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부재하는 국가와 ‘신자유주의’의 아노미(Anomie)
: 조르조 아감벤, 김항 옮김,『예외상태』, 새물결, 2009.

허 민 (문화연구자)

2016년 9월 12일, 경북 경주에서 관측 이래 최대 규모의 지진이 발생했다. 진동이 전국적으로 감지되었으며, 통신이 일시적으로 마비되기도 했다. 정부의 늑장 대응은 여전했다. 지진 발생 3시간여가 경과한 뒤에야 공식입장을 발표했고, 국민안전처는 문자하나 보내는데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비상대응체계 자체가 작동하지 않았고, 어떠한 대책회의도 없었다. 대통령은 지진 발생 다음날 지진방지 대책의 전면 재검토를 지시할 뿐이었다. 정부가 피해규모를 과소-계산하는 동안, 시민들은 재난 앞에 방치된 자신들의 생명(권)을 마주했다. 생명권은 헌법에 규정된 모든 기본권의 전제로 기능하는 기본권 중의 기본권이다. 계산될 수 없는 버려진 목숨 앞에서 국가 부재의 한국적 상례가 그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조르조 아감벤은 저서 『예외상태』에서, ‘예외상태’를 ‘법적 공백’의 공간으로 규정한 바 있다. 이때 ‘법적 공백’이란 무정부적인 혼돈의 상태라기보다는 법적 질서가 만료되었음에도, 그를 관철시켰던 집행적인 힘은 여전히 작동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한편으로 규범이 효력을 갖지만 적용되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 법률적 가치를 갖지 않는 결의가 법률의 힘을 획득하는 하나의 법률 상태”(79쪽)인 것이다. 법률 없는 법률의 힘이기에 ‘법률-의-힘’이라 표기할 수 있는 아노미적 공간이 바로 ‘예외상태’이다. 따라서 이 역설적이면서도 위상학적인 공간은 특정한 상황을 ‘호명’하는 이론적인 준거로 적용될 수 없으며, 오히려 바로 그러한 상황(들)의 유래를 지시하기 위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법과 생명, 주권과 권력, 독재와 민주주의를 근원으로부터 사유하기 위해 아감벤은 개념화 될 수 없는 개념을 이론적으로 묶어 두고 있는 것이다.

최근의 재난 정국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국가(와 국민)의 법적 위상을 재고케 한다는 의미에서 ‘예외상태’의 자본주의적 근원을 노출시키는 것만 같다. 사실 근대적 의미에서의 재난상황은 아감벤이 말하는 ‘예외상태’와는 법리적으로 정반대의 상황상태를 지시한다. 재난은 국민의 자기 생명권이 비약적으로 확장되는 순간이며, 그에 대한 국가의 보장이 가장 극적으로 요구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재난 앞에서 법적 질서는 유예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생명과 안전에 관한 법률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된다. 하지만 한국의 재난 상황은 시민들의 생명을 국가-정부-법이 방기함으로써, 그 공백의 자리를 노출시켰다. 대지를 흔든 재난 앞에서 국가는 부재했으며 법이 그 유효성을 상실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의 국가-정부-법의 공백이란 (‘예외상태’와 마찬가지로) 결코 ‘텅 빈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외려 생명에 관한 권리를 ‘대리’하는 또 다른 ‘집행적 힘-권력’이 작동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국가와 정부를 대리하는 ‘다른 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물론 자본이다.

지난 세월호 참사 때, 청와대는 ‘재난의 컨트롤 타워’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 이는 한편으로는 국민의 생명에 대한 국가의 법적 보장을 보류하겠다는 공표에 다름 아니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그러한 국가의 기능을 민간자본에 위임하고 있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지시하는 선언이었다. 국가 책임의 방기를 합리화할 수 있는 명분은 시장의 계산에서 가능하다. 사고예방이나 안전대책을 위한 ‘일상적 지출’이 사고 수습에 드는 ‘비용’을 상회할 때, ‘투자’의 이유는 사라진다. 이미 최대 규모의 지진을 경험한 시민들은 국가에 대한 기대를 이어가기 보다는 민간 보험사의 지진특약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경주 지진 이후, 풍수해보험 판매를 일시적으로 중단했던 보험사들에 대한 시민들의 항의가 수없이 기사화되었다. 자기 생명에 관한 법적 권리를 스스로가 만료하고, 민간 자본에 의탁해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를 최소화한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아노미’, ‘예외상태’는 집행 권력이 확장된 것이 아니라, 그 권한의 힘이 시장의 논리에 따라 민간업자에게 분산된 것을 의미한다. 법과 규범이 삶 자체를 복속하는 생명-정치, 그 일상화된 ‘예외상태’가 시장에서 ‘다시’ 유래했다. 아감벤의 『예외상태』는 더 읽혀져야 할 것 같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9 16:34: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