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학과 박사과정 김재원

대학원생 K씨의 일일

대학원생 K씨의 어느 날을 소설적 형식에 담아보았다.

  K씨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알람보다 일찍 울린 문자 메시지 알림음에 잠을 깬다.
“9시까지 내방으로” 지도교수로부터 메시지를 받은 그는 부스스한 머리로 일어나 두 걸음이면 갈 수 있는 원룸 안 화장실로 향한다. 한 참 뒤에야 나오는 따뜻한 물로 대충 머리를 감고는 ‘나이’에 맞지 않는 청바지에 피케셔츠를 입고 운동화를 신는다. 그리고 한 손에는 언제 울릴지 모를 스마트폰을, 다른 한 손에는 복사카드를 들고 집을 나선다. 학교로 향하는 마을버스 안에서 그가 다니는 학교의 학부생들을 바라본다. 붉은 색 점퍼에 새겨진 “KOREA”라는 ‘영어’와 입을 벌린 호랑이는 언제 봐도 여간 낯설다. 학부를 타대에서 나온 K는 낯선 그들이 자신을 무시할까 언제나 두렵다. 문득 K는 ‘우리’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나는 어떤 ‘우리’에 속해 있을까를 한참 고민하다 ‘우리’ 학교 앞 정류장에서 내렸다.
  “학교 갔어? 난 오늘도 회식이야” K는 9시 만남을 마치고 도서관 앞에서 담배를 태우다 문자를 확인한다. 한참을 오늘 할 일에 대해서 생각하다, 뒤처지면 안 되겠단 생각에 잽싸게 담배를 비벼 끈다. 사실 K는 오늘 해야‘만’하는 일이 없다. 꼴에 그는 언제나 일을 찾아서 해야 하는 일종의 ‘프리랜서’다. 그럼에도 아침 알람보다 이른 호출은 그가 아직 이 공간에서 ‘인정’받고 있다는 신호다. 사실 그 ‘인정’은 스스로가 부여한 자위다. 어느 순간 K에게는 누군가의 잔심부름과 의미 없는 호출이 다른 대학원생과의 경쟁 속에서 승리했다는 우월감으로 변했다. 그러나 언제나 공허함은 하나 남은 은행계좌 잔고를 확인할 때 불현듯 밀려온다.
  통장 잔고에 비해 K의 ‘일상’은 늘 바쁘다. 수업준비를 해야 하고, 다음 날에도 있을 ‘9시 만남’을 준비해야 하고, 살아남기 위해 ‘글’을 써야 한다. 그 중에 통장을 채워 줄 그 어떤 것도 없다. 잔고는 항상 그의 ‘일상’과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채워준다. ‘일상’ 밖의 일들은 그에게 ‘연구노동자’라는 허울을 주지만 사실 그 일은 ‘연구’가 아닌 ‘보조’다. 매주 반복되는 ‘일상’ 밖 회의에서 K는 대체 그 회의에 자신이 왜 필요한지 알 길이 없다. 그 회의에서 K가 하는 일이라고는 자신의 업무량을 줄이는 것이다. K는 자신을 먹여 살리는 이 ‘일상’ 밖의 일이 돈 때문에 억지로 자존심을 판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K에게는 이 빌어먹을 노동이 ‘일상’의 밖에 있다고 생각한다.
  연구실로 돌아온 K는 책을 폈다. 자신도 머지않아 ‘누군가에게 읽힐 책을 쓸 수 있겠지’라는 ‘헛된’ 생각에 잠시나마 행복을 느낀다. 그리고 졸업 후에는 꼬박꼬박 월급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믿어본다. 하지만 곧 사치스런 행복을 뒤로하고 ‘9시 만남’과 ‘일상’ 밖의 일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 수업과 글쓰기는 언제나 뒤로 밀린다. 대학원생에게 행복은 언제나 사치스럽게만 느껴진다. 곧 K는 그 사치 속의 ‘위계질서’를 떠올린다. K에게 행복은 ‘을’이 아니라 ‘병’, 아니 ‘정’에만 들어갈 수 있다면 손끝에 닿을 것만 같다. ‘위계질서’에서의 해방은 곧 ‘잊혀짐’으로 돌아 올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K다. ‘정’에 끼기 위한 동료들과의 경쟁은 매 순간이 곤욕이지만 영원히 ‘우리’가 되지 못할 K에게는 언제나 넘어야 할 산이자 밟고 건너야 할 ‘다리’다.
  K는 늦은 저녁, 얼마 전 직장에서 대리로 승진한 친구 녀석과 술자리를 갖는다. K가 다니는 ‘우리’학교 학부 출신의 그 녀석은 K에게 학교 소식을 묻는다. K는 대답해 줄 수 있는 바가 없다. K는 또 다른 ‘우리’를 떠올리며 친구에게 어색한 듯 “어떻게 지내”냐 묻는다. 친구 녀석은 신나하며 회사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러다 이야기가 직장상사로까지 번지자 붉은 핏대를 세우며 욕지거리를 해댄다. K는 ‘부러움’을 감추고, 결국 그 녀석도 회사에서는 고작 노예에 불과다고 느끼며 자신의 공간에 대한 자위를 시작한다. 언제나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산다며 K를 부러워하던 그 녀석에게 “내일부터 나 다시 글을 써야겠어.”라며 툭, 읊조린다. “좋은 논문 써”라며 친구는 진정으로 응원을 보내며 헤어졌다.
  K는 논문을 쓴다는 것이 ‘노예됨’을 벗어나는 방법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일상’에서의 착취에 타협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자신의 글을 쓰는 것임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글을 쓰겠다는 다짐은 자위이면서도 자신에게도 행복이 있음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또 다음날, 어김없이 같은 시간 스마트폰에서 울리는 메시지 알림으로 K의 하루는 시작된다. 아침마다 K에게 도착하는 알림은 하루가 찾아왔음을 확인하는 공포의 알림이자 인정투쟁에서 승리했음을 확인하는 욕망의 알림이다. K의 알림과 그의 일상은 비단 K만의 것이 아니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9 06:2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