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진전을 위한, ‘민(民)’과 ‘민의(民意)’에 대한 정치철학적 접근


  ‘민심’이나 ‘민의’라는 말은 여야를 막론한 정치인들과 정치평론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말이다. 정치인들은 경쟁 정치인이나 경쟁 정당을 비판하는 가운데 “민심을 외면한다”와 같은 표현을 흔히 사용한다. 또한 정치평론가들이 선거가 결과를 평가할 때에는 “민심을 반영했다” 혹은 “민심을 반영하지 못했다”와 같은 표현을 흔히 들을 수 있다. 민심 혹은 민의는 제도적 정치기구에 반영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민심’ 혹은 ‘민의’란 도대체 무엇인가?

  사전적으로 ‘민심’과 ‘민의’는 각각 “백성의 마음”과 “국민의 뜻”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정치철학적 측면에서 ‘민의’는 매우 복합적인 문제들과 연결되어 있다. 즉 사전적 정의에서 ‘백성’과 ‘국민’으로 풀이된 ‘민’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에서부터 ‘인민(people)의 의지’에 대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정치체의 구성에 대한 다양한 문제들이 연루된 말이 바로 ‘민의’인 것이다.

  『진보평론』 제68호(2016년 여름호)는 특집 ‘민의와 ‘民’의 정치’에서 바로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편집자는 이 특집에 대해 “민의 정치로서 민주주의를 온전히 실현하기 위한, 따라서 이 사회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이며, 정치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반드시 물어야 할 가장 본질적인 질문”이라고 말한다(7쪽). 이번 특집을 구성하는 글은 모두 여섯 편이다.


사후적·허구적 개념으로서의 민의와 민주주의
  김상운의 ｢정치와 민심, 민생｣은 근대정치철학, 특히 홉스와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기초하여, 선거를 통해 드러난 민심 혹은 민의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상운은 민심, 민의, 민생과 같은 말이 사실상 모호하고 부유하는 기표, 심지어는 ‘특권적 기표’로 사용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제도화된 민주주의에서는 주권이 민의에 의해 뒷받침된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동시에, 주권은 자신의 기반이라고 상정된 민의와 끊임없이 괴리된다. 김상운은 이러한 문제에 답하기 위해 홉스와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검토한다.

  이에 따르면 근대정치철학, 특히 근대적 사회계약론은 ‘민’의 구성에 모종의 의지가 작용한다고 보고, 의지를 주권으로까지 실체화했다. 물론 홉스와 로크는 ‘민의’가 사후적 구성물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선거는 민심의 표출이나 반영이라고 간단하게 볼 수는 없다”는 것이 김상운의 견해이다(39쪽). 그는 민주주의를 하나의 운동으로 보면서, 선거 외의 사회운동이 없는 사회에서는 민주주의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홍철기는 ｢민의라는 허구｣에서 민의를 현대 민주주의가 처한 상황에 적합한 방식으로 재정의하기 위한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이는 시민성 자체를 민영화 혹은 사유화하는 신자유주의라는 ‘반-정치적 정치체제’에 맞서서 정치적 행위와 공적 의사소통 공간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홍철기는 민의가 하나의 허구 혹은 재현으로서 재정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미국의 역사학자 에드먼드 모건의 논의를 바탕으로, 민의와 민이 하나의 인격체와 같이 의사(opinion) 또는 의지(will)를 갖는다는 관념이 허구적이라는 것을 밝힌다.

  하지만 이러한 허구는 “정치의 진정한 가능성을 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의의 대변자와 민의의 주체인 인민 자신 사이에 놓인 결코 제거될 수 없는 하나의 간극, 혹은 다수의 간극들을 통해서 정치적 논쟁의 공간을 열어놓게 된다”는 점에서(52쪽), 허구로서 민의를 재정의 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의 대안이다. 이러한 논의에 근거하여, 홍철기는 ‘대표’를 대리활동의 행위자로 간주할 것이 아니라, 타인을 대신하여 타인을 옹호하는 활동으로 재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현대 민주주의에 필요한 정치적 대변자는 소수자를 대변해야 한다고 하면서, 소수자가 말하고 있는 것들을 공적 언어로 번역하는 매개자가 되어야 한다고 결론 내린다.


제도도 이념도 아닌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론

  양창렬의 ｢자크 랑시에르: 제도도 이념도 아닌 민주주의론｣은 주로 랑시에르의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2005)에 집중하여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론을 검토하고 있다. 랑시에르에게 민주주의는 “아무런 자격(몫)도 없는 민중이 권력을 요구하는 실천 과정 자체”이다(60쪽). 이러한 랑시에르의 민주주의 개념에 따르면, 민주주의적 사회에서 ‘불화’가 표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 민주주의는 자연적 질서에 반(反)하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 아니라, 바로 자연적 질서에 반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며 ‘민주주의’인 것이다. 왜냐하면 기실 자연 속에 존재하는 것은 평등이 아니라 차이이고, 평등은 모든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획득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랑시에르에게 민주주의는 ‘아무나’에 의한 통치로 여겨진다.

