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30일 오전에 전국역사학대회 잠시 들렀다 온 학우입니다.

덕분에 공동주제 발표 끝나고 발표장에 어르신들 깽판-_-치는 모습 구경하고 왔는데요.

당시 있었던 발표 중 공유했으면 좋은 글이 있어서 타이핑해서 올립니다.

공주교대 송상헌 교수의「역사교육과 역사학의 거리」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사진은 발표장 인증샷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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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역사학과 역사교과서

역사교과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 사전에 전제해야 할 것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역사교육이 역사적 사실에 관한 지식만을 전하는 교과가 아니라, 역사를 인식하는 과정 자체를 가르치는 교과라는 점이다. 따라서 학생은 교사나 교과서가 가르쳐주는 결과론적 지식을 그대로 배우지 않는다. 역사인식을 교육한다고 하는 것은 특정한 역사인식으로 성립된 역사담론의 내용(플롯)을 심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인식론을 바탕으로 역사를 인식하는 방법 혹은 앎의 과정 자체를 가르치기 때문이다. 이성계는 훌륭한 왕이라고 가르치면 학생은 고려의 역적이라고 배울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역사교육에서 교과서가 성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라는 점이다. 국가 간에 공동교과서를 만드는 목적은 학생들에게 상충하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자료를 제공하려는 것이지, 역사서술의 정전을 제공하여 다른 역사담론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자 함이 아니다. 교과서는 다양한 역사담론을 구성하는 역사 인식을 훈련하기 위한 자료집이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역사교과서는 가방에 넣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판형도 크고 두껍다. 이런 교과서는 교실이나 도서관에 비치하고, 교사가 제공하는 워크시트나 워크북으로 수업할 때 학생들이 참고하는 도서로 활용된다.

교과서가 역사교육에 성전이라고 하는 논리는 교사나 교수학습자료의 역할이 필요없다는 주장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주장이다. '안심하고 읽힐 수 있는 교과서'를 고집하면서 그 교과서를 성전으로 삼아 역사교육을 받은 학생은 교실 밖에서 벌어지는 역사담론 경쟁의 와중에서 전혀 경쟁력도 없고, 역사문식력도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릴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교과서는 역사학과 역사교육의 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역사학계의 입장에서는 학계의 연구성과가 일반 대중의 역사의식 형성에 기여하려면 역사 교육의 근간인 역사교과서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교육은 역사학을 모학문으로 하여 성립된 교과이다. 따라서 역사교육은 당연히 역사학의 연구성과를 도입하여 교육 내용을 구성하게 되고 그 내용은 교과서 형식을 빌려 구체화된다. 이때 교과서에 지식이 서술된다는 것은 연구자의 사적인 역사지식이 공적인 영역으로 변환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역사학의 연구성과는 원래 공적인 영역으로 변환되는 경계가 분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과 자체가 애초부터 주관적인 것이다. 그에 비하면 역사교과서는 객관적이고 공적인 지식을 담아야 하는 역사서술이다. 따라서 주관적이고 잠정적인 역사 지식을 이른바 '교과서적 지식'으로 만들어서 나온 역사교과서는 태생적인 모순의 소산인 셈이다. 이런 모순의 노정이 역사교과서 문제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론상으로 각급 역사교과서는 교육과정에서 요구하는 기본원칙에 따라 구성된다. 그러므로 교과서는 교육목표에 부합하고 학생 활동을 보장하여 다양한 학습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역사적 사고력을 기를 수 있도록 만들어진다. 따라서 기본사실과 학습활동을 위해 선택된 자료집의 성격이 강하다.

문제는 교과서를 위한 역사학의 연구성과는 인식의 과정을 생략한 채, 일반화의 연속적 제시이거나 연관시키기 어려운 사건의 나열로 제공된다는 점이다. 역사학자들이 연구성과를 제시하는 방식도 효율적이지 못하다. 주로 논문으로 연구를 발표하는데 논문은 구체적이거나 특수한 주제들에 관한 것인 경우가 많고 논문들 사이의 연관을 구체화한 연구도 드물다. 진정으로 역사교육에서 필요한 것은 전저(專著, monography)나 어떤 분야나 시대에 대한 광범한 해석서, 논문을 체계적으로 기획하여 편집한 편집서, 시대별 주제별로 정리된 책과 같은 연구성과이다. 그러나 그런 연구성괄르 찾아보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역사학의 연구성과는 별개의 작업을 거쳐야만 교과서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고, 더구나 집필시 성, 계층, 인종, 종교 등에서 비롯한 편견과 이념적 통제까지 개입한다. 과장해서 말하면 이는 역사학이 연구성과를 가지고 교과서에 직접 관여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역사교육은 흔히 청소년에게 '안심하고 읽힐 수 있는 교과서'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물론 바람직한 교과서가 중요하다는 것은 부인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런 교과서는 기대난망이다. 왜냐하면 교과서에 한 가지 훌륭한 역사담론만을 반영할 수 없기도 하지만 훌륭한 역사담론 여부를 평가하고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설정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안심하고 읽힐 수 있는 교과서란 아마도 수많은 사실 가운데 자신의 사관에 맞는 사실만 서술하고 나머지 사실을 지워버린 교과서가 될 것인데, 이는 니체가 지적한대로 자기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역사를 망각하는 전망주의(Perspectivismus)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도모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특정한 사관으로 쓰여진 책은 역사가 개인의 저서이거나 학생이 참고 도서로 읽는 역사 텍스트가 될 수 있을지언정 바람직한 역사교과서가 될 수는 없다.

