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추함을 잊은 사회

최승현
춘천교육대학교 강사


  “비정규직 노조는 2008년 10월 말 처음 만들어졌는데 그때 가입했어요. 2008년 회사 분위기는 뒤숭숭했어요. 임원급 총괄 본부장이 ‘너희 업체는 빼지 않겠다. 걱정하지 마라.’ 약속을 했는데 그 약속을 어기고 우리 라인이 빠진 거예요. 우리가 하던 일을 정규직들이 치고 들어온 거죠. 너무 화가 나서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이 들었어요.”(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유제선과의 2013년 인터뷰, 『그의 슬픔과 기쁨』 196쪽)

쌍용자동차에서 해고된 사람들은 지극히 평범하다. 그들은 사실 ‘노동’이 뭔지 몰랐다고 고백하거나 ‘32평짜리 집을 마련한 게 제 인생의 가장 큰 자랑거리’라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그러나 해고를 겪고 나서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 마음의 밑바닥을 보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유제선도 ‘개인적으로 여자 꼬시는 것 말고는 제대로 말해 본 적도 없’는 사람이지만 어쩌다보니 노조 일에 참여하게 되었다.

  정규직 교수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지원서를 냈다. 이런 저런 임용 조건이 맞아 떨어지는 터라 내심 기대가 컸다. 놀랍게도 인사처 직원으로부터 연락이 왔고 2차 심사로 공개강의를 준비하라고 한다. 파워포인트로 강의내용을 수 십 차례 고치고 아내 앞에서 마지막 연습을  한 후 강의도 무사히 치러냈다. 어쩐지 ‘정규직’이 될 것 만 같은 예감. 마침내 총장 최종 면접을 준비하라는 전화를 받았다. 정장을 맞추고 먼지가 내려앉은 구두를 맡겼다. 모집 학과와 동일한 전공을 가르치는 후배 강사를 만났다. 그러나 며칠 뒤 인사처 직원으로부터 놀라운 전화가 왔다. 정규직에서 2년 단기 계약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해당 학과 관련 경력이 부족하다는 황당한 이유였다. 당황하여 “왜 정규직으로 공고한 것이냐”고 따졌지만 이전 말만을 되풀이할 따름이다. ‘난 쓰고 버리는 물건이 되고 싶지 않다….’ 바뀐 임용조건을 앞에 두고 복잡한 셈법을 하기 전 느낀 건 모멸감이었다. 그리고 학교의 입장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했다. 학과 교수들은 그대로 가자고 했지만 총장이 반대해서 그런 걸 거야, 전에 뽑았던 사람이 안 좋은 선례를 남겨서 우선 2년짜리로 해보자는 것일 수 있어, 정말 해당 학과 경력이 심각하게 우려되었나 보다….

  우리는 흔히 ‘자신의 가치에 비해 턱없이 낮은 대우’를 감내해야 할 때 모멸감을 느낀다. 구체적으로는 동등한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할 때, 권력관계 상 하위에 놓일 때 등이 그렇다. 유제선과 내가 느낀 모멸감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정규직과 동등한 인간이 아니며, 회사나 대학의 힘에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제선은 고민하는 나에게 ‘네가 겪은 건 모멸감이야’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그에게 건넬 말이 없을까, 이리저리 헤매다 조지 오웰의 에세이를 펴든다. 영국출신의 오웰은 식민지 인도의 제국경찰로 생활하며 어느 날 아침 사형집행을 목격하고 다음과 같이 썼다. “이상한 일이지만, 바로 그 순간까지 나는 건강하고 의식 있는 사람의 목숨을 끊어버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죄수가 웅덩이를 피하느라 몸을 비키는 것을 보는 순간, 한창 물이 오른 생명의 숨 줄을 뚝 끊어버리는 일의 불가사의함을, 말할 수 없는 부당함을 알아본 것이었다. 그는 죽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 그와 우리는 세상을 함께 걷고, 보고, 듣고, 느끼고, 이해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2분 뒤면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 중 하나가 죽어 없어질 터였다. 그리하여 사람 하나가 사라질 것이고, 세상은 그만큼 누추해질 것이었다.”(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26쪽) 유제선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시간강사들의 사회적 숨 줄이 끊기고 있다. 사람이 사라졌지만 아무도 누추함을 느끼지 못한다. 나를 위로해 준 유제선에게 건네고 싶다. “고민하지 말아요. 당신이 옳아요.”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9 16:5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