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칼에 살고, 칼에 죽는다
刀(도, 카타나), 劍(검, 츠루기), Sword(소드), Schwert(슈베르트).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칼은 많은 사람이 로망을 가지는 무기입니다. 소설,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등 여러 매체에서 주인공의 무기를 칼로 설정하는 것은 그러한 로망이 반영된 결과일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시 역사적으로 칠지도, 전어도, 사인검 등 영험한 의미를 품은 칼들이 만들어져 지금까지 문화재로서 남아 있습니다.
화기가 보편적으로 보급되기 전까지 오랫동안 실전에 사용됐던 칼은 여전히 군대에서 다양한 용도로 쓰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장성들에게 의장용으로 수여되는 삼정검, 총기에 부착해 총검술 용도로 쓰이는 대검 등이 현역 장비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처럼 칼은 전쟁 및 전투와 떼놓을 수 없는 관계였고 자연스럽게 칼을 직접 사용할 군인을 훈련하기 위해 검술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검술에서 비롯된 펜싱은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로망을 현대적으로 실현하는 스포츠입니다. 18세기 유럽에선 총기의 발명으로 인해 장식용으로만 쓰이던 스몰소드를 결투에 사용하면서 찌르기에 특화된 검술이 발달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프랑스의 검사 무슈 라바에 의해 정립된 스몰소드 검술은 현대 펜싱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이후 결투 문화가 온건해지고 오락의 성격을 띠며 펜싱이란 종목은 시작됩니다.


2. 펜싱에 대하여
펜싱 경기는 총 9분 동안 진행되며 3분당 1바우트, 즉 3바우트로 진행됩니다. 각 바우트 사이엔 1분의 휴식 시간이 주어지며 시간 내에 먼저 15점을 득점하는 선수가 승리합니다. 만약 시간이 종료될 때까지 두 선수의 점수가 동점이라면 1분 동안 연장전을 진행하고 먼저 득점하는 선수가 승리하게 됩니다. 펜싱은 승부를 가르는 점수를 산정하는 방식에 따라 에페, 사브르, 플뢰레 등 3종목으로 구분됩니다.
에페는 전신이 공격 대상이며 가장 무거운 칼을 사용합니다. 사브르는 가장 짧은 칼을 사용하고 유일하게 찌르기뿐만 아니라 베기도 허용되며 공격 대상은 상반신에 한정됩니다. 플뢰레는 공격 대상이 상반신 중에서도 몸통으로 한정됩니다. 동시에 타격이 이루어질 시 두 선수 모두 득점하는 에페와 달리 사브르와 플뢰레는 먼저 공격 의사를 밝히고 공격한 선수에게만 우선권을 부여하여 득점을 인정합니다.
이러한 점수 산정 방식 차이에 따라 각 종목은 확연히 구분되는 양상을 보입니다. 사브르는 공격할 수 있는 방식이 다양하므로 매우 빠른 경기 속도를 자랑합니다. 에페는 공격받을 수 있는 부위가 넓으므로 치열한 견제와 심리전이 특징입니다. 플뢰레는 공격 부위가 가장 좁으므로 화려한 공방이 펼쳐지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세 종목 모두 순간의 방심이 실점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엄청난 집중력과 순발력을 요구합니다.


3. 펜싱과 올림픽
펜싱은 1회 근대 올림픽인 1896 아테네 올림픽부터 정식 종목으로 채택됩니다. 처음엔 남성 선수들만 참가할 수 있었으며 종목 또한 플뢰레 개인전, 플뢰레 마스터즈, 사브르 개인전까지 총 3종목에 불과했지만, 대회를 거듭하며 여러 종류의 방식들이 추가됩니다. 향후 개최될 도쿄올림픽에선 남성과 여성, 에페와 사브르와 플뢰레, 개인전과 단체전으로 구분되어 총 12개의 종목이 치러질 예정입니다.
유럽에서 시작된 스포츠이니만큼 펜싱 강국은 유럽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종주국인 프랑스는 화려한 기술과 기교 위주의 경기 방식으로 펜싱 팬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이탈리아는 힘차고 공격적인 방식의 경기를 즐깁니다. 러시아의 경우 빠른 풋워크를 기반으로 민첩한 움직임을 선보이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밖에 헝가리와 독일 등이 전통적으로 국제대회에서 선전했던 국가입니다.
하지만 현재는 비유럽 국가들의 성장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세계 최강대국의 명성을 스포츠계에서도 뽐내는 미국, 장신 여성 선수들을 다수 보유한 중국, 아마추어 스포츠계의 강자 쿠바 등이 대표적입니다. 우리나라 역시 1964 도쿄올림픽에서 처음으로 펜싱 종목에 참가한 이래로 김영호, 김정환, 남현희, 김지연 등의 선수들이 훌륭한 성적을 거둔 바 있습니다. 특히 2012 런던 올림픽에선 무려 메달 6개를 획득하는 성과를 올렸습니다.


