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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이 끝나고 피폐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친구라 이름붙인 칙칙한 생물들과 어제 춘자에서 한잔하고 온 흔한 학우입니다요
시험기간에는 바닥에 언 얼음판에 초딩처럼 슬라이딩 하는것조차 재미있어보이더니 막상 시험이 끝나니 귀찮고 춥고... 달랑달랑한 주머니사정에 기울일것은 술잔밖에 없어 이주일에 한번은 개근하다시피하는 춘자로 또 발걸음을 옮겼습지요
이놈의 춘자라는 곳은 삼삼오오 들어가면 기묘하게도 꼭 하나 이상이 꽐라가 되어나오니 진성 알콜러들을 불러들이는 것인지 멀쩡한 사람도 알콜러로 만들어버리는것인지 대단한 마력을 가진 곳이 아닐 수 없습디다
어제도 다름없이 그 마력은 제 주린 배를 제육와 순두부로 채우고 시험에 혹사당한 뇌를 알콜로 적당히 절여서 포근한 취기의 품에 집으로 돌려보내주었습죠
오늘 아침에 희미한 기억을 더듬으며 몸을 일으켜보니 아뿔싸, 제가 몇년전 사서 애지중지 하던 이어팟이 당췌 보이지를 않는 것 아니겠습니까
본디 태어나기를 귓구멍이 다른사람들과 달라 좁아터져 오픈형 이어폰은 열에 아홉은 귀가 아프지 않고 채 삼십분을 가지 못하며, 커널형 이어폰은 흥건한 물귀지에 미끄러져 나오는 놈이거늘
이어팟 요놈은 제 귀에 딱 맞아 비루한 중생의 문화생활을 도와주던지라 제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지요
친구놈들에게 연락해보니 보거나 챙겼다는 놈은 고사하고 온전한 기억을 가진놈이 나오질 않아 허허 요놈들 느이들도 다 꽐라였구나 하고 궁시렁대며 마지막 희망을 찾아 춘자로 발길을 돌렸지요
들어가보니 그 마력에 취한 학우들이 득시글거려 발디딜틈은 보이질 않으며, 꽐라들의 취기찬 울부짖음에 고3 학생들이 듣기 모의고사를 함에도 꿋꿋이 새건물에 드릴을 두들기던 옛 모교의 정취가 생각나니
어팟아 나의 어팟아 내가 너를 여기서 잃어버렸다면 너는 필히 어느 취객에 발에 밟혀 운명을 달리하였거나 정신을 잡고 일행의 추태를 즐거이 감상하던 자의 하루 득템이 되었겠구나 싶었지요
눈물이 앞을 가리고 제 안경도 마음을 아는지 뿌옇게 김을 머금음에 안경을 벗어제치고 바쁘신 사장님께 염치불구하고 어제 하얀 이어팟이 하나 나오지 않았습니까아 하고 여쭤보았습니다
사장님이 어제 그런 물건은 나오지 않았더라 하시니 속으로는 희망없는 일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순간 허탈함이 가슴을 꾹 채우고 제 비루한 어깨는 더욱 축 쳐졌습지요... 아마 사장님이 보시기에는 이 중생이 중성화수술을 받고 스스로의 다리사이를 처음으로 들여다본 바둑이와 모습과 다름없었을것입니다
네에 감사합니다 하고 발길을 돌리려는 차, 사장님이 언뜻 학생 이리로 와보게나 하시길래 영문을 모른채 잠시 기다리니 카운터를 뒤적거리신 뒤 자 이거 가져가 하고 하얀 실뭉치를 건네시는게 아닙니까?
다시 안경을 쓰고 찬찬히 들여다보니 이게 무어야, 저와 동고동락한 어팟이는 아닐진대 쌍둥이처럼 똑 닮은 놈이 제 손 위에서 그 비비꼰 몸을 주억거리고 있었습지요
동화속 도끼빠뜨린 나무꾼마냥 아니 사장님 이건 제 이어팟이 아님니다요 하니 사장님이 라면 써비스를 주시던 그 인자한 모습으로 거 학생 찾으러 여기까지 왔는데... 우린 맨날 심심찮으면 이런거 나와 이놈은 벌써 주인이 안찾아온지가 몇달이야 하시며 제게 데려가라고 한사코 말하시는게 아니겠어요
얼떨떨해 다시 손에 놓인 이어폰을 한번 보고 다시 사장님 얼굴을 올려다보니 아아! 이것은 세월을 초월해 현세에 강림한 산신령님 부처님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몸둘바를 모르며 사장님의 그 따뜻한 인심과 마음씨에 감동받아 거듭 고개를 푹 숙이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중에 꼭 또 오겠습니다를 연발하며 참살이길로 나왔습니다
몇분전 들어올때와 다를리없는 그 부산한 거리가 어찌 그렇게 따뜻해보이던지요... 여친이라고불리우는 환상의 생명체를 옆구리에 끼어본적이 없어 성탄절이 다가옴에 흡사 스크-루우지와 무한공감대를 형성해가던 제 마음은 어디없고, 아름답고 건전한 이성관계로 대학생활을 채워가는 학우들만이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이 비루한 중생이 안그래도 추워터진 겨울, 이번 성탄절에 집구석에서 케빈을 수십번째로 보면서도 허허허 즐겁게 웃는다면 그건 모두 아름다우신 춘자 사장님의 마음씨 덕분일 것입니다
이 중생은 더욱더 분발해 졸업때까지, 아니 졸업해서도, 천운에 닿아 만약에 결혼이라는걸 한다면... 가족장학금을 노려 자식들을 고대에 보내서라도 춘자에 뼈를 묻겠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넷상으로나마 외쳐봅니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17 17:4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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