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녘, 당신은 어떤 기분인가요.
- 한강, 「해질녘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창작과비평』 1999년 여름호 수록.)

한영인 문학평론가

  올해 초 제주의 서쪽으로 거처를 옮겼다. 덕분에 저녁마다 밭의 흙을 붉게 물들이며 바다로 떨어지는 태양의 마지막 자락을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가장 높은 아름다움이 가장 낮은 쓸쓸함과 몸을 섞는 해질녘의 풍경을 바라보며 때론 알 수 없는 기분에 빠지기도 했다. 사람들의 오해와는 달리 기분은 결코 사소하게 치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하이데거 같은 이는 ‘기분(Stimmung)’을 자신의 독특한 존재론을 구성하는 핵심적 지위에 올려놓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기분은 우리가 좋든 싫든 그 속에 던져져 있는 세계를 개시해 주는 것이며 현존재는 마치 운명처럼 기분에 포박되어 있어 결코 그 기분의 규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이렇듯 기분에 의해서 비로소 세계가 개시되는 것이라면, 우리가 기분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자신을 포함한 누군가에 관해 무척 많은 것을 이야기하는 일이 되는 셈이다.

  뜬금없이 기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건 얼마 전 한강의 소설 「해질녘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를 다시 읽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강이 누군지도 모르던 새내기 시절 동아리방에 굴러다니던 오래된 계간지에서 우연히 이 소설을 읽었고 그 후부터 해질녘의 기분에 대해 예민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이제 막 해가 이울기 시작하던, 이른 봄날의 서늘한 오후였다. 나는 한강의 소설을 읽을 때는 미묘하게 변화하는 ‘기분’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하는 편인데 그건 내가 처음 읽은 그녀의 소설로부터 얻은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은 허름한 여관방 창턱에 기대어 지는 해를 바라보는 한 소녀로부터 시작한다. 소녀는 지금 집을 나간 엄마의 행방을 좇는 아빠와 함께 위태로운 여행 중이다. 소녀의 부모는 작은 트럭에 붕어빵과 어묵, 닭꼬치와 호떡 등을 만들 수 있는 조리도구를 싣고 이곳저곳을 떠돌며 장사를 하는 노점상이다. 가난의 신이 문을 두드리면 사랑은 창문으로 도망친다던가.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남편과 함께 한 세월은 과수원집에서 태어나 꽃집에서 일하던 향긋한 처녀를 어느새 입에 지겹다는 말을 버릇처럼 달고 사는 여인으로 바꾸어버렸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 긴장된 붉은 빛을 돌게 하는 건 그녀를 ‘누님’이라고 부르며 살갑게 따르는 나이트클럽 삐끼 ‘번개’다. 둘은 비록 옅은 마음을 나누었을 뿐이지만 남편은 그런 그녀를 편집증적으로 의심하며 몰아세운다. 남편의 의심이 폭력으로 변해가면서 아내는 지긋지긋하다는 절규를 남기고 훌쩍 떠나버리고 둘이 함께 도망갔다고 믿는 남편은 삶에 대한 의지를 방기한 채 그저 복수심에 가득 차 아내의 뒤를 좇는다. 그는 아내에 대한 미움과 원망, 자신에 대한 자책과 분노를 이기지 못해 늘 술에 취한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면 아이를 차가운 여관방에 두고 아내의 흔적을 좇아 어딘가로 외출한다. 아빠가 나가버리고 나면 작은 여관방은 텅 빈 겨울 들판처럼 적막해지고 어린 소녀의 막막한 외로움이 참았던 눈물처럼 차오른다. 그렇지만 소녀는 거의 울지 않는다. 세계의 허름함에 닳을 대로 닳아버린 마음처럼 외려 의연하다. 하지만 그 의연함은 성숙의 표지라기보다 파국을 지연시키기 위해 껴입은 순진함의 외투 같은 것이어서 읽는 이의 먹먹함은 배가된다.

  이 소설의 플롯을 이끄는 건 배반당한 사랑이나 어디에나 있을 법한 치정이라기보다 차라리  불안과 외로움이라는 ‘근본기분(Grundstimmung)’이다. 작품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 위와 같이 내용을 간추려보았지만 한강의 소설은 줄거리로 요약될 때 본연의 매력을 곧잘 잃곤 한다. 이는 그녀의 관심사가 흥미로운 이야기의 구성에 있다기보다 차라리 인간이 지닌 다양한 감정의 결을 암시적으로 드러내는 데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 감정을 여기서는 외로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중요한 건 이때의 외로움이 철저히 미학화 되어 제시된다는 점이다. 가령 일몰에 관한 다음의 묘사를 보라. “그날 오후 아이는 일몰을 봤다. (중략) 석양을 품은 구름장들은 이 세상의 것 같지 않게 은밀하고 부드러운 몸놀림으로 말없이 살을 포개고 있었다.” “세상은 차츰 어두워질 것 같지만, 그렇게 어두워지고 말 것 같지만, 해가 사라지기 직전 마지막 순간에는 깜짝 놀랄 만큼 환해진다. 마치 꿈속같이, 그 순간만큼 세상이 아름다운 때는 없다.” 이렇듯 소설 속에서 아이는 일몰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동시에 소녀는 일몰을 보며 “왜 하루중 이맘때가 되면 혼자란 생각이 들곤 하는 걸까”라고 되묻는다. 소녀에게 해질녘의 시간은 존재의 고독함과 외로움을 가장 핍진하게 감각하는 시간인 동시에 강렬한 아름다움을 체험하는 시간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보는 이에 따라 이러한 미학화 된 외로움이 불만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녀 특유의 ‘시적 문체’는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에 핍진함을 부여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하며 따라서 인물들의 생동감이 잘 살지 않는다거나 감정의 노출이 생경하게 느껴지는 아쉬움도 역력하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하루가 저물어가는 때에 이 소설의 첫문장을 떠올리며 그때마다 한강의 문장이 지닌 힘에 대해 생각한다. “해질녘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 나는 ‘개’를 나로, 너로 그리고 당신으로 바꾸어 자주 묻는다. 나는 꼭 그 기분이 당신에 대해 그 어떤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려줄 것만 같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6 14: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