이 책을 ‘노동자 계급이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그가 이 질문을 던진 이유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엄밀한 사회학적 분류의 필요성 때문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에 대해 일각의 사람들 – 특히 선량하고 낭만적인 태도를 지닌 지식인들 –이 지니고 있는 어떤 관념의 부당함을 주장하기 위함이다. 가령 우리는 노동자계급이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는가? 노동자 계급은 흔히 계급적으로 각성된 선진 노동자들의 집합이나 소시민이나 부르주아 계급이 지닌 속물성과 거리를 둔 채 삶을 정직하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힘찬 존재들로 그려진다. 하지만 호가트는 이러한 모습을 노동자 계급의 극히 일부인 “진지한 소수”의 모습일 뿐이며 “이런 유형의 노동자들은 대다수 노동자계급을 대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호가트는 여기서 노동자계급의 변혁성과 잠재성을 다루고 있다기보다는 차라리 대중으로서의 노동자계급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의 변천을 좇는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영국노동자계급이 지닌 독특한 정치성을 발견하고자 하는 독자라면 호가트의 서술에 조금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노동자계급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평범한 대중들의 삶의 모습과 사고방식에 관심을 둔 독자라면 이 책은 풍성한 하나의 선물꾸러미와 같다. 특히 책의 1부에서 서술된 노동자계급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에 대한 다채로운 묘사와 분석은 전통적인 노동자 대중들이 삶에 대해 지니고 있던 특정한 관념들의 면모와 한계에 대해 많은 것을 일러준다. 노동자계급이 가족과 이웃에 대해 가지는 태도,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 구성원들이 취하는 역할과 기대, 그리고 돈과 배움 등을 대하는 그들의 관점은 비록 지금의 관점에서 보아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고 보수적인 동시에 폐쇄적이고 제한적이지만 호가트는 노동자계급이 지니는 이러한 결점에 눈감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근거로 노동자계급을 과도하게 비난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기계적이지 않으면서도 균형 잡힌 그의 태도는 대중들의 인식과 행동을 대면하면서 우리가 흔히 빠지기 쉬운 성급한 판단의 위험성을 경계해야 할 필요성을 자각하게 만든다.
  책의 2부는 1부에서 다룬 전통적인 노동자계급의 가치관을 위협하는 새로운 대중문화의 영향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는 구체적으로 “출판이나 연예 산업의 특정한 발전 양상이 끼치는 영향력에 주목”하는데 이는 노동자계급에게 영향을 미치는 여러 요인들 중 ‘문화’ 분야만을 주목해서 관찰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호가트는 라디오 방송과 대중 잡지, 대중 소설과 대중  가요를 비롯해 광고 문안에 이르기까지 각종의 장르들을 세심하게 들여다보면서 새롭게 부상한 대중문화 산물들이 노동자계급의 인식과 행동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분석한다. ‘거대한 획일화’, ‘화려한 섹스 꾸러미’, ‘탄력을 잃은 용수철’ 등과 같은 표현에서 드러나듯 호가트의 결론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이러한 그의 결론은 언뜻 문화산업의 획일성과 순응주의적 성격을 강조한 아도르노 및 호르크하이머의 견해와 유사해보이지만 호가트는 노동자계급이 주어진 환경에 쉽게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는 때에도 그것에 저항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담지하고 있다는 점을 잊지 않으려 한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공부를 통해 노동자계급으로부터 ‘탈출’에 성공한 사람들을 다룬 10장이었다.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 자연스럽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거기서 오웰은 “프롤레타리아 출신이면서 장학금으로 교육받은 젊은이”들에 대해 그들은 “상당히 역겨운 사람들”이라고 힐난한 바 있다. 처음 오웰의 그 글을 읽었을 때는 그 적의(敵意)를 이해하기 쉽지 않았는데 호가트의 책을 통해 그러한 판단의 근거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다. 그러니 조지 오웰의 이 책을 함께 읽는다면 영국 노동자계급의 삶과 이를 다루는 좌파 지식인의 관점과 태도를 비롯하여 더욱 많은 생각거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9 06: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