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와의 대화> 정여울, 『공부할 권리』, 민음사, 2016.

‘공부할 권리’를 되찾기 위한 길은, 당신 안에 있다.

  공부를 하고자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정작 공부 자체에 대해서, 그것을 해야 하는 이유 자체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을 지속하기 힘든 시절이다. 대학원생으로서 해야만 하는 일들, 주어지는 일들을 휩쓸리듯 해나가다 보면 애초에 스스로가 원하던 길에서 벗어나있기도 하다. 그러나 공부라는 긴 항해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공부란 무엇이며 그것을 왜 해야만 하는지를 잊지 않고 되묻는 시간도 필요할 것이다. 물론 그에 대한 답과 방향은 모두에게 다를 수 있지만, 그것을 저마다의 안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공부할 권리』의 저자 정여울 문학평론가는 ‘공부하는 것’도 일종의 권리라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 공부란, 공부할 권리란 무엇일까. 정여울 평론가로부터 그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여러 강의와 저술 활동으로 바쁜 일정을 고려해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됐다.

Q. 우선 이 책의 발간 경위를 여쭙고 싶습니다.
A. 공부가 의무가 아닌 권리가 되는 순간, 삶은 분명히 바뀐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사회 속의 일부가 되기 위해 공부는 의무로서 강요되지만, 사회화의 과정을 어느 정도 진행한 후에는 ‘개성화’가 중요해집니다. 즉 다른 사람 속에서 살아가는 것 못지않게 ‘나만의 정체성, 나만의 개성’을 만들어가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는데요. 바로 그 과정에서 공부가 의무가 아닌 ‘권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를 저답게 만들어준 공부의 내용들, 사회 속의 일분자가 아니라 ‘나’라는 한 개인으로서 독립할 수 있도록 도와준 공부의 과정들을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Q. ‘공부할 권리’라는 제목과 발상이 인상 깊습니다. 선생님께서 행하고 생각하시는 ‘공부’란, 그리고 ‘공부할 권리’란 무엇인가요.
A. 시험이나 자격증을 위한 공부는 누구나 ‘해야 한다’고 느끼지요. 반면 많은 사람들이 나의 마음을 치유하기 위한 공부, 내 마음의 콤플렉스나 트라우마를 진단하기 위한 공부를 해야 한다고 느끼지는 않아요. 그런데 그런 공부를 ‘권리’라고 생각하면 굉장히 즐겁게 할 수가 있어요. 저는 문학과 심리학을 연결시켜 보면서 재미있는 경험들을 많이 했습니다. 제가 매혹을 느끼는 대부분의 주인공들은 심각한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들이었거든요. 제게는 그들의 상처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상처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꺼내는 과정이 참 감동적이었어요. 『일리아스』의 헥토르와 아킬레스, 소포클레스 비극의 주인공 안티고네, 헤르만 헤세의 캐릭터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등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지요. 그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저는 제 내면의 상처를 치유해나가는 과정을 배웠습니다.
  책에도 썼듯, “저에게는 공부가 가장 소중한 마음챙김의 기술이었습니다. 자격증이나 점수를 따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문학과 철학과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미치게 좋았습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저를 일깨워준 인문학 공부의 소중함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저에게는 확장된 의미의 공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Q. 말씀을 듣다보니 이 책을 관통하는 중요한 키워드는 ‘트라우마’인 것 같습니다. 트라우마와 공부의 관계에 대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신다면.
A. 이 책의 숨은 주제는 바로 ‘트라우마’예요. 스트레스와 트라우마의 차이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스트레스는 시험에 대한 불안 같은 거죠. 시험이 끝나면 스트레스도 없어집니다. 외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조절 가능한 것이지요. 그런데 트라우마는 인생을 ‘그 이전과 그 이후’로 완전히 나누어버립니다. 예컨대 부모에게 지속적으로 학대를 당했다든지, 너무도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든지 하는 치명적인 고통은 트라우마일 수밖에 없습니다.
  트라우마는 삶을 불태우는 부정적인 에너지이지만, 그 트라우마로부터 회복하려는 의지와 열정이야말로 우리가 공부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최고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존경하는 작가들, 철학자들,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모두 이 트라우마로부터 스스로 해방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치명적인 상처와 싸우면서 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내적 성장을 멈추지 않는 것이 저는 바로 공부할 권리라고 생각합니다.

Q.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과정이란 결국 자기 자신을 잘 들여다보는 과정과 다름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자신에 대한 고민을 계속해나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A. ‘지금’ 고민하지 않으면, 나중에, 먼 훗날, 미처 돌보지 못한 나 자신의 상처가 아우성을 치게 되기 때문이에요. 현재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 나를 이루는 것들, 내 심리의 밑바닥을 이루고 있는 상처들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결국 먼 훗날 더 큰 트라우마로 커져버린 고통이 내 뒤통수를 치기 때문이지요. 지금 바로 내 상처에 귀 기울이는 연습을 하면, 더 빨리, 더 지혜롭게, 내 삶의 문제를 진단하고 치유할 수 있는 길을 내 안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Q. 책을 통해 위안부나 세월호 문제를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나 자신’을 말하는 동시에 ‘연대’를 말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는지 설명해주십시오.
A. 나를 찾아간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는 않습니다. 평생 ‘나다움’을 찾아가는 과정이 인문학이지만, 그것을 중도에 포기하기 쉬운 이유는 나다움을 찾기 위해 결국 ‘타인의 삶’에 무한한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는 데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삶과 내가 어떻게 연관되었는지를 찾는 것이 진정한 나 자신의 발견 과정이에요. 타인의 아픔이 나의 아픔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타인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공부의 핵심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Q. 요즘은 어떤 공부를 하고 계시고, 또 이후에는 어떤 공부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요.
A. 저는 목표를 지나치게 거창하게 잡지 않고, 지금 내 삶에서 소중한 것들, 내가 지금 궁금해하는 주제들을 그때그때 찾아서 읽고 쓰는 자유로운 공부 방식을 좋아합니다. 그러다보니 문학, 철학, 심리학, 때로는 인지과학이나 언어학까지 확장되는 공부를 저절로 하게 되더라고요. 낮에는 인문학 강연이나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 준비 등을 위한 ‘사회적인 독서’를 하고, 밤에는 정말 나를 위한 공부, 특히 심리학이나 문학에 관련된 공부에 집중하려고 노력합니다.
  요즘에는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책을 준비하고 있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지적 자산이 바로 우리말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통해서 제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우리말 독본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후에는 헤르만 헤세 연구, 제가 좋아하는 인물의 삶을 그린 평전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Q. 마지막으로 이 인터뷰의 주요 독자인 대학원생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제가 가장 가난했지만, 가장 ‘순수한 자아’를 가지고 있었던 시절이 바로 대학원 시절이었어요. 다음 학기 등록금을 낼 수 있을지 늘 걱정이었고, 정말 사고 싶은 책이 있는데 너무 비싸서 못 산 적도 있지요. 그런데 그 시절에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이걸 내가 가장 원하고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어요. ‘누가 뭐래도 난 이 길이 가장 좋아’라고 믿는 아주 천진무구한 나 자신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공부의 길을 걸어올 수 있었습니다. 대학원생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는 사회 분위기가 안타깝지만, 여러분 자신이 정말 이 길을 사랑하고 열렬히 원한다면, ‘또 다른 길’은 분명히 열릴 겁니다. 그 자기만의 길을 찾는데 여러분에게 ‘공부할 권리’라는 화두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 인터뷰·정리: 최은혜 기자 sinedoque@naver.com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9 02:22: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