역사교과서는 인과관계나 관련성을 찾아내어 가능한 역사상을 다양하게 구성해 볼 수 있도록 적절하게 선정된 역사적 사실들을 싣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역사학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관련학자, 교사들이 지혜를 모아 최대한 공약수를 담으려 노력한 끝에 교과서가 탄생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교과서 집필자들은 다양한 역사담론을 구성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과 자료를 집성하려고 노력한다. 이런 역사교과서는 교사의 워크북이나 워크시트를 활용한 수업에 자료집으로 활용될 수 있다. 그럴 경우 역사교과서는 활용 방법에 따라 역사담론 교육의 자료로서 가치가 크다.

현실적으로 역사교과서의 역사관을 문제 삼게 된다면 그것은 이에 대한 적절성 판단의 기준인 아르키메데스적 기점을 찾아내라고 강요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기점은 원론상으로는 찾아내기 어려운 것이지만 통상적으로 역사서술은 통념상 인정받은(accepted) 판단이나 의견으로서, 역사가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널리 인정된 진술이면 된다고 판단한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학계의 관계된 학자들의 합의에 의한 역사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상당수의 역사가들이 타당하고 의미가 있다고 인정하는 절차를 거친 것들이 역사로 서술되면 된다는 것이다.

역사교과서에 대한 최악의 시나리오는 정권의 정치적인 개입이나 이념적 재단이다. 지금까지 인류가 경험한 역사에서 가장 안전하게 역사교과서에 대한 아르키메데스적 기점을 확인하는 방법은 관련 학계의 합의에 맡기는 것이었다. 역사교육을 역사학계에 맡겨서는 안 된다는 발상은 역사교육을 질식하게 만드는 몰학문적 태도이다. 이것이 역사교과서 문제는 철저하게 학문적 토론을 통해 해결되어야 하는 이유이며, 정치적 이해 관계나 이념적 잣대를 들이대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자료집으로서의 교과서를 특정 사관을 가르치기 위해 금과옥조로 여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역사교과서가 역사교육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교사의 역할이고 워크시트 형태의 교수자료이다.

교과서는 교육목적을 위한 것이고 역사가의 단독 저술이 아닌 관계로 일관도니 역사 담론을 제시하기 어렵다. 따라서 교과서는 자료집 성격도 있고, 역사적 사실 위주로 서술되기 마련이어서 교과서에 반영되는 역사담론은 보편적인 것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지금까지 역사교과서는 역사적 사실과 제한적인 역사담론으로 구성되어 왔다. 여기서 교과서의 역사담론은 교육목적상 역사담론 구성을 위한 사실이나 자료 제시 수준에 불과했으며, 만약 학생이 교과서에서 역사담론을 읽어내려면 추론 절차를 거쳐야 구성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오히려 역사담론 교육을 위한 긍정적 장치이며 하나의 역사담론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개방적이라는 의미에서도 교육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역사교과서는 일반인들이나 학생의 입장에서 역사서술을 접하게 되는 통로의 구실을 한다. 그리고 역사학의 연구성과를 반영하는 통로이기도 하기 때문에 역사학과의 소통 통로이기도 하다. 연구자들의 연구가 종합되어 나타나는 것도 역사교과서 서술을 통해서이다. 국내외에서 일어나는 역사분쟁도 교과서 서술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이유는 역사교과서사 국내 정치에서나 국제 정치에서 정치적 헤게모니 싸움의 중요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일반적인 역사교과서 성격에 대한 규정과는 달리, 역사교육 내적 논리로 보면 역사교과서를 바라보는 관점은 대체로 둘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역사교과서를 특정한 역사담론 즉 역사내러티브를 담은 역사텍스트로 보는 관점이다. 역사교과서를 가지고 분쟁을 하는 경우는 대개 교과서가 담고 있는 역사상(역사담론)을 둘러싼 것이다. 이런 분댕의 원인은 사안에 따라 약간의 편차를 갖는다. 이런 점에서 보면 지금까지의 역사교과서 비판은 역사적 사실의 선정을 둘러싼 문제 제기 수준에 불과한 것이 많았다.

