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은 어디에
- 바르가스 요사, 『천국은 다른 곳에』

한영인 문학평론가


인간은 자신의 불완전함으로 말미암아 그 내부에 유토피아를 향한 강력한 충동을 지니게 된다. 주지하듯 정치와 예술은 인간 내부에 자리 잡은 유토피아적 열정이 분출되는 주요한 장(場)이었다. 유토피아가 “현상을 유지시키는 방향으로 일체의 행동을 유도하는 사상의 복합체로서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맞서 혁명적인 방향으로 행동을 이끄는 대립적 사상의 복합체”(임철규)라면, 억압받는 자의 시선에서 출발해 일체의 착취와 폭력이 사라진 세계를 희구하는 정치적 혁명은 인간이 지닌 유토피아적 충동을 지지하는 강력한 근거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예술은 이와 미묘하게 다르다. 예술의 유토피아는 정치적 실천과 대개 무관하며 심지어 가장 올바른 혁명적 실천과도 불화할 여지를 남겨놓기 때문이다. 바르가스 요사는 『천국은 다른 곳에』에서 정치와 예술에 투신한 두 인물의 삶을 통해 유토피아를 향한 인간의 서로 다른 충동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바르가스 요사는 화가 폴 고갱의 삶과 그의 외할머니인 플로라 트리스탄의 삶을 교차시키며 서사의 그물을 짜내려간다. 소설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어느 정도 알려진) 고갱의 삶보다는 그의 외할머니 플로라 트리스탄의 생애다. 그녀의 삶에 대한 소개가 전무하다시피 한 한국에서 이 소설은 여성해방과 노동해방을 동시적 과제로 삼고 이를 위해 프랑스 방방곡곡을 떠돈 여성혁명가의 삶을 들여다보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공산당 선언」을 통해 ‘공상적 사회주의’로 낙인찍혔던 생시몽주의와 푸리에주의를 비롯한 초기 사회주의 운동의 양상과 그 한계에 대한 지식은 덤이다. 그러나 소설 속 플로라는 혁명에 귀의한 철의 여전사라기보다는 미지의 세계를 개척해가는 고독하지만 씩씩한 방랑자에 가깝다. 프랑스와 페루를 오가며 펼쳐지는 다채로운 이야기들은 그녀를 이제껏 소설이 창조해냈던 그 어떤 여성 캐릭터보다 더 매력적으로 만드는데 이건 전적으로 바르가스 요사의 뛰어난 문학적 재능에 힘입은 것이다.

  플로라의 정치적 열정과 빈번하게 불화하는 것은 비단 억압받는 사람들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믿지 못하는 부르주아 사회주의자들만이 아니다. 소설에서 ‘섹스’는 플로라가 끝내 화해하지 못하는 트라우마적 대상으로 존재한다. 그녀는 섹스를 “정치문화랄지 사회정서랄지 하는 문제 이전에, 여성을 착취하고 지배하기 위한 원초적 도구들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라 여기며 “성생활과 육체의 쾌락을 미래 사회의 목표로 주장하는 이론”에 강한 반감을 품는다. 이는 그녀의 불행한 결혼 생활 탓으로 그려지지만 텍스트의 한 축을 이루는 고갱의 태도와 대비해볼 때 섹스를 향한 그녀의 반감이 지니는 의미를 추출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녀의 정치적 혁명에는 관능, 즉 에로티시즘이 강박적으로 소거되어 있는 것이다.

  반면 위선적인 유럽 문명에 염증을 느끼면서 야성의 회복을 염원한 고갱에게 섹스는 인간이 되찾아야 할 ‘원시적 열정’의 매개에 다름 아니다. 고갱은 증권중개인 자리를 걷어차고 예술에 투신하면서부터 “섹스에 완전히 사로잡히”게 되는데 그에게 있어 “섹스는 쾌락의 원천이기도 했지만, 케케묵은 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자유를 추구하게 만들어 준 구실이기도 했다.” 고갱에게 있어 섹스는 “정신적인 타락을 표현하는 세련된 양식의 일종”이 아니라 “힘과 건강의 원천”이며 “좀더 나은 작품과 좀더 나은 삶을 위한 의욕과 용기와 의지를 되살려주”는 마법적 행위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이는 신체와 정신을 갉아먹는, 매독이라는 치명적인 댓가를 치러야만 하는 것이었다.

“한 마리 촌충처럼 어느 날 문득 찾아와 게걸스럽게 속을 파먹는 뒤늦은 예술에 대한 열정과 가족에 대한 책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남자” 고갱은 마침내 가족을 버리고 타히티로 떠나  철저한 고립 속에서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추구하며 살아간다.(아니 죽어간다는 표현이 더 옳겠다.) 우리는 고갱이 범한 범죄에 가까운 일탈을 여지없이 비난할 수 있으며 그의 그림에 그림자를 진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은 식민주의의 혐의를 고발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인간의 내부에 자리한 이토록 강력한 충동이 전해지는 순간, 우리도 모르게 잠시 숨을 고르지 않을 수 없다.

플로라가 떠돌던 프랑스도, 고갱이 찾아들었던 타히티도 ‘우리들의 천국’은 아니었다. 어쩌면 천국은 영원히 다른 곳에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걸 찾아나서야 하는 고단한 인간의 운명을 어렴풋하게나 감지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이 각별하게 와 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9 20:35: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