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와의 대화] 존재의 울림, 시의 본향을 찾아서


김명인, <기차는 꽃그늘에 주저앉아>, 민음사, 2015.



김명인 시인이 지난 15년 간 지은 시들을 엮어낸 시집 《기차는 꽃그늘에 주저앉아》가 출간되었다. 김명인 시인은 지난 2012년 본교 문예창작과 교수를 퇴직하고 본업인 시인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지난 3월, 시인을 만나 시와 더불어 살아온 반생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덜어냄의 미학, 열 줄로 된 시편들

“2년 전에 정년퇴직을 한 후로 독서와 산책을 하며 소일을 해왔어요. 그러다 예전에 쓴 원고들을 들춰봤는데 시집에 수록되지 못하고 누락된 시들이 많이 있더군요. 대체로 길이가 짧은 10행 전후의 시들이었어요. 찬찬히 모아보니 시집 한 권의 분량이 되더군요. 그래서 시집으로 엮어보게 되었죠. 열 줄의 시행은 몇 번 읽으면 훤히 기억이 되는 분량입니다. 한국시의 절창들 중에도 10행 전후의 시들이 많죠. 정지용의 <유리창>, 백석의 <모닥불>,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육사의 <절정> 등이 대표적입니다. 《기차는 꽃그늘에 주저앉아》에서는 풍경과 이미지와 사유를 집약했습니다. 삶의 원숙기를 지나 만년을 바라보는 시기에 있어서인지 사물을 대하는 세계관이나 태도가 예전과는 달라진 것을 느낍니다.”



조지훈 선생 자택에서 배우던 습작 시절

시인은 영동의 한적한 어촌 마을에서 유년을 보냈다. 6․25 전란으로 가족의 절반이 총살당하거나 전사했고 집안의 몰락한 가세를 견디며 성장기가 지나갔다. “저는 성장기에는 시인이 되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어린 시절 집안 형편이 피폐했던 탓에 의대에 진학하려 했죠.  갖은 고생을 다 하며 준비했지만 의대에 낙방했고 2차로 붙은 곳이 국문학과였어요. 1학년 때는 학비를 벌어야 하고 먹고 사는 것도 힘들었어요. 몸도 아프고 형편도 어려워 학교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죠.”

시인은 조지훈 선생의 ‘시론’ 수업을 들으며 처음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했다. “2학년 때 겨우 학교에 다니기로 마음을 먹고 장학금을 받아서 가계에 보탬이 되려 했습니다. 그러다 조지훈 선생님의 강의를 듣게 됐는데 기말과제 중 하나가 자작시 다섯 편을 내는 거였어요. 그래서 닥치는 대로 시를 읽기 시작했어요. 당시 고대 도서관에 있는 시집을 모두 읽고 수백 편의 시를 필사를 했어요. 그때부터 이상하게 시에 사로 잡혀서 시를 쓰기 시작했어요. 써둔 시들을 누군가한테 보여야 할 텐데 제가 아는 시인이라고는 지훈 선생밖에 없었죠. 그래서 무슨 용기인지 제 습작시들을 들고 지훈 선생님 댁엘 찾아간 겁니다.”

김명인 시인은 대학 시절 시들을 들고 조지훈 시인의 가택을 방문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삼선교 부근의 물 흐르는 곳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집 몇 채가 있고 한옥 가운데로 목욕탕 굴뚝이 높이 솟아 있습니다. 선생님은 기억자 한옥에 사셨습니다. 처음 찾아가서 쭈뼛거리면서 서 있으니까 선생님이 왜 왔냐고 물어보셨어요. 시들 좀 봐주십사 하고 왔다고 겨우 말씀드리니 선생께서 한참 들여다보시고는 나중에 다시 오라고 말씀하셨죠. 2주 후에 찾아뵈었을 때 선생께서는 옛날 원고지에 일일이 맞춤법 틀린 것들을 고쳐주시고 시구들을 소상히 고쳐주셨어요. 그 후로는 2주에 한 번 선생님을 찾아뵙게 되었죠. 병이 위중해 선생께서 학교에 못 나오시던 시절이었습니다. 마지막 2년간 격주로 찾아뵈었으니 그야말로 말년에 선생님께 시를 보여드린 마지막 제자였던 셈이죠.”