  양창렬이 중요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은, 랑시에르가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정치제도가 아니며 어떤 지향해야 할 이념도 아니라는 점이다. 먼저, 랑시에르의 민주주의가 제도가 아닌 이유는, 민주주의 자체의 원리상 그것은 제도가 아니며 제도화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의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지배-피지배의 일치라는 민주주의 정의 자체로부터 벗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랑시에르에게 민주주의는 “말할 수 없는 민중이 말하기 시작한다는 사건”이라는 점에서(69쪽), 그것은 결코 제도화될 수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의 민주주의가 이념이 아닌 이유는, 그것이 배제된 “타자의 불평과 항의, 이의제기에 의해 끊임없이 갱신되는 운동의 다른 이름이며,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항상 도래할 것”이기 때문이다(74쪽). 양창렬은 이러한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론을 바탕으로 민주주의가 무엇보다 실천적 행위임을 강조한다.

  한편, 이 글의 보론으로 2016년 2월에 있었던 랑시에르 인터뷰가 실려 있는데, 여기에서 랑시에르는 최근 프랑스 사회의 문제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랑시에르는 IS 문제와 관련하여 동일성주의로 향하는 경향에 반대하여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슬람과의 전쟁’을 비판하고 있다. 이는 오히려 증오에 찬 사람들을 길러낸다는 것이다. 또한, 프랑스에서 현실적 문제로 등장한 IS 문제 등에 대해, 랑시에르는 프랑스 인구의 일부가 잠재적으로 반체적인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종교 전쟁’ 담론에서 즉각적으로 벗어날 것을 주문하면서, 동일성을 주문함으로써 증오를 양산하는 ‘공화주의적’ 담론을 비판한다. 인터뷰 가운데에 제기된 ‘인민의 구성’ 문제에 대하여, 랑시에르는 인민이 모두에게 열려 있는 ‘평등주의적 상징화’를 필요로 하며, ‘몫 없는 자’들이 포함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고 답한다. 또한 인민은 스스로를 국지적으로 구성하기도 한다고 하는데, 최근 있었던 스페인, 터키의 저항이 그러한 사례라고 한다.


루소와 인민의 의지, 루소에 대한 현대적 해석들

  민과 민의에 대한 정치철학적 논의에서 빠질 수 없는 사상가는 바로 루소일 것이다. 루소의 정치철학적 저작들 가운데에서도 특히 󰡔사회계약론󰡕(1762)은 인민의 ‘일반의지’라는 개념을 핵심 요소로 도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체와 인민, 인민의 의지에 대한 문제를 다룰 때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게 된다. 󰡔진보평론󰡕의 이번 특집에도 루소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글이 두 편 실렸다.

  두 편의 글 가운데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1988년에 진행된 알랭 바디우 인터뷰를 번역한 글이다. ｢1712-1778: 장 자크 루소 혹은 고독한 사상가의 예견—장 자크 루소의 사유의 정치적 관건—｣이라는 이 글은, 바디우의 󰡔존재와 사건󰡕(1988)의 ‘사건’ 개념은 물론 최근 제기하고 있는 ‘공산주의의 이념’이라는 문제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특히 흥미롭다.

