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칼럼] 그것은 대화가 아니다

이후경 영화평론가



지난 1월 있었던 파리 총기 사건 일주일 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파리에 갔다. 소문대로 거리는 쥐죽은 듯 조용했고, 미술관 앞에서 줄을 길게 설 일도 없었으며, 숙소에도 빈 방이 남아돌았다. 그런데 그런 파리의 정적이 삭막함이나 황량함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오히려 거기엔 경계심과 두려움과 상냥함과 태연함이 오묘하게 뒤섞여있었다. 그 느낌의 정체를 알게 된 건 호스텔의 같은 방에 묶고 있었던 어느 프랑스인 아주머니 덕분이다. 과거에 파리지앵이었으나 지금은 브르타뉴 지방에서 한적하게 살고 있다는 아주머니는 시간이 날 때면 파리로 여행을 자주 오는데, 불친절하기로 유럽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파리 사람들이 요즘 유독 친절해졌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이 총기 사건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이번 일로 받은 충격과 경각심으로 인해 외국인들에게 모욕감이나 불쾌감을 주지 않으려고 한시적으로나마 조심하는 것 같다는 말이었다. 길에서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짓는다거나 길을 몰라 뭘 물어봤을 때 잘 대답해주는 것도 그래서인 것 같다고 했다.



아주머니와 서로 하루 잘 보내란 인사를 한 뒤 숙소 밖으로 나오면서 이런 질문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저 추측이 맞다면, 이방인들의 폭력이 적어도 일상적 수준에서는 서로 다른 세계의 지역민들 사이에 대화의 최소한적 조건을 마련해낸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폭력에 대한 공포가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낼 수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미국과 유럽의 논리는 정반대로 해석돼야 하는 것은 아닌가? 지금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어떤 폭력들은 폭력을 사용하는 자들이 대화라는 문명적 절차를 준수하지 못하는 미개한 자들이라서가 아니라, 미국과 유럽이 일상 단어의 용법부터 미디어 상품의 유통까지 모든 언어를 장악해버린 상황에서 언어의 나라에서 추방당하고 외교적 수단까지 모조리 차단당한 이들이 택하게 된 극단적 대화의 방식은 아닌가? 그렇다면 폭력은 표현의 자유의 장 안에서 대화에 준하는 자유로운 표현의 한 형태로 이해되어도 무관한 것인가? 이로 인해 폭력에 관해 미국과 유럽이 선점해버린 윤리적 판결에 대해 재고할 필요가 생긴 것인가? 과연 폭력은 무조건적으로 나쁜 것인가?



이 질문들을 이 자리에서 답하기는 어렵다. 이번 총기 사건을 누구 편에서 옳다 그르다 말하는 것도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누군가의 폭력이 어떤 죽음들을 낳았고 그것이 대단히 무섭고 가슴 아픈 일이라는 점도 결코 부정하고 싶지 않다. 다만 여기서는 한 사건과 한 대화를 계기로 시작하여 ‘대화’라는 것에 대한 서구적 환상에 대해 지적하는 데서 그치고 싶다.



어떤 점에서 이번 사건은 지난 여름에 봤던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의 미진한 점들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개봉 당시 <씨네21>의 비평 지면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 “1편이 인간적 동물의 반인간적 혁명으로 환호를 샀다면, 2편은 반인간적 동물의 인간적 전쟁으로 실망감만 안긴다. 1편이 ‘불신’을 되갚아주는 저항의 시대를 고민했다면, 2편은 ‘신뢰’란 허상을 교환하는 외교의 시대에 안주한다. 그래서 1편에서는 시저를 영웅으로 기꺼이 추대했지만, 2편에서는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싶어진다.” 이 판단은 적어도 내게는 아직 어느 정도 유효하지만 다소 순진한 측면도 있다. 세계의 폭력을 실시간으로 목도하며 살아가야 하는 현재, 우리는 외교의 시대에서 저항의 시대로 뛰어넘기 위해 결국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든 비유적 의미에서든 전쟁을 통과해야 하는지도 모르며, 전쟁에 오염되지 않은 혁명이란 허상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도덕적 순수주의자를 허락하지 않는 이 오염된 세계에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전 지구적 폭력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하고 있는 우리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각자가 혼자 깊게 생각해보고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는 문제이다. 세계와 폭력의 순환 고리 중심에서 우리는 모두 고립된 단독자로서 자신의 과오와 미래를 책임지고 짊어져야 한다. 대화는 종종 그 책임을 분배하여 좀 더 가벼워지고자 하는 얄팍한 욕망의 증거일 때가 많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노장의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그런 의미에서 좌우를 가리는 것보다 한 인간의 독단적일 수밖에 없는 윤리를 재고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한 작품이다.



용감하고 솔직한 영화들은 윤리적 선택을 요구한다. 그런 영화들 앞에서 대화란 얼마나 유효한가를 생각하게 된다. 늦게 타지에서 석사 수업을 들으며 일주일에 두 번씩 세미나를 하고 있다. 매 세미나 때마다 대화로 영화에 대한 경험을, 나아가 세계에 대한 경험을 공유하는 것에 대해 근본적 한계를 절감한다. 영화 앞에서, 세계 앞에서, 폭력 앞에서, ‘우리’란 복수 대명사는 늘 요원하다. 이 사실로부터 스스로를 눈 가리고 그것이 이미 선취된 것이라 가정한 뒤 자기 언어의 권위만을 반복하는 것, 그것은 대화가 아니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7 15:2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