4. 흐르지 않는 1초
펜싱은 오랜 역사를 가진 스포츠지만 전자 장비의 도입 같은 기술적 측면에선 무척 진보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귀족들의 결투 문화에서 비롯된 만큼 운영 부분에선 매우 보수적인 측면 역시 존재합니다. 특히 앞서 말했던 비유럽 국가들의 약진이 이루어진 이후엔 주도권을 양보하지 않으려는 유럽 국가들의 편파적인 판정이 자주 문제가 되곤 합니다. 우리나라 대표팀이 최고의 성적을 거둔 런던 올림픽에서 발생한 희대의 오심이 그 예입니다.
당시 여자 에페 개인전에 참가한 신아람은 세계 랭킹 12위의 강자였습니다. 쾌조의 기세로 준결승까지 진출한 신아람은 독일 선수 브리타 하이데만을 상대합니다. 치열한 접전은 연장전까지 이어졌고 시간이 모두 지나 우선권을 가진 신아람의 승리가 선언되어야 마땅했습니다. 하지만 16살짜리 계시원의 실수, 멋대로 시간을 연장한 심판의 판정이 겹치며 하이데만의 공격이 인정되었고 신아람의 패배가 결정됩니다.
어처구니없는 결과에 신아람은 눈물을 흘렸고 분노한 코치진의 격렬한 항의가 이루어졌지만, 승패는 번복되지 않았습니다. 경기장을 떠나는 순간 판정을 수긍한다는 의미였기에 홀로 2시간을 버텼던 신아람은 너무나도 흔들린 상태였고 이어진 동메달 결정전에서도 아쉽게 패하고 맙니다. 다행히 마음을 다잡은 그녀는 여자 에페 단체전에서 활약, 준우승을 일궈내 한국 여자 펜싱 최초의 메달 획득에 성공합니다.


5. 할 수 있다
대한펜싱협회는 런던 올림픽 이후 신아람 선수의 편파 판정 피해를 정식으로 국제펜싱연맹에 제소했지만, 심판의 권위를 존중하라는 답변만 돌아올 뿐이었습니다. 그나마 구식인 1초 단위 시계 대신 디지털 방식 시간 측정이 도입된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이처럼 런던 올림픽은 펜싱 대표팀과 펜싱 팬에게 영광과 상처가 함께인 대회였습니다. 그러나 4년 후 한 사나이의 선전이 런던에서의 악몽을 지워냅니다.
2016 리우 올림픽 남자 에페 개인전에 참가한 박상영은 청소년 시절부터 촉망받는 유망주였습니다. 세계선수권과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세계 랭킹을 3위까지 끌어올린 그는 올림픽 금메달을 정조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올림픽을 1년 앞두고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큰 부상을 얻은 그는 위기에 놓입니다. 다행히 재활에 힘쓴 결과 국가대표 선발전을 통과할 수 있었고 리우행에 성공하게 됩니다.
세계 랭킹 21위까지 떨어졌고 부상 후유증이 예상되는 박상영은 선전을 거듭합니다. 실력자들을 연거푸 꺾으며 결승 진출에 성공한 그의 앞엔 헝가리의 노장 임레 게저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게저의 노련한 경기 운영에 밀려 10대14, 단 1점이라도 허용하면 패배라는 절체절명의 순간, 박상영은 정신을 가다듬습니다.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한 그는 5점을 연이어 따내는 기염을 토했고 기적적인 역전승을 거두게 됩니다.


6. 후일담 및 근황
박상영의 금메달은 남성 에페 역사상 두 번째로 어린 나이에 거머쥔 쾌거였습니다. 상대였던 게저가 헝가리 최고령 올림픽 메달리스트 기록을 갈아치운 것과 절묘한 대비를 이루기도 했습니다. 두 선수는 단체전 8강에서도 격돌했고 게저는 개인전에서의 패배를 설욕하며 헝가리의 동메달을 이끕니다. 아쉽게도 메달을 추가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박상영의 포기하지 않는 자세는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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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누구나 포기하고 싶을 상황에서 끝까지 용기를 냈던 박상영의 모습은 본받을 만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학우 여러분도 힘들고 지칠 때 “할 수 있다”라고 되새겨 보신다면 생각지도 않은 힘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음 글은 MLB의 필라델피아 필리스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기대해 주세요!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20 15:4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