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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제자 소영아!

유난히도 포근했던 금빛 가을날, 그날의 일은 맑은 하늘의 뇌우(雷雨)처럼 나를 허둥대게 했다. 아!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휘휘 달려간 사고 현장, 병원 응급실 ... 설마하며 서둘러 당도하신 부모님의 절망의 오열(嗚咽), 에워싼 학우들의 억누른 흐느낌 속에, 이 스승의 머리엔 어떤 논리적 이성(理性)도 자리하기 어려웠다. 나를 향한 한없는 자책(自責), 방향을 알 수 없는 불특정의 원망(怨望), 면목 없는 죄스러움이 난타하듯 교차하고, 소영이를 둘러싼 저간의 여러 기억들이 내게 다투어 명멸(明滅)하며 몰려올 뿐이었다.

소영이를 사학과의 성원으로 맞이한 후, 과내(科內)에는 전과 다른 생기가 돋게 되었음을 나는 잘 안다. 너의 활달한 성격과 늘 미소 띤 얼굴, 명랑한 톤의 목소리는 너를 대하는 모든 이에게 웃음과 즐거움을 주곤 했지. 학과의 행사 때마다 자기 일처럼 나서던 너, 지난 봄 정기 답사(踏査)에선 준비 팀의 일원이 되어 동백꽃이 피어나던 남도(南道)의 불사(佛寺)를 진지하게 설명하던 모습을 또렷이 기억한다. 동행했던 중국 선생님께 서툰 중국어 대화를 시도하던 소영이의 그 발랄한 용기도 눈앞에 보듯 선하구나. 지난번 교수-학생 모임 때는 올 가을 오색의 북한산(北漢山)에 가자던 내 제안에 제일 먼저 호응하던 네가 아니었니! 그 활달함과 적극성이라면 소영이가 꿈꾸며 준비하던 방송국 아나운서 되기는 결코 어렵지 않았을 게다.

그 푸른 꿈을 펴보지도 못한 채 떠난 너의 영전(靈前)에 나는 형언키 어려운 자괴감에 머리를 숙인다. 학과의 선생으로서 강의 이외에 학교생활의 면면(面面)들을 두루 살피지 못한 나태한 불찰에 대한 후회를 금할 수가 없구나. 사고를 미연에 막기 위한 교내 시설의 미비함도 그저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다시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무엇보다도 사제(師弟) 간의 정다운 시간을 좀 더 많이 갖지 못한 안타까움이 회한(悔恨)으로 남는다. 가을은 깊어 단풍은 저리 시리도록 선한데, 학교서 가깝기만 한 북한산 등산은 끝내 지키지 못한 허언(虛言)이 되었구나. 너를 아프게 보내며 적어 가는 이 글이 자꾸만 턱에 걸려 쉬이 써 내리지 못하는 것은 스승으로서 할 바를 다 하지 못한 죄책감 때문이리라.

사랑하는 제자 소영아, 고개 들지 못할 이 스승을 용서하고 편히 가거라! 연도(羨道)에 함께한 많은 학우들, 문과대학 선생님들, 그리고 학교 관계자분들이 있어 조금이나마 떠나는 길이 외롭지 않았기를 바란다. 너를 아는 모든 이들이 ‘장소영’이 남긴 쾌활한 웃음과 생기를 오래도록 기억하리니, 부디, 부디, 평온한 영면(永眠)이 되기를 바란다!

2011년 11월 3일,
애틋한 제자의 영결식(永訣式)을 마치고,
사학과 학과장 박상수 교수 씀.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13 15:5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