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라는 환상

남다은(영화평론가)

개인적인 이야기로 이 글을 시작하는 것에 대해 미리 양해를 구하고 싶다. 지난 1월 말, 네덜란드에서 열리는 로테르담 영화제에 심사위원으로 참석했다. 일주일간 하루에 네, 다섯 편의 장편영화를 보았고 미국, 러시아, 아르헨티나, 네덜란드 출신 비평가들과 심사를 했다.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지금 내가 쓰려는 것은 자랑이 아니다. 이전까지 내가 가본 국제영화제라고는 한국에서 열리는 몇몇 영화제들이 전부였다. 해외영화제를 다녀온 동료들이 쓴 참관기를 읽을 때마다 동경어린 마음으로 상상을 해 보았다. 새로운 영화를 다른 누구보다 먼저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며, 극장과 극장 사이의 공기를 느끼고, 국적이 아니라 오직 영화로 연대하는 설렘. 몸은 지쳐도 정신은 깨어나는 순간들. 물론 나도 알고 있었다. 영화를 사랑하는 것과 영화제를 사랑하는 것은 적어도 내게는 같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조심스러운 말이기는 하지만, 영화제는 언제나 내게 얼마간의 의무, 그리고 얼마간의 피로함을 안기는 장소이며, 그건 영화 자체와는 별개의 문제일 때가 대부분이었다. 영화를 업으로 삼은 사람이 영화제를 그렇게 느낀다는 건 별로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므로, 이런 감정은 그냥 묻어 두고 있었다. 혹은 술이나 마시며 그야말로 영화제 언저리를 맴돌 때가 많았다.

어쨌든 기대와 두려움을 안고 로테르담에 도착했다. 실은 영화제에 대한 뜨거운 마음을 찾고 싶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동이 틀 무렵에 시작되어 늦은 밤 끝나는 일정이 반복되는 동안, 나는 퍽퍽한 햄버거를 목구멍에 밀어 넣듯, 영화들을 밀어 넣고 있으며, 내가 타지에 와 있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심사를 위해 의무적으로 보아야만 했던 영화들이 대체로 훌륭하지 않았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비바람과 눈보라 속에서 해를 보지 못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난 8년간 여러 영화제들에 출품된 영화들을 심사하면서 (그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400편을 심사하면 그 중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는 고작 열편 내외라는 사실을 몸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심사해야하는 영화들이 기대이하거나, 날씨가 기운을 빼앗아갔다는 건 어쩌면 핑계일지 모른다. 영화애호가들이 가장 사랑한다는 이 멋진 영화제에 와서 대체 나는 왜 이렇게 무감각해지고 있는 것일까. 로테르담에 머무는 내내 그 생각에 빠져 지냈다.

그 곳에서 영화를 매개로 만난 많은 비평가, 프로그래머들은 일 년의 상당시간을 영화제에서 다음 영화제로 이동하며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해야 새로운 영화들을 발견하고 소개할 수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좀 과장되게 말해서 그들에게 국적은 다른 무엇도 아닌 영화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일본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공부하고 남미영화들의 전문가가 되어 멕시코에서 살며 일 년에 7개의 나라에서 열리는 7개의 영화제를 돌아다니는 것이다. 말하자면 영화 유랑자가 그들의 정체성이다. 내가 그들을 모두 만나본 것이 아니므로 단정 지어 말하는 건 위험하며, 여기에 어떤 편견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 또한 인정해야겠다. 하지만 나의 편협한 인상에 근거해 말해도 된다면, 이들은 어쩐지 영화라는 비행접시에서 또 다른 비행접시로 옮겨 타며 현실에서 붕 떠서 희열과 우울을 오가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 안에서만은 오직 영화가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굴러가는 세계. 영화가 모든 국적, 성, 계급의 경계를 지우는 것처럼, 그래서 모두가 영화 하나로 평등하게 소통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 그 세계는 영화제라는 환상이었고, 여기 모인 사람들은 그 환상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영화에 대한 자신의 외로운 순정, 혹은 이해관계, 혹은 인정욕구를 실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비로소 내가 즐기지 못하는 것, 아니, 정확히 말하면 끼어들지 못하는 것이 그 환상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영화제 일정을 시작하는 아침마다 나는 그나마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BBC 뉴스를 틀어놓고 있었는데, 그 일주일동안, 뉴스는 언제나 비극들로 시작되었다. 남미의 나이트클럽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죽었고, 이집트의 반정부 시위대들이 무참히 학살되었으며, 시리아의 군 폭격으로 민간인들이 사망했다. 하지만 영화제가 열리는 메인 상영관 문을 넘어서는 순간, 그 현실의 얼룩은 영화제라는 환상의 문턱 너머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아침을 먹으며 우리는 어제 본 영화에 대해 침을 튀기며 의견을 교환했지만, 아침의 뉴스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언젠가 영화를 사랑하는 것은 이야기를, 혹은 이미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지금 현실의 비극과 영화제라는 환상을 대립구도로 놓고 한쪽을 지지해야 한다고 가치판단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혹은 영화가 정치적인 메시지를 던지고 선동해야한다고 말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다만 영화제라는 환상에 기꺼이 몸을 던지는 영화인들이 세상을 다룬 개별 작품들을 평가하고 지지하거나 비판하는 만큼 그 거친 세상자체도 온전히 사랑하는지, 그 못난 세상을 끌어안는 법에 대해 고민하는지 내 몸은 잘 느끼지 못했다. 그 때 영화제는 자기만족적이고 도취적인 마약 같았다. 영화제를 떠나며 평론가로서는 불온하게도 나는 ‘영화가 정말, 그렇게 중요한가?’ 되묻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