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서 신라면과 햇반으로 새 해 첫 끼를 때웠다. 한국에서는 정 먹을 것이 없거나 귀찮을 때 먹던 라면이다. 그런데 이 곳에서 라면이 보글보글 매운 내를 풍기며 끓고 있는 장면은 숭고하기까지 하다. 한국을 떠나온 지 벌써 한 달하고도 일 주일째고, 산티아고 순례길은 오늘로 딱 한 달째이다. 본래 세웠던 계획은 오늘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것이었지만 걷다보니 길을 즐기게 되었고 그게 그렇게 중요할까 싶었다.

짐을 싸다가 어제 다친 발목이 시큰했다. 문득 하루 쉬고 싶어졌다. 하루 쉬는 대신 일출이나 보러 나가기로 했다. 이 마을 포르투마린은 꽤 큰 강이 앞으로 멋들어지게 흐른다. 강 너머로 뜨는 새 해 첫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는데 농도 짙은 안개가 내 앞을 막는다. 그 놈의 안개. 이번 여정 처음부터 지금까지 늘 앞을 막던 안개였다. 멀리서 보면 바다지만 마을 전체를 덮는 하얀 벽. 그 벽을 뚫고 나아가는 것이 하루의 첫 일과였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제일 큰 감동을 준 자연은 산도, 평야도 아닌 안개였다. 저 너머로 빛이 조금씩 번져오는 것을 보니 해가 떠오르고 있나보다. 사진 한 장을 찍고 잠시 상념에 잠긴 뒤 다시 숙소로 돌아간다.

숙소로 돌아오니 어제 같이 밤을 보낸 스페인 부부 한 쌍이 짐을 챙겨 나간다. 부엔 까미노 한 마디로 그들을 떠나보내고 이왕 쉬기로 했으니 다시 눕는다. 아침을 먹고도 쉬는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이전에는 쉴 때마저 대도시의 구석구석을 다녀봐야한다는 생각에 아침을 먹고 바로 도시를 둘러보러 나가는 바람에 정작 쉬지는 못했다. 가만히 누워서 오랜만에 찾아온 나태를 만끽한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는 4일 정도 거리가 남았다. 오늘 길을 떠나 4일 후면 완주자의 여유를 즐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산티아고에는 언젠가는 도착할테니 하루를 투자해 또 다른 여유를 즐기는 기분도 나쁘지는 않다.

까미노에는 경쟁이 없다. 첫째가 꼴지가 되고 꼴지가 첫째가 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동시에 첫째도 꼴지도 아무 의미 없는 곳이기도 하다. 뒤처짐은 이 곳에서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팜플로나에서 만난 프레드릭은 어제 벌써 산티아고에 입성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프레드릭과 백 유로 짜리 내기를 한 것도 아니고 굳이 앞서가야 할 이유가 없다.

이곳에 온 뒤로 경쟁에 대한 많은 생각을 했다. 인간은, 아니 모든 생물은 태어나기 전부터 경쟁하며 살아가게 된다. 수억 마리의 정자 중에서 난자에 도착하느냐 마느냐, 젖을 얼마나 더 많이 빨 수 있는가, 누구보다 빠르게 뛸 수 있는가, 이 학교에서 공부를 얼마나 잘 하는가, 누가 더 취업을 좋은 곳에 하는가, 재테크를 얼마나 잘 하는가, 이 모든 것이 그 경쟁의 일부분이다. 이 모든 경쟁에서 도태된 이들은 생존에서도 도태되기 마련이다.

나 역시 경쟁 속에 살았다. 내노라 하는 강사들보다 내가 어떤 장점이 있으며 옆 동에 사는 김 아무개보다 내가 성적을 얼마나 빨리 올릴 수 있을지를 쉴 새 없이 어필하며 살았다. 이를 위해서는 학부모들이 아무리 까막눈일지라도 그들의 시선을 확 잡아챌 수 있는 나만의 무언가가 필요했고 지난 7년 간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내팽개쳤다. 20대가 되고난 후 정말로 하루하루가 지쳤던 삶이었다.

걷기 시작한 이후 처음 며칠 동안은 경쟁하려 했다. 나보다 앞선 사람을 제치는 데에서 쾌감을 얻었다. 나보다 늦게 출발한 사람이 나를 제치면 괴롭기 그지없었다. 이것이 아무 의미가 없음을 깨닫자 이번에는 스케줄에 얽매이기 시작했다. 20km만 가도 되는 날에 50km를 갔다. 남들보다 하루 더 앞섰고 뭔가 해냈다는 성취감에 스스로 뿌듯했다. 그리고 얼마 더 지나자 나는 지치기 시작했다. 빨리 가봤자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경쟁은 피할 수 없는 생명체의 본능이다. 경쟁이 어떤 형태를 취하든 그것은 대개 개체가 생존하여 자신의 유전자를 널리 퍼뜨리는 데에 주력하게 된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경쟁에는 그 나름의 목적이 있기 마련이다. 경쟁에서 열심히 달린 자는 목적을 성취함으로써 보상을 받는다. 다만 내가 이곳에서의 경쟁에 피곤함과 무의미함을 느끼는 것은 경쟁할 이유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이유를 잃어버리는 순간 경쟁은 의미 없는 낭비가 된다.

