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을전성시대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나는지방대시간강사다’ 필자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이하 ‘지방시’)라는 제목으로 지난 9월부터 SNS에 글을 연재해 얼마 전 마무리 지었다. 많이 힘겨웠던 어느 날, 그저 대학원생-시간강사로서의 지난 삶을 뒤돌아보고자 쓴 개인적인 글인데 의외로 적지 않은 반향이 있었다. 조회 수가 8만회 이상 되었으니, 내 논문의 예상 독자에 비추어 보면 정말이지 과분한 관심을 받은 셈이다. 몇몇 언론사에서도 관심을 보였고, 얼마 전에는 <교수신문>에 글이 인용된 것을 보고 복잡한 심정이 되기도 했다.



사실 굳이 ‘지방시’가 아니더라도, 대학원생-시간강사의 삶은 ‘해묵은 이야기’다. 그러면서도 끝없이 쳇바퀴 돌듯 늘 그렇고 그렇게 재생산되는 ‘가벼운 이야기’이기도 하다. “대학 시간강사 처우개선 시급하다(1990년 5월 <동아일보>)”, “시간강사, 춥고 배고픈 강단의 떠돌이(1995년 12월 <경향신문>)”, “상아탑의 노예들(1999년 9월 <한겨레>)”, 이처럼 시간강사 처우 개선은 1990년대부터 이미 ‘시급한’ 문제였지만,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떠돌이’와 ‘노예’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 채, 오히려 더 힘겹게 삶을 살아내고 있다. 최근의 기사인 “이틀은 교수님 사흘은 알바생(2015년 1월 <한국일보>)”은 지방시의 인터뷰를 담았다. ‘알바생’은 1990년대 기사의 ‘떠돌이’나 ‘노예’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자극적인 키워드다. 당사자(시간강사)는 그저 강렬한 기시감을 느끼며 “그래, 다음에는 또 어떤 수식어가 내 삶을 정의할까”하며 쓰게 웃고 만다.



  그러고 보면, 대학은 어느 기업보다도 기민하게 신자유주의의 논리에 영합해 왔다. 1990년대부터 우리의 선배들은 떠돌이고 노예였다. 생업인 ‘강의’와 ‘연구’가 여전히 생계를 보장해 주지 못하는 까닭이다. 강의에 따른 보수가 연봉 천만 원이 채 되지 못하는 슬픈 스토리텔링이야 역시나 ‘해묵은’ 이야기다. 4대보험조차 보장되지 않아 건강보험 취득을 위해 월 60시간의 아르바이트를 하는 시간강사들이 적지 않은 것은, 조금 더 슬픈 스토리텔링이다. 그런데 연구는 특히나 더 모호하고, 허울 좋고, 비사회적인 단어다. 몇 개월, 몇 년을 공부해 학진등재지에 연구 성과를 발표하더라도 아무런 수입이 없다. 오히려 학회는 적지 않은 액수의 가입비, 연회비, 심사비, 게재비 등을 요구한다. 학술진흥재단의 연구지원을 받은 정규직 교수, 혹은 시간강사지원 사업에 선정된 박사학위 취득자가 아니라면, 그것을 온전히 부담해 내야 한다. 학진 등재지 투고 논문의 상당 부분을 박사과정 수료 후 연구자(시간강사)들이 채우고 있음을 감안하면, 대단히 가혹하다. 우리에게 연구는 신성함이나 숭고함이 아닌 ‘생계’가 되어야 한다.



  최근의 시대를 폭넓게 함의하는 대표적인 단어 중 하나는 ‘갑을관계’다. 아카데미는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슈퍼갑’이고, 그 안의 모든 노동자는 ‘을’이다. 우리(대학원생-시간강사)는 병이나 정, 어쩌면 한참 더 내려가야 할런지 모른다. 그래도 우리는 언제나 그랬듯, 연구실에서 밤새 연구하고 허락되는 한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대면하며, 그렇게 우리의 삶을 스스로 당당하게 증명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두 공간을 ‘갑’도 ‘을’도 없는 공간으로 지켜나가야 한다. ‘교학상장’, 교수와 학생은 함께 성장해 나가는 관계다. 나는 대학에서 인문학을 강의한 지 3년차가 되었지만, 강의실에 들어설 때면 언제나 두려움이 앞선다. 그 실체는 강의에 대한 부담감이나 나의 연약함 때문일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학생들을 ‘을’이 아닌 ‘갑’으로 보는 데서 온다. 나는 내 전공을 조금 더 ‘먼저’, ‘오래’ 공부했을 뿐, 학생들은 보다 독특한 시각으로 문제를 대하고 새로운 해결방안을 제시할 줄 안다. 그들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과 다양함을 존중해야 한다. 인문학은 특정 개인의 성찰이나, 명문대 교수의 강의록이나, 어려운 철학책이 아니라, 교수와 학생이 서로를 ‘갑’으로 존중하고 두려워하는 평범한 집단 지성 안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에 더해, 대학원생과 지도교수의 관계 역시 그래야 한다. 우리가 지도교수를 ‘갑’으로 여기는 것은 그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대학 노동자는, 교수와 학생은, 서로를 ‘갑’으로 여기며 다정다감하게 아카데미의 삶을 함께 해 나가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갑을전성시대’에 역행, 항거하는 방법이다. ‘갑갑한’ 현실이지만, ‘甲甲한’ 관계가 되어 서로 연대하고 존중할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7 19:4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