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새로운 대학정보제공운동 고민해야


대한민국은 학벌사회다. 한국사회에서 학벌이 상징적 자본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세상에 호기심이 많은 어린 학생들은 오랜 기간 좁은 교실에서 야간자율학습과 선행학습에 시달리고, 부모들은 자녀들의 미래를 위한 것이라 합리화하면서 사교육에 돈을 쓰며 위장전입을 한다. 계급적 이동 가능성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명문대 졸업 이력과 그곳에서 형성되는 인맥은 서민의 중산층 진입을 위한 최소조건이자 기득권층의 자기보호를 위한 수단이다. 많은 국민들은 이러한 현실을 체념한 채 받아들이고 있다.

학벌사회는 무엇보다 개인이 자기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다. 고교생들은 자신이 누구이며 무슨 일을 하며 어떤 가치를 위해 살아야 할지 고민할 기회도 없이 단지 입시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능 및 내신 점수에 맞춰서 대학에 입학한다. 명문대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중받고, 지방의 소규모 대학들은 “지잡대”라는 경멸적 언어로 불린다. 명문대생들이 무슨 대학 출신이라는 식의 허약한 근거 위에 자신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지방대생들은 잘못한 것도 없이 열등감에 시달리는 동안, 한국사회의 사람들의 유대관계는 회복할 수 없을 만큼 흔들리고 와해된다.

본교 총학생회가 9월 22일 “<중앙일보> 대학순위평가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수와 학교 재단이 나서서 언론사의 대학순위평가를 거부해야 한다는 시민단체의 목소리도 나왔다. 학부모와 학생들은 대학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므로 언론사의 대학평가를 본다. 언론사가 대학평가의 주체가 됨에 따라 학생들을 유치해야 하는 대학들은 언론사의 눈치를 본다. 언론사는 대학의 다양한 전공과 그 학과의 학풍 및 교수들의 연구과제와 환경에 대한 정보를 말살한 채 단순히 대학을 서열화한다. 서열화된 대학순위는 기업의 인사시스템에 영향을 끼치고 이러한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학벌은 자본화된다. 학벌이 자본화될 때 대학은 학문하는 곳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한다.

총학의 언론사 대학순위평가 거부운동을 환영하지만, 평가거부만으로는 학벌사회를 깨뜨릴 수 없다는 인식도 필요하다. 이미 소위 고서연중경외시라는 서열은 한국인들의 대학에 대한 판단기준이 되어버렸다.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잣대가 필요하다. 언론사 대학평가 거부운동과 함께 대학과 이해관계가 결부되지 않은 시민단체나 여타 대안세력으로부터 촉발되는 새로운 대학정보제공운동이 있어야 할 것이다. A대학의 B과에 들어가면 C교수님과 함께 이러한 공부를 하게 될 것이라는 식의 서열과 무관한 다양한 정보에 기반을 둔 판단을 할 수 있을 때, 그리고 그러한 판단이 오랜 기간 반복돼 마침내 대학평가에 대한 사람들의 감성을 바꿀 때 비로소 우리는 학벌이 더 이상 자본화되지 않는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9 16:3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