  바디우는 정치라는 범주보다 더 일반적인 주체성의 범주에서 출발하여 루소에게 접근할 수 있다고 말한다. 주체 문제에 루소가 선구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루소가 제기한 질문은 바로 “어떤 정치적 주체가 있는가, 그 기원 및 구성은 어떤 것인가?”하는 물음이었다(115쪽). 바디우에 따르면 루소의 키워드는 ‘사회계약’과 ‘일반의지’이다. 바디우는 루소에게는 정치가 일반적으로 하나의 ‘사건’을 전제하는 것이었다고 보면서, 사회계약을 ‘일어나고 있는 어떤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는 동시에 사회계약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바디우가 보기에 루소는 계약이라는 문제와 함께 정치의 정초적 사건들을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이는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고유한 시간을 창조하는 사건들을 말한다. 이러한 사건은 “시간 속에 있으면서도 시간의 비시간성을 표현하는 것”이다(117쪽). 그리고 바로 이러한 사건으로서의 계약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 바로 ‘일반의지’이다. 이러한 계약은 인간들의 삶을 어떤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이행시키는 순간이다. 바디우는 진정한 사건 안에는 루소의 사회계약에서 발견되는 구조가 있다고 보는데, 그것은 바로 사건이 언제나 “자기 자신에 있어서 자신의 고유한 흔적이며, 자기 자신에 있어서 자신의 고유한 다양체”라는 것이다(117-118쪽). 루소에 대한 바디우의 이러한 독해는 ‘사건’에 대한 바디우의 강조라는 맥락 속에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루소를 다루고 있는 나머지 한 편의 글은 사토 쥰지의 ｢루소의 ‘일반의지’ 개념을 찾아서｣로, 2012년 발표한 글을 번역한 것이다. 이 글에서 사토 쥰지는 루소의 ‘일반의지’ 개념에 대한 아렌트의 비판과 이에 대한 응답으로서 최근 등장한 연구들을 보여주고 있다. 사토 쥰지는 아렌트의 비판이 일면 타당한 면이 있지만, “아렌트는 루소의 일반의지에 경제적 이해 혹은 빈민의 원한만을 보고 있다”고 지적하면서(97쪽), 일반의지 개념이 그보다 훨씬 더 심도 있다고 주장한다. 사토 쥰지는 루소의 일반의지 개념에 대한 해석들을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주어져 있는 일반의지로서 전체와 개별 사이의 신비주의적 일치라고 보는 견해, 개념화된 일반의지로서 공동주관성의 일종이라고 보는 견해, 이익 및 이해관심과 결부된 일반의지로서 과학을 모델로 하여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는 것이다.

  사토 쥰지는 이들 견해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세 번째 유형의 해석을 보충하는 차원에서 브루노 베르나르디의 논의에 근거한 ‘화학합성의 은유’를 유력한 개념화 방법으로 검토한다. 즉 공동체의 각 주체는 “원소로서의 개체성을 남기면서도 공동체 전체와 자기-관계를 맺음으로써 그 어떤 요소의 것도 아닌 성질을 현실화”하는데(106쪽), 바로 여기에서 공동체 전체와 맺은 ‘자기 관계’가 일반의지 개념이며, 이것의 표현이 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독해에 따르면 루소가 말하는 바의 정치 공간은 역동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원래의 󰡔사회계약론󰡕과 그에 대한 대부분의 독해는 어떤 가능성에 대한 ‘억압’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사회계약을 위한 지평에서 배제된 것이야 말로 오늘날 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것일 수 있다는 점에서, 루소의 텍스트는 탈구축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사토 쥰지의 결론이다.

  ｢포데모스 혹은 좌파포퓰리즘에 대한 두 개의 시선｣은 샹탈 무페 인터뷰와 히로세 준의 글을 함께 묶은 글이다. 샹탈 무페는 ‘좌파 포퓰리즘과 민주주의 되찾기’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인터뷰에서, 좌파적 기획을 통해 민주주의의 급진화를 추구할 수 있다고 하면서 포데모스를 비롯한 ‘좌파 포퓰리즘’이 모종의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그녀는 좌파적 기획은 다원민주주의나 자유민주주의를 끝장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급진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본다. 이를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며, 사민주의적 제도들을 방어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요해지는 것은 “인민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하는 문제이다(133쪽). 여기에 상당한 시사점을 주는 것이 스페인의 포데모스나 남미의 좌파 정권이다. 무페에 따르면 이는 ‘포퓰리즘적 전회’를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날 요청되는 것은 바로 “민주주의를 급진화할 수 있는 좌파 포퓰리즘”이라는 것이 무페의 견해이다(134쪽).

  히로세 준의 글 ｢현대 스페인의 볼셰비키: 분노한 자들과 포데모스｣는 포데모스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시도하는 글이다. 히로세 준은 포데모스가 “레닌주의의 현대에서의 실천이며, 레닌이 생각한 ‘당’ 자체”와 같다고 평가한다(138쪽). 히로세 준에 따르면 포데모스는 한편으로는 어느 누구도 타인을 대표 혹은 대변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에서 국가 권력에 대한 탈취 없이 진정한 사회변혁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작업, 즉 대표 불가능한 것을 정치에 도입하여 권력을 탈취하려는 작업을 수행하기 위한 장치가 포데모스라면, 이것은 레닌주의적 당, 볼셰비키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포데모스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무페와는 사뭇 다른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 11월 열린 ‘민중총궐기’에 참석했다가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위독한 상태에 있었던 백남기 농민이 지난 9월 25일 사망했다. ‘민’에 의해 구성되고 ‘민의’를 반영해서 운영된다고 여겨지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일이다. 민주주의의 문제는 말 그대로 실질적 문제임이 분명해 보인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인민’과 ‘인민의 의지’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 적실성을 갖는 이유이다.

■ 곽태진 기자 karajan86@naver.com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10 03: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