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시대의 종언, 공생의 삶을 위하여

  이번 󰡔녹색평론󰡕(2016년 5-6월 통권 제148호)에는 성장 지상주의를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여러 필자들의 글이 수록되었다. 고부응, 잉그리드 필러/조진현, 황종원, 우치다 타츠루, 네이선 하든, 마사 누스바움는 자본주의 하에서 무너지고 있는 대학의 현실을 검토했다. 먼저 고부응은 ｢고난의 시대, 몰락한 대학｣에서 신자유주의 시대에 실용 대학으로 전락한 대학의 현주소를 고발했다. 대학의 본래적 의미에는 교수와 학생의 공동체라는 뜻이 담겨 있지만 현재의 대학에는 공동체도 없고 공동체의식도 없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교수들은 대학 운영에 참여하는 것은 고사하고 대학 운영진의 관리 대상이 되어 성과 경쟁에 매몰되어 있다. 또한 교수협의회가 있는 대학도 많지 않으며 설령 있더라도 대학 운영에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한다. 학생회 조직 역시 대부분의 대학에서 축제 등 학생회 행사를 주도하는 역할에 머무른다. 고부응은 현재의 대학이 끔찍한 미몽의 상태에 있다고 비판한다.

비판적 지성 상실한 채 영어에 몰두하는 대학

  잉그리드 필러와 조진현 두 교수가 공동으로 집필한 ｢한국의 대학과 영어강의-언어정책으로서의 신자유주의｣에서 한국 대학들이 겪고 있는 일련의 현상들이 미국식 자본주의 모델의 확산이라고 비판했다. 미국이나 영어권 바깥에서 영어를 학문의 언어로 사용하는 것은 사실상 ‘자발적 식민화’라는 것이다. 카이스트의 대학 구조조정 사례는 한국 대학에서 영어가 어떻게 확산되고 있는지 그 전형을 보여준다. 한국의 교육과학부는 지난 2004년, 로버트 러플린을 카이스의 총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자유시장의 전파자를 자임했고 대학 구조조정을 추진했다. 러플린의 후임은 한국계 미국 시민 서남표였다. MIT 명예교수였던 그는 100% 영어강의 정책을 도입했으며, 심지어는 중국어나 일본어 등의 외국어조차도 영어를 매개로 해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잉그리드 필러와 조진현은 이러한 발상은 공익을 위해 합리적으로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학문의 수월성’을 ‘평가’하기 위한 기준 맞추기에 급급할 때만 가능한 주장이라고 비판했다.

공유재 관점에 입각한 금융화폐제도 개혁
공립은행 설립운동의 의의

  먼저 김종철은 「성장시대의 종언과 민주주의｣에서 성장 일변도를 걷고 있는 한국 자본주의를 비판하며 세계 자본주의를 ‘프런티어’가 사라진 자본주의라고 규정했다. 미즈노 가즈오, 󰡔자본주의의 종언과 역사의 위기󰡕(2014)에서 자본주의 시스템이 종언을 고하고 있다고 말한다. 오늘날과 같은 낮은 이자율은 낮은 이윤을 의미하며, 이는 장기적으로 볼 때 극심한 불황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2% 이하의 이자율이 장기간 계속된다는 것은 단순한 경기사이클 이론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고, 오히려 그것은 자본주의시스템 자체의 수명이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로 봐야 한다고 미즈노는 말한다. 자본주의는 본시 ‘외부’ 즉 수탈과 착취를 할 수 있는 ‘프런티어’가 없으면 계속해서 성장할 수 없는 시스템이라는 것, 그리고 성장이 불가능하면 자본주의는 붕괴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라는 것이 김종철의 주장이다.
  월터 프레스콧 웹은 󰡔거대한 프런티어󰡕(1951)에서 이미 1950년대에 자본주의가 종언을 고할 것이라는 주장을 한 바 있다. 1950년대 무렵은 세계의 열강들이 식민지를 대부분 포기하고 이른바 제3세계의 열강들이 식민지를 대부분 포기하고 이른바 제3세계가 세계사의 무대에 등장하던 시기였다. 김종철은 󰡔거대한 프런티어󰡕의 예견들 중에 수용할 만한 부분도 있지만 그가 석유의 중요성을 간과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가 연대를 1950년대로 잡은 것은 성급하지만 자본주의문명의 필연적 종식을 언급한 것은 정당하다는 것이 그의 평가다.
  자본주의의 ‘프런티어’가 소멸했다는 것은 지구사회 전체가 직면한 긴급한 문제들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종철은 대의제 민주주의가 가능했던 기반에는 경제성장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경제성장이 끝난 상황에서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동력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종철은 사회 속에 존재하는 ‘공유재’를 공평하게 나누고 상호협력과 상호부조를 통해서 공생의 삶을 추구하는 길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일자리는 화석연료에 기반을 둔 대규모 생산-유통-소비-폐기의 과정들에서 필요한 일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최근에 진행되는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는 모든 국가 구성원들이 정기적으로 일정 금액을 일률적으로 지급하는 생활보조금(기본소득)에 필요한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지에 대한 논의이다. 일반적으로는 이와 관련하여 과세제도를 개혁한다는 의견이 제시된다. 그러나 필자는 과세제도의 개혁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공화국(republic)이란 한마디로 그 공동체가 개인이나 소수 그룹의 사유재가 아니라 구성원 전체에 귀속된 공공재(commonwealth)라는 뜻이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이 공공재를 특권적인 소수의 강자들이 배타적으로 점유, 사유화해온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학자 우자와 히로후비가 ‘사회적 공통자본’이라는 것도 명명한 것도 결국 공유재이다. 김종철은 화폐 제도 역시 공유재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말한다. 화폐를 민간은행이 영리 목적으로 발행하도록 허용하는 것을 중지하고, 정부나 공공기관이 직접 발행하는 구조를 만드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클리포드 더글러스는 ‘사회신용론(social credit)'이라는 개념을 1920년대에 이미 논리적으로 설명한 바 있다. 이와 같은 관점을 기반으로 ‘부분지급준비제도’를 혁파하거나, 아니면 사유화되어 있는 금융기관을 공유화하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일례로 미국과 세계 여러 곳에서 공립은행 설립운동이 시민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노스다코타주립은행도 역시 공공기관이다. 노스다코타주는 현재 미국에서 재정이 가장 견실하고 실업률도 가장 낮다고 알려져 있다.

