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성 신화의 파탄과 가부장제의 실패

  김이설의 소설은 지인들에게 선뜻 추천하기 어렵다. 오랫동안 해소되지 않을 답답한 독서경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2006년의 등단작 「열세 살」과 「엄마들」을 기억하는 독자라면 누구도 그러한 느낌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지하철역에서 몸을 팔고 구걸하며 연명하는 노숙자 모녀와,(「열세 살」) 아버지의 사망으로 큰 빚을 지고 휴학계를 제출한 후 대리모가 된 여대생의(「엄마들」) 이야기를 목격하는 일에 취미를 두고도 마음의 평안을 누리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디에서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김이설의 작품세계에 대해서 평론가 김형중은 “자연주의의 귀환”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유토피아 모텔에서 뒤돌아서다」, 『문학과 사회』, 2010년 여름호.) 세계관의 역사에서 자연주의는 유신론이 이신론을 거치면서 혹은 이상주의가 퇴폐주의를 거치면서 나타난다. 자연주의적 텍스트는 ‘거기에는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희망 없음’이 아니라 ‘거기’를 지탱하는 신화이다. 김이설의 소설은 가부장제와 부성의 신화를 부정하는데 그 강도가 매우 강해서 부자간에 친밀함이 없고 부부간에 존중함이 없는 수준보다 한참을 더 나아간다. 아버지가 자녀를 때리는 일은 다반사이며, 남편이 아내를 “발톱의 때만큼도 안 되는 것”으로 여기고,(「한파 특보」, 149쪽)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한다.(「흉몽」) 첫 번째 작품집의 제목을 빌려서 표현하자면 김이설은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을 말하고야 마는 작가다.
  공채 시즌에 기업에 제출되는 숱한 자기소개서들에는 자상한 아버지로부터 근면과 성실을 익혔다는 상투적 문장이 첫 문단에 등장한다. 그렇지 않은 모습은 감춰지며 기껏해야 약간의 고집과 무심함 정도만 드러난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아버지가 보호자이기는커녕 가장 위협적인 대상일 수도 있다. 「미끼」의 아버지는 욕설을 일삼는 것은 물론이고 여자를 감금하고 강간하며 아들에게 자신의 기분에 따라 폭행을 가한다.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세상사는 법을 배운다. 아버지가 강간했던 여자를 강간하며 자란 아들은 스물여섯 살이 되어서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아버지까지 짓밟고 감금한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약육강식의 인생관을 주입하면 아들 역시 아주 특별한 변화의 계기가 없는 한 타자를 뭉개버리는 삶을 살게 되는데, 가부장제는 이러한 악화를 끊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강화하는데 기여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가족을 부양해 내는 부성의 신화에 사로잡힌 채 비판적 성찰 없이 오랜 세월이 흘러 버리면 가정폭력의 주범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아버지로서 합당한 삶을 살았노라고 착각할 수도 있다. 「한파특보」에서 환갑이 넘은 것으로 보이는 아버지는 자녀들 앞에서 자신을 종종 황량한 남극에서 새끼들을 품는 황제펭귄과 동일시한다. 건설회사에 다니며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갖췄던 그는 아내와 자녀들을 폭행했다. 자녀들에게 생존할 능력을 기르라고 윽박지른 결과 아들은 스펙을 채웠으나 아버지와의 관계를 단절했다. 딸이 교제하던 가난한 남자에 대해서는 “식구 배곯게 할 놈이 무슨 가장이 되겠”냐며(146쪽) 어깃장을 놓았는데, 그로 인해 이제 마흔 살이 된 딸은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남자를 기대할 수 없으므로 소개팅도 하지 않게 된다. 그나마 과거에 직장이 있었으니 저 정도라고 해야 할까? 「흉몽」에서 “나”의 남편이자 일곱 살 아이를 둔 아버지는 공장에서 인원감축으로 인해 해고당하고 사업도 실패하면서 신용불량자로 전락하자 종국에 현금이 가득 든 가방을 훔치고 달아나다가 미쳐버리고 만다.
  가부장제를 기반으로 한 사회에서 한 가족과 다른 가족은 서로 배타적 관계로 구성된다. 이때 자기 가족은 깨끗하며 아무 문제도 없다는 환상을 억지로 수호함으로써 사회에서 다른 가족보다 우월한 자기 가족의 상징적 가치에 집착할 때 그것에 반하는 폭력은 은폐된다. 「부고」의 여성화자인 “나”는 열일곱 살 때 이복오빠에게 강간 당했으나 초등학교 교사인 아버지는 이를 고발하지 않았다. 「비밀들」에서 서른다섯 살 여성인 “나”의 남편은 술장사를 했지만, “나”는 사람들에게 남편이 평범한 무역회사원이라고 속이고 살았다. “나”의 이혼이 기정사실화된 시점에서도 어머니는 딸인 “나”에게 “끝까지 아무 말 하지 마. 이혼이고 나발이고, 아무 말도 하지 말어. 아버지 얘기도 그렇고. 그냥 모른 척해. 네 언니한테도 입 다물고. 나도 그럴 거”라며(231쪽) 진실을 감추는 생존술을 가르친다.
  가장 안전한 공간이어야 할 가정과 그것을 구성하는 가부장제가 실은 불행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노라고 김이설의 소설은 선언한다. 그로 인해 떠오르는 것은 제도적 결속 이전에 사람과 사람의 사이는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이다. 신화를 단호하게 부정할 수 있는 자만이 신화를 넘어 그 신화를 가능하게 했던 신적인 것과 만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만을 알 뿐 그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지 모른다. 김이설의 소설은 결국 가부장제와 부성의 신화가 유발하는 죄책감과 부담감에 얽매이지 않고도 타자를 위할 수 있는 신적인 사랑을 갈망하게 만든다. 이것이 그토록 불편한 김이설 소설의 미덕이라면 미덕이겠지만 이러한 미덕을 찾는 일은 고통 가운데 있는 그 인물들을 대하는 윤리가 아닐 것이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8 23:14: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