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전 손택, 이재원 역, 『타인의 고통』, 이후, 2004.

한영인 (인문학협동조합)


연민을 넘어서는 고통의 연대는 어떻게 가능한가.

민족이 “상상된 정치적 공동체”(an imagined political community)라는 베네딕트 엔더슨의 정의는 민족과 민족주의의 ‘허구성’을 뒷받침하는 예로 자주 활용되어 왔다. 하지만 이때의 ‘상상’은 현실적 토대를 갖지 않는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실제로는 접촉할 수 없는 여러 사람들이 그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능동적인 정신의 작용을 의미하는 것에 가깝다. 이때 ‘공감’(sympathy)은 그러한 ‘상상’의 요체가 된다. 엔더슨이 소설과 더불어 신문을 상상하기의 대표적인 기술적 수단으로 꼽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소설과 신문은 독자로 하여금 지리적, 시간적 동질성을 경험하게 해주며 이는 공동체를 향한 상상을 강화해준다.
  이렇게 ‘공감’은 근대인을 창출한 심리적 기제인 동시에 문명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윤리적 덕목이었다. 하지만 타인과 세계의 비참을 예전보다 훨씬 쉽게 접할 수 있는 요즘, 이 ‘공감’은 역설적으로 그 힘을 잃어가고 있는 듯하다.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은 정확히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현대의 삶이 지닌 주목할 만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전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끔찍한 참사들을(그 현장에서 멀리 벗어난 채 사진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지켜볼 수 있는 기회가 셀 수도 없이 많아졌다는 사실입니다. 잔혹한 행위를 보여주는 이미지들은 (중략) 이제는 뭔가 진부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여기서 수잔 손택은 전쟁 사진을 분석하면서 이 사진들이 타인의 고통을 그저 스펙터클화 하여 구경거리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사진을 객관적인 사실을 중립적으로 제시하는 미디어라는 환상이 가진 위험성을 지적한다. 그녀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다수의 유명한 전쟁 사진들은 연출된 것이며 작위적인 연출이 들어가지 않았을지라도 대개 제3세계의 학살과 전쟁, 기아의 장면에 주로 집중함으로써 이러한 야만적인 비극은 문명화 된 유럽이 아니라 미개하고 뒤떨어진 곳에 존재한다는 편견을 조장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문명적 편견과 동시에 그녀가 경계하는 것은 타인의 고통에 더없이 순수한 비탄을 잠시 바치고는 서둘러 그것을 잊고 아무렇지 않은 듯 자신의 일상에 몰두하는 행위에 내재한 비윤리성이다.
  손택은 전쟁과 학살의 참상을 담은 사진을 보고 기겁하듯 놀라며 동시에 인간이라는 존재에 환멸을 느끼는 사람은 도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인물이라고 힐난한다. “나이가 얼마나 됐든지 간에, 무릇 사람이라면 이럴 정도로 무지할 뿐만 아니라 세상만사를 망각할 만큼 순수하고 천박해질 수 있는 권리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손택에 따르면 타인의 고통에 대한 통각(痛覺)은 그 자체로 주체의 윤리를 보증해주지 않는다. 설사 그가 그 순간 그 고통에 깊이 공감하며 그 고통 받는 존재를 연민하는 순간에도 그렇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손택은 중요한 것은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두고 우리의 존재가 타인의 고통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진지하게 탐문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마음을 휘저어놓는 고통스런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 문제의 해결에 기여하지 못한다.
  공감과 상상력은 모두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게 만드는 중요한 자원이다. 하지만 각종 이미지들과 말들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타인의 고통스런 삶과 상황을 그저 진부한 일회용 가십으로 치부하고 넘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타인의 고통 앞에서 느끼는 우리의 연민과  충격을 넘어 진정으로 윤리적인 주체로 설 수 있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손택의 이 책은 이러한 물음을 우리에게 물으며 함께 고민해볼 것을 제안한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9 05:35: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