역사교육에서 역사상을 둘러싼 분쟁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이른바 '87년 체제'가 성립될 때까지, 역사교육 논란은 국정 교과서의 국가이데올로기 문제가 주류를 이루어 왔는데, 이는 국가주의 역사담론에 대한 학계의 비판이었다.

후소샤 교과서 논란 이전에 교과서 비판은 민주화 운동의 일환으로서 주로 국정제 교과서의 정치적인 국가 이데올로기 비판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1974년 『창작과 비평』에 게재된 국정교과서 비판에서 시작된 이 논의는 실제로 국정교과서가 가진 국가 이데올로기에 대한 문제 제기와 교과서 제도를 검인정으로 환원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주요 논점으로 부각되었다. 이때는 교과서에 서술된 특정한 사건이나 용어, 특정한 왕조나 정권에 대한 평가 등을 둘러싼 다툼이 많았다.

이에 비해 최근에는 역사교과서가 가진 전체적인 역사담론 즉 거대담론을 둘러싼 다툼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일본의 후소샤 교과서나 지유사 교과서의 경우에는 과거의 사례에 비추어 교과서 전체를 관통하는 역사담론이 문제되었다. 국내에서는 2004년에 교과서 파동 이후 교과서 비판은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는 사실 자체를 비판하는 게 아니라, 그런 사실을 엮어서 구성되는 역사담론을 문제삼는 것으로 변해왔다. 최근 국내에서 일어나고 이는 역사담론에 대한 비판은 역사교과서 비판에서 최악의 시나리오에 해당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이유는 교과서의 역사담론 전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주로 가까운 근현대사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고 이는 정권에 의한 정치적 개입의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공유는 현재와 미래 공유의 출발점이다. 어쨌든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역사 분쟁에서 공통의 역사교과서를 발행하기로 합의를 본다면 어떤 시대 어떤 공간의 역사상(역사담론)에 대해 협상을 원만하게 타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컨대 독일과 프랑스가 공통의 역사교과서를 발행하기로 합의를 했다는 것은 적어도 과거와 미래레 대한 역사상에 대한 협상이 타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통의 기구구성이나 공동의 미래에 대한 준비는 공통된 과거 이해 없이는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이 책임은 고사하고 평화와 화해의 가치를 부정하는 역사인식의 저열성은, 동아시아의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어둡게 만드는 일이라고 지적할 수 있는 이유이다.

역사교육을 인식론 교육으로 보게 되면 역사교과서가 하는 역할은 당연히 다양한 담론을 구성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나 사건 등을 담은 자료집이 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교과서에 대한 관점은 서술 내용을 금과옥조로 취급하는 성전적 교과서관을 버리고, 역사서사를 구성하기 위한 자료집이라는 관점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도 자국사든 세계사든 역사 연구가 축적되면서, 역사를 공부하기 위한 자료가 자꾸 늘어나 이제는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현행 교과서 판형이나 두께로는 포괄할 수 없다.

자료집으로서의 역사교과서는 노골적으로 저자의 역사관이나 역사담론을 드러내는 역사텍스트와 다르다. 특정한 역사담론을 담은 역사텍스트는 역사담론 교육을 위해 부교재로 활용할 수 있는 가치가 있을 뿐이다.

역사교육에서 교과서는 다양한 역사담론을 가르칠 수 있는 자료집으로서의 성격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료집으로서의 역사교과서는 역사가의 역사 인식의 과정이 드러나고 추구하는 역사상이 분명한 역사텍스트와 구별되는 것은 당연하다. 앞으로 역사교육에서 자료집으로서의 교과서는 읽기자료로서 역사텍스트가 동시에 활용될 때 그 가치를 발할 것이다. 역사 수업에서 특정한 역사담론을 담은 역사텍스트를 비교할 수 있다면 나름의 역사담론을 구성하는 역사교육에 많은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과정에서 학생과 더불어 역사담론을 통한 인식 교육을 수행하는 교사라는 변수에도 주목해야 한다. 교과서 문제는 역사교육 원론 차원에서 역사 교육의 의미, 학생, 교육 방법, 역사 텍스트, 역사담론 교육, 역사 인식의 교육 등에 대한 새로운 발상을 요구하고 있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6-03 05:18: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