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겨울, 교환학생 파견 면접심사에 참여한 적이 있다. 지원자 스물다섯의 소위 ‘스펙’을 검토하여, 외국에 나가서도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고 성실히 학업을 수행할 학생들을 선별해야 하는, 부담이 되지만, 영예롭다면 또 그렇다고 말할만한 그 일에서 나는 뜻하지 않은 충격을 받게 되었다. 이야기인 즉, 그들 중 열여덟 가량의, 동일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학과 소속의 학생들이 외려 동일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특정 전공을 공부하러 가겠다는 사실도 그렇거니와, 정작 놀라게 된 것은, 그 동기를 묻는 내 철없는(?) 질문에 앞날의 효용성과 장래에 대한 ‘보험’의 기능, 여기에 맞물린 예방적 가치를 총명한 목소리로 또렷이 말하는 학생들의 얼굴에 서려 있던 어떤 비장함 때문이었다. 영문학, 불문학, 독문학, 철학, 사회학, 심리학, 중문학 등이 뿜어낸다고 믿고 있었던 다양한 스펙트럼이 기실 하나의 총구를 이루고 있음을 새삼 확인하게 되는 그런 순간이었다.

이 총구가 겨누는 곳은 미래지향적이면서도 단일한 과녁이며, 현실에서의 절망감이 교차하면서 몸뚱이를 한창 불려가는 것은 바로 이 과녁의 크기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굳이 학생들의 편향된 선택만을 탓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거개의 사람들이 세속적 쾌락이나 매 순간 현실이 만들어내는 소소한 즐거움을 뒤로 한 채, 아니, 잠시 접어둔 채, 미래를, 열심히, 아주 열심히 살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그 미래라는 시간에 장밋빛 청사진을 드리우는 동안 도처에서 현실은 밀려나고, 유보되고, 유폐된다. 이 땅에서 보편성마저 획득한 것으로 보이는 이 미래지향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대부분 익숙해있다는 사실을 그 누가 쉽사리 부정하겠는가. 그러니, 실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한번쯤 되물어 볼 용기가 모두에게 필요한 때는 또 아닌가.

‘현실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말에 따라 붙는 조롱어린 폄하는 우리의 과거를 돌이켜 보아도 그리 낯선 것만은 아니었다. 자원 하나 변변치 못한 나라에서 수출만이 살길이라며 밤늦도록 흘린 땀방울에서나 선 새벽에 공장으로 향하던 그 종종걸음 속에는 ‘미래’라는 보이지 않는 시간을 통제와 재편의 이데올로기로 감아내기에 충분한 알리바이가 서려 있었다고만 말 해두자. 그리하여 하루하루는 미래에 헌정되었고, 이 거대한 ‘프로젝트’는 물론 지금 이 순간도 진행 중이다.

보이지 않는 시간 속에 삼투된 현실은, 허나 현실 자체로는 남루함을 벗어날 수 없다. 내일을 위하여 오늘을 사는 나는 라면으로 버틸 수 있지만, 이 라면의 포만감은 현실에는 실상 존재하지 않는, 그러니까 미래의 다른 대체물에서 찾아내야만 한다. 여기에 비장함이 묻어나는 건 따라서 당연하며, 비장함 뒤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는 것은 희망과 야망이 앞날을 향해 쏘아올린 원대한 화살이다. 그것이 한껏 그려낸 포물선은 오늘, 지금 이 순간에도 불꽃이 되어 사방에서 번쩍이고 있다.

그렇다면 이 포물선 안에 포획된 대학은 대학 고유의 기능인 학문성취의 자유를 어떻게 천연히 말할 수 있을까? 고통 속에서 행해졌음에 분명한, 그러나 그 단일한 선택을 목전에 두고서, 불안한 현실을 지워내고 찬란한 빛을 뿜어내는 미래를 걸머쥐었다고 환대해야만 하는 걸까? 공부하다가 죽은 사람 보지 못했다는 말이 공부를 권하는 덕담이라기보다, 이것을 제외한 나머지, 즉 현실을 지탱하는 온갖 요소들을 유보하고, 신체권이나 선택권처럼 인간이면 마땅히 누려야 할 저 권리마저 포기하라는 강압이라는 것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 걸까? 그런데 인생은 또 어쩌라고, 단 한 번의 궤적만을 남기게끔 만들어져 있는 걸까?

조재룡 교수 문과대 불어불문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