이 길 위에서는 적게 걷든 많이 걷든 보상이 언제나 마련되어 있다. 지친 하루 끝 따뜻한 숙소와 음식과 그 간의 피로를 날려버릴 향긋한 와인 한 병이 나에겐 그 보상이다. 까미노는 경쟁을 하지 않아도 보상을 받는 곳이다. 추후의 보상을 원한다면 스스로 찾아야 한다. 그러나 그 보상은 빨리 걷는다고, 혹은 여유 있게 걷는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빨리 걸었다면 오 세브레이로의 장엄한 일출을 놓쳤을 것이고 내가 여유 있게 걸었다면 암바스메스따스의 올리 부부를 못 만났겠지. 어쩌면 내가 너무 빨리 걸어서, 혹은 여유 있게 걸어서 놓친 보상이 있을 지도 모른다. 보상은 때때로,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온다.

이 길은 앞다투어 경쟁할 필요가 없기에 더 풍요로워진다. 그러나 만일 내가 돈 한 푼 없이 이 길 위에 섰다면 과연 풍요로웠을까 싶다. 이따금씩 경쟁을 사회악처럼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는 내가 느낀 바가 아니다. 경쟁 없는 삶은 만수르처럼 무척 부유해 경쟁할 가치도 없는 삶이거나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린 삶이다. 피레네의 산맥들이 움직임 없이 평화로워 보이지만 그 속에도 언제나 경쟁이 자리하고 있다. 정신없이 도망가는 쥐와 뒤를 쫓는 길고양이 역시 경쟁의 관계이다. 오히려 이 경쟁은 목숨을 건 경쟁이기에 한국에서의 삶보다 훨씬 치열하다.

경쟁은 목적이 있기에 의미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치는 이유는 언제 이 경쟁이 끝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경쟁은 상대적인 것이기에 남이 하는 것 이상을 해야 보상 받을 수 있다. 한국보다 사회 양상이 십 년 더 빠르다는 일본에서는 프리터 족의 등장이 사회 이슈이다. 정규직을 갖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삶을 이어나가는 사람들이다. 아마 아무리 뛰어도 합당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삶에 지쳤을 것이다. 이 사람들은 그저 하루하루 돈을 벌어 유지하고 취미생활을 해나가는 데에 만족한다. 경쟁을 포기한 이들의 삶은 소박하다. 큰 야망이 없지만 큰 걱정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경쟁을 포기함과 동시에 많은 것을 포기한다. 가정을 꾸리는 것은 물론이고 보통 소유의 대상이 되는 것들을 많이 떨쳐내야지만 영위할 수 있는 삶이다.

하지만 모든 프리터들이 온전히 욕망에서 자유로운 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무언가를 소유하고 있음이 욕망을 뜻하지 않는 것처럼 무욕과 불(不)소유는 서로 동의어가 아니다. 경쟁에서 도태되어 어쩔 수 없이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은 무욕, 무소유와는 거리가 멀다.

마치 상투적인 자소서의 첫 머리처럼 나는 자애로운 어머니와 엄하신 아버지가 계신 행복한 집에서 태어나 대학생 때까지 모자람 없이 자랐다. 대학생 때는 초반에 조금 쪼들렸다. 같은 처지인 후배 한 명과 주머니를 털어 라면 한 봉지를 나눠먹기도 하고 야간 노가다를 뛰고 다음날 수업을 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하던 일이 잘 풀려 이십대 초반을 제외하고는 나름 풍족하게 살았다. 무욕과 무소유에 대해 생각하기에는 소유한 것이 너무 많았던 주제 넘는 삶이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알 수 있다. 내가 무욕했던 시기는 라면 한 봉지를 나눠먹던 그 시절은 분명 아니었다. 무욕을 다시 정의해보았다. 모든 것을 다 가졌던 사람이 그것을 다 잃어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 무욕이고 아무 것도 없던 사람이 온 세상을 가져도 변하지 않는 것이 무욕이라고.

까미노를 걸은 지 오늘로 딱 한 달 째인데 나는 아직도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 사실 일평생 이것을 버릴 수 있을지나 모르겠다. 욕심이라는 것은 버린 줄 알았어도 순식간에 따라와 어느새 고개를 내미는 녀석이다. 다만 예전에는 이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휘둘렸다면 이제는 적어도 욕심의 실체가 보이기 시작한다. 실체가 보이니 잡을 수도 있다. 욕망을 아예 떼어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잠깐 욕망을 내려놓고 걷는 법은 터득해가고 있다. 욕망에서 비롯된 맹목적인 경쟁을 피하고 경쟁의 목적에 대해 잠깐 생각하다보면 본질이 보인다. 그러면 본질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허영된 욕망도 보인다. 남은 것은 벗겨내는 일 뿐이다. 나는 오늘도 순례의 막바지에 다다라서야 조금 더 순례자가 되어간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7 08:2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