연립형 비례대표제도의 필요성
뉴질랜드의 선거제도 개혁으로 바라본 정치혁명의 전망

  한편 하승수는 ｢정치혁명,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시스템을 바꾸기 위한 방안을 모색한다. 선거제도와 관료제도 등을 통해 ‘정치적 변동 가능성’을 없애고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 역시 그와 같은 노력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평등한 선거제도를 가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연구하고 토론해서 득표율에 따라 의석수를 배분할 수 있는 방식을 고안했다.
  대표적인 예로 뉴질랜드는 1993년 실시된 국민투표를 통해 지역구 소선거구제(1인 선출 상대다수제)를 독일과 유사한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뉴질랜드는 노동당과 국민당이라는 두 거대 정당이 번갈아가면서 정권을 차지하는 전형적인 양당제 국가였다. 그런데 1985년 여당이 된 노동당이 선거제도 개혁 문제를 밀어붙여 왕실선거제도개혁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1986년 이 위원회는 상대다수 소선거구제를 연동형 비례제(독일식)로 대체할 것을 권고했다. 1996년에 치러진 총선에서 뉴질랜드는 결정적으로 양당제에서 다당제로 전환하게 되었다. 득표율에 따라 의석을 배분한 결과, 제1당의 위치를 차지한 국민당이 33.87%를 얻었고, 120석 중 44석을 차지했다. 단독으로는 집권이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국민당은 17석을 차지한 뉴질랜드제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게 되었다. 뉴질랜드는 3년을 주기로 국회의원을 선거를 치르기 때문에 선거는 1999년에 있었다. 1999년에는 큰 변화가 일어난다. 노동당이 제1당이 되고, 정체성이 뚜렷한 정당인 녹색당이 원내정당으로 진입한다. 2014년에 있었던 총선에서는 총 7개 정당이 국회 내에 의석을 가진 원내정당이 되었다. 제1당인 국민당은 121석 중 60석을 차지했고, 노동당은 32석, 녹색당은 14석을 차지했다.
  이와 같은 뉴질랜드 선거제도의 변화는 대한민국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뉴질랜드에서는 1980년대와 90년대 중반까지 신자유주의정책 흐름이 지배했다. 그런데 범국민적 여론이 형성되면서 다당제로 전환할 수 있는 계기가 선거제도 개혁을 통해 만들어졌다. 대한민국도 뉴질랜드처럼 한 명의 유권자가 지역구투표 한 번과 정당투표 한 번을 하는 1인 2표 시스템이다. 대한민국은 득표율에 따라 의석을 배분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아니라 지역구와 비례대표가 따로 노는 사이비 비례대표제(병립형 비례대표제)다. 1986년 뉴질랜드에서 선거제도개혁시민연합(ERC)라는 단체가 만들어져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운동을 했을 때, 운동 목표는 아주 단순한 것이었다. 운동의 슬로건은 ‘모든 투표가 계산되게 하자!(Make your vote count)’였다. 대한민국에서도 선거제도 개혁을 하려면 소수 정당-시민사회-기득권 정당 내부의 양심적 정치인들의 역할이 필요하다. 광범위한 연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하승수의 견해다.

