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악몽을 꾸었다. ‘미치고 환장하겠다’는 말이 나온다. 나는 분명히 34개월 군 복무를 마쳤는데, 이를 입증할 기록이 없기에 다시 ‘입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소용이 없다. 절망감에 풀이 죽은 채 송충이 한 마리(이등병 계급장)를 이마빡에 붙이고 그 괴롭고도 지겨운 군대생활을 다시 하게 된 나는 병영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 한 대를 피워 문 채 칠흑 같은 밤하늘을 멍하니 바라본다....

1975년에 만기제대한 후 나는 가끔 이런 악몽에 시달린다. 알고 보니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몇 퍼센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많은 제대군인의 공통증세라고 한다. 그 가운데 영리한 사병 출신은 군 생활을 다시 할 테니 제발 계급을 상병으로 해달라고 타협하기도 한단다. 확언하건대 내가 마누라 생일이나 집 전화번호는 잊어버려도 일생동안 군번을 잊는 일은 없을 것이다. 누가 뒤에서 툭 치면서 “군번!” 하면, 돌아보지도 않은 채 내 입에서 8개 숫자가 총알같이 튀어 나올 것이다. 혹 내가 치매증세를 보인다면 가족들은 나에게 군번을 물어봐 주기 바란다. 0.1초 안에 큰 소리로 복창하지 못하면 그 때부터 나를 치매환자로 등록하고 격리수용해도 좋다.

나는 등산을 좋아하지만 북악산 산행을 일부러 피한다. 그해 5월 어느 날, 형제같이 다정했던 전우들이 거기서 유격훈련을 하다가 악천후로 길을 잃고 헤매었고 바위틈에 쪼그린 채 얼어 죽었기 때문이다. 5월에 동사라니?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다. 내가 병역을 마쳤다는 기록이 내 꿈속에는 없지만 그들의 그 죽음을 기록한 문서는 국방부에 분명히 있을 것이다.

‘군대에서 죽으면 개 값도 못 받는다’ 는 이 기막힌 말이 당시 우리로서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던 진실(?)이었다. 그 사건 뿐 아니라 내가 복무중에 겪거나 들은 크고 작은 인명 사건들은 신문에 한 줄도 실리지 않았고 방송에 한 마디도 나가지 않았다. 억장이 무너진 유가족들이 위로는 받았겠지만 그 개 값이라도 받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북의 형제와 휴전 중이지 종전한 것이 아니다. 인성이 마비되는 전쟁에서 지상목표는 우선 이기는 것이다. 전쟁판에선 ‘기만’ ‘사기’ ‘음모’가 필수도구다. 한비자(韓非子)는 “전쟁 중에는 사기와 거짓말을 최대한 해야 한다(戰陣之間, 不厭詐僞)” 고 했다. 이에 바탕 한 “병불염사(兵不厭詐)” 가 있는데 “All’s fair in war”라 하면 더 쉬울 사람이 많을 듯하다.

욕먹을 소리지만 이번 천안함(天安艦) 사건의 진상에 대해 ‘알 권리’ 운운하며 갈수록 이런저런 노출을 시도하는 요즘 언론이 불만스럽다. 이번 비극은 일단 냉정한 자제가 필요할 것이다. 강 건너 불 보듯 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나는 희생자를 생각하면서 내 동생 내 조카 내 아들을 잃은 듯한 아픔을 느끼려고 한다.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폐와 위에 짠 바닷물이 가득 차와 질식에 이르렀을 그들을 떠올리면 아픔마저 캄캄해진다. 어렸을 적 강에서 놀다가 익사 직전의 고통을 겪어보았는데, 이번 희생자들은 그 고통과 절망감이 몇 배나 컸을 것이다.

<소설 알렉산드리아> <지리산>의 작가, 한국의 발자크 이병주(李炳注)는 남북이 더 날카롭게 대치하던 1960년대에 남북한의 ‘중립통일론’을 주장하다 반국가사범으로 몰려 10년형을 선고받고 2년 7개월 간 감옥살이를 했다. 그를 존경하며 남북문제의 근본적 해결로 중립통일이 가장 유력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아직도 다른 원인이 있을 수 있다는 한 가닥 소망을 포기하고 싶지 않지만 비겁하기 짝이 없는 어떤 무도한 공격 가능성 때문에 억누를 수 없이 치미는 적개심(敵愾心)에 괴로워하다가 몇 마디 실언(?)을 하고 있다. 그저 우울하기만 하다. 오늘밤 또 그 악몽을 꿀 것 같다. 

                                                                                       글/김언종 교수. 문과대 한문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