첫시집 《동두천》 발간부터 광주사태 이후 공백기까지

1979년 발간된 김명인 시인의 첫 시집 《동두천》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당시 비평가들은 시인의 시를 일컬어 역사와 시대의 굴곡이 각인된 시집이라 평했다. 전란의 후유증과 부유(浮游)했던 성장기의 쓰라림, 월남전의 경험 등이 시집에 올올이 새겨져 있었다. “첫 번째 시집 《동두천》은 실존의 아픔으로 어쩔 수 없이 내지른 절규 같은 것이었어요. 《동두천》을 펴낸 후 저는 몇 년간 시를 쓰지 못했습니다. 첫 시집 출간을 전후하여 지향점이 비슷한 시인들끼리 모여 ‘반시(反詩)’ 동인을 결성했었어요. ‘반시 선언문’을 제가 썼었는데 ‘우리가 옹호하는 시는 언제나 삶에 귀일하는 것’이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선언문이었죠. 관념적인 시가 아닌 삶에 밀착한 시를 써야 한다는 것이 당시 저희 동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첫 시집 《동두천》을 발간하고 한 동안 시를 쓸 수 없었어요. 첫 시집을 발간하고 이듬해에 광주사태가 일어났기 때문이었죠. 세월호 참사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공황 상태를 겪었던 것과 비슷해요. 당시 광주사태의 공황을 겪으면서 시가 안 쓰이기 시작했어요. 시를 잃어버렸다고 해야 할까요 잊어버렸다고 해야 할까요. 제가 무슨 말을 해도 아무 의미가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를 잃어버렸던 셈이죠.”

시인은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다시 시를 쓰기까지 오랜 시일이 걸렸다고 말했다. “대학에서 전임이 되면서부터는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고민했어요. 논문을 쓰고 학생들을 지도하며 시를 못 쓰는 핑계를 옮겨 놓았죠. 그렇게 무려 8년을 보냈어요. 그런데 하루는 황동규 선생님 우리 학교에 특강을 왔다가 저더러 시를 영영 못쓸지 모르니 분발하는 게 어떠냐고 하시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들으니 아, 내가 시를 쓰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어요. 부랴부랴 일 년에 걸쳐 시집 한 권 분량의 시들을 만들어냈죠. 그렇게 해서 88년에 나온 시집이 《머나먼 곳의 스와니》였어요. 10년만에 나온 시집이었습니다.” 김명인 시인은 이후 미국 유타 주 브리검 영 대학에 교환교수를 가게 됐다. 낯선 땅에 있다 보니 제 스스로 정돈 되는 것을 느꼈다고 시인은 말했다. “정신없이 지나왔던 10년간을 되돌아보게 됐습니다. 이전에는 현실 참여적인 시들을 주로 썼는데 그 1년 동안은 자신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됐어요. 시가 다소 내면화되었다고 할까 보다 존재론적인 고민들이 담긴다고 할까요. 유타라는 곳이 사막 한 가운데에 있는 묘한 곳이었죠. 학생들을 가르치는 틈틈이 여행하며 시작 노트를 썼습니다. 그 후부터 본격적으로 시를 다시 쓰게 되었습니다. 이전의 시와는 다른 시들을 쓰게 됐죠. 아마 제 시의 한 고비였을 겁니다.”



위험을 감수하는 시작 행위, 낚시와 비슷해

시인은 요즘 시를 쓰는 행위가 낚시를 하는 일과 비슷하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저는 태어나 사물을 인식하고 각인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바다와 마주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유일한 취미가 낚시인데 네 시간 동안 배를 타고 나가서 네 시간 동안 낚시를 하고 다시 네 시간 동안 배를 타고 돌아오기도 합니다. 낚시는 저에게 아주 고된 노동이죠.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보면 저는 아주 극한까지 떠밀려갔다가 돌아오곤 합니다. 그러면 한 이틀 동안 끙끙 앓고 낚시 생각은 말끔히 사라집니다. 하지만 2주 뒤면 다시 낚시 생각이 간절해집니다. 저는 낚시를 하는 일이 시를 쓰는 일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준비해야 되고 많이 알아야 되고 익혀야 되고 위험을 감내해야 되고 잡는 희열도 있고 못 잡는 쓰라림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긴장의 끈을 유지해야 합니다. 젊은 시인들에게도 같은 말을 해주고 싶어요. 저는 시인은 긴장감이 떨어지면 더 이상 시를 쓰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긴장감이 지탱하는 동안은 아마도 내일 쓰는 시집이 제 대표작이 되도록 해야겠죠. 취직하기도 어려운 시대에 시를 쓰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스스로를 세우려고 한다면 다시 열심히 마주쳐볼 필요가 있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습니다.”

인터뷰 정리:　선민서 기자 minseo@korea.ac.kr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7 15:1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