탈식민주의 관점에 입각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 검토
일본 지식인들의 제국주의적 사고에 대한 비판

  또한 이명원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지식인의 지적 쇠퇴｣에서 2015년 12월 28일 한일 외무장관이 발표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 대한 양국 정부의 합의사항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이 문제에서 합의가 되는 주요한 쟁점이 되는 것은 첫째, 일본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책임 소재를 분명히 밝히고 있는가, 둘째,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법적 배상을 인정하고 있는가, 셋째, 위안부 피해자의 명예회복을 위한 필요한 후속 조치를 취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들 합의문은 공통적으로 이번 합의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실시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불가역성’을 주장하는 수사는 한일관계 협상의 과정에서 1910년 경술국치의 순간, 그리고 1962년 한일협정 당시에 등장했다는 것이 이명원의 지적이다. 이명원은 이번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일본 지식사회의 관점을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는 일본 지식인은 요시미 요시아키와 와다 하루키다. 먼저 요시미 요시아키는 월간지인 󰡔세카이󰡕에 한일 정부 간 위안부 졸속 합의가 이루어진 직후 자신의 견해를 차례로 밝힌 바 있다. 와다 하루키의 경우는 한국의 󰡔한겨레󰡕 지상에서도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재일조선인인 서경식과 지상 논쟁을 벌인 바 있다. 와다는 󰡔세카이󰡕에 발표한 것과 동일한 논리를 폈다. 요시미 요시아키는 󰡔세카이󰡕 2016년 3월호에 ｢참된 해결에 역행하는 일한 ‘합의’｣를, 이어서 다음 달에는 와다 하루키가 ｢아베 수상의 사죄는 끝나지 않았다｣를 발표했다.
  먼저 요시미는 2015년 12월 28일 한일 양국 정부의 위안부 문제 합의가 피해자를 억압한 토대 위에서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요시미 교수는 이번의 합의를 ‘백지화’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요시미 교수가 12.28 협의를 평가하는 시각에 대해서는 한국의 위안부 피해자 당사자는 물론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약칭 정대협)를 포함한 한일의 지원, 시민 단체와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는 연구자들 역시 동의하고 있는 실정이다. 무엇보다도 이 합의는 피해 당사자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 즉 피해자의 ‘자기결정권’을 한일 양 정부가 명백하게 침해한 일방적 합의라는 점에서 애초에 정당성을 인정하기 어려운 졸속 협상이다. 요시미 교수의 비판과 달리, 리버럴 진영의 지식인으로 평가받는 와다 하루키 교수는 12.28 합의의 성과를 인정하고 후속 조치를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논란에 휩싸였다. 󰡔세카이󰡕에서 그가 피력하고 있는 위안부 합의에 대한 생각은 그의 저작인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에서 피력한 내용의 연장선상에 있다.
  요시미 요시아키와 와다 하루키는 일본에서 리버럴 지식인으로 분류된다. ‘리버럴(liberal)'이란 표현이 일본에서는 자주 사용된다. 일본에서의 리버럴 지식인이란 전전의 비정상적인 천황제 파시즘을 극복하고 건강한 대의민주주의를 추구하고자 하는 ‘전후 민주주의자’와 1970년대 이후 고도성장시대에 등장한 젊은 세대의 ‘자유주의자’를 모두 의미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전후 일본에서 리버럴을 대표하는 인물은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 다케우치 요시미, 그 후배 세대가 와다 하루키나 오엔 겐자부로 그리고 우에노 치즈코와 같은 지식인일 것이다. 나리타 류이치는 ｢‘회한’이 유발하는 사상｣이라는 글에서 이들 리버테리언의 사상을 분석한 바 있다. 나리타는 전후 일본의 사상계를 검토하면서 ‘회한공동체’는 1977년에 마루야마 마사오가 제기한 개념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회한공동체는 패전 직후 일본의 지식인들이 직면했던 양가감정을 기반으로 형성된 공동체를 의미한다. 이들은 위안부 문제와 식민지배 책임을 묻고, 일본정부에 의한 법적 배상을 요구하는 피해자와 지원단체들의 주장에 대하여 그것은 한국의 강경한 반일 민족주의의 소산이라는 주장을 하는 식의 모순을 보인다.
  반일 민족주의를 언급하면서 위안부 책임문제를 제기하는 측을 비판하는 것은 와다 하루키나 우에노 치즈코 모두에게서 나타난다. 피해자를 비판하는 그들이 정작 은폐되어 있는 자신의 내면화된 일본민족주의를 성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라는 것이 이명원의 주장이다.

선민서 기자 minseo@korea.ac.kr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8 22:4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