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상의 끝
바이킹, 휘게, 인어공주. 이 단어들을 들으면 떠오르는 나라가 있을 것입니다. 바로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반도에 있는, 바이킹들의 후예인 덴마크입니다. 9~10세기경 크누트 1세에 의해 건국된 덴마크는 580만 명의 인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도인 코펜하겐에는 가족과 친구를 소중히 여기고 소박한 삶의 방식을 의미하는 휘게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이웃과 관광객을 친절히 맞이하고 있습니다.
덴마크는 작은 국토를 가지고 있지만, 걸출한 인물들을 여럿 배출했습니다. 문학의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물리학의 닐스 보어, 천문학의 티코 브라헤, 철학의 쇠렌 키르케고르, 음악의 카를 닐센 등은 각자의 분야에서 상당한 족적을 남긴 이들입니다. 이 밖에도 단순한 장난감 회사를 넘어 철학을 담은 완구 기업으로 성장한 레고 역시 덴마크의 목수 올레 키르크 크리스티안센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영화계는 덴마크가 특히 많은 영향을 미친 분야입니다. 실험적인 명작들을 여럿 제작한 거장 영화감독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누벨바그 영화의 여왕이라 불린 배우 안나 카리나, 항상 논란과 논쟁 가득한 문제작들을 만드는 감독 라스 폰 트리에, 개성 있는 외모와 명품 연기를 자랑하는 배우 매즈 미켈슨 등은 덴마크의 자랑입니다. 인도네시아 학살을 다룬 명작 영화 ‘액트 오브 킬링’을 제작한 감독 조슈아 오펜하이머의 주 활동 무대 역시 덴마크입니다.
2. 대니쉬 다이너마이트
덴마크 사람들은 여러 스포츠를 즐깁니다. 동남아 국가들과 함께 최고 수준의 실력을 자랑하며 경기 규칙 구축에도 많이 이바지한 배드민턴,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서 한국 대표팀을 가로막았을 뿐만 아니라 올림픽 3회 연속 우승을 차지한 핸드볼 등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유럽 전역이 그러하듯 덴마크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누가 뭐래도 축구입니다.
덴마크 축구 국가대표팀은 초창기 올림픽에서 수차례 메달을 거머쥐며 강력함을 자랑했습니다. 비록 프로스포츠로의 전환에 뒤처지며 암흑기를 맞게 되지만, 1979년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된 명장 제프 피온테크의 지휘 아래 유로 1984 4강, 1986 멕시코 월드컵 16강 진출에 성공하며 다시 궤도에 오릅니다. 이 시기 덴마크 대표팀의 공격적인 경기 운영은 덴마크 국민뿐만 아니라 많은 축구팬을 사로잡습니다.
이 시기 덴마크 축구의 전설로 꼽을 만한 선수가 바로 알란 시몬센입니다. 작은 키의 소유자였지만 폭발적인 속도의 드리블을 뽐낸 그는 독일의 보루시아 뮌헨글라트바흐 소속으로 활약했습니다. 당시 독일 분데스리가를 지배하던 바이에른 뮌헨과 ‘황제’ 프란츠 베켄바워의 독주를 저지한 대항마가 바로 시몬센과 뮌헨글라트바흐였습니다. 이후 스페인의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이후에도 활약을 이어간 시몬센은 덴마크 역대 최고의 선수로 꼽힙니다.
3. 역사는 흐른다
1990 멕시코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하며 피온테크 감독이 사임하며 덴마크 대표팀은 10년 만에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새로 선임된 리하트 묄러 닐센 감독은 부상으로 선수 생활을 일찍 마감한 후 젊은 나이부터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덴마크 국내 리그에서 성공을 거뒀을 뿐만 아니라 유소년 국가대표팀을 지휘하며 차후 국가대표의 주축이 될 선수들과의 인연을 쌓은 그는 대표팀 사령탑의 적임자였습니다.
스웨덴에서 개최될 유로 1992를 목표로 닐센호는 돛을 펼칩니다. 하지만 첫 항해에서 풍랑과 암초를 만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까요. 지역 예선에서 북아일랜드와 유고슬라비아에게 연패하며 부진한 것입니다. 이후 경기를 모두 승리했으나 최종순위는 2위였으며 유로 본선 진출에 실패하게 됩니다. 유로 1980 이후 첫 본선 진출 실패에 닐센 감독을 향한 비난은 거세졌고 조기 경질까지 거론되기 시작합니다.
그 순간 역사의 흐름이 덴마크 대표팀의 운명을 뒤흔듭니다. 덴마크를 제치고 지역 예선 1위로 본선에 진출한 유고슬라비아에서 내전이 발발한 것입니다. 강력한 지도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사망과 동유럽 혁명 등으로 인해 억제되어 있던 민족 간 갈등이 폭발한 결과였습니다. 유고슬라비아의 붕괴로 유로 본선엔 공석이 생겼고 그 자리에 덴마크가 대신 들어가면서 극적으로 닐센호의 위기는 일단락됩니다.
4. 세 개의 별
당시 덴마크 대표팀엔 시몬센과 함께 덴마크 역대 최고 선수로 꼽히는 미카엘 라우드루프가 전성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귀신 같은 테크닉과 천재적인 센스, 건실한 체격을 모두 갖춘 미드필더로 소위 ‘드림팀’이라 불리던 바르셀로나의 에이스였던 그는 당대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었습니다. 아쉽게도 라우드루프는 플레이 스타일 차이로 인한 닐센 감독과의 불화로 대표팀 은퇴를 선언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덴마크 대표팀엔 두 명의 기둥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먼저 최전방엔 브리안 라우드루프가 활약하고 있었습니다. 미카엘 라우드루프의 동생인 그는 우아한 기술과 빠른 속도, 훌륭한 득점력을 가졌으며 형 못지않은 훌륭한 선수였습니다. 형과 함께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던 그는 닐센 감독과 극적으로 화해하면서 부상으로 끝내 낙마한 형을 대신하여 조국을 이끕니다.
최후방엔 페테르 슈마이켈이 든든하게 서 있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골키퍼이자 프리미어리그 역대 최고의 골키퍼로 꼽히는 그는 경이로운 선방을 선보이는 선수였습니다. 유럽 내에선 비교적 약체인 브뢴뷔 IF를 UEFA 4강에 진출시킨 1등 공신인 슈마이켈은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부름을 받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로 이적한 상태였습니다. 훗날 그는 눈부신 활약으로 맨유의 트레블에 이바지합니다.
5. 92년의 여름
사실 덴마크의 유로 출전이 확정된 것은 겨우 개막 10일 전이었습니다. 철저한 준비조차 하지 못하고 참가한 데다 자국 최고의 스타가 불참한 대표팀의 선전을 기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상대로 잉글랜드전 1대1 무승부, 스웨덴전 0대1 패배로 비관적인 전망이 현실이 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에릭 칸토나, 장 피에르 파팽, 디디에 데샹, 로랑 블랑 등이 활약하던 프랑스를 2대1로 꺾으며 극적으로 4강 진출에 성공합니다.
승점 1점 차로 간신히 조별리그를 통과한 덴마크의 앞길은 첩첩산중이었습니다. 4강 상대가 ‘오렌지 군단’ 네덜란드였던 것입니다. ‘오렌지 삼총사’ 마르코 반 바스텐, 루드 굴리트, 프랑크 레이카르트는 물론 로날드 쿠만, 데니스 베르캄프, 프랑크 데 부어 등의 선수진은 그야말로 화려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덴마크는 그런 거함을 상대로 대등한 경기를 펼쳤고 2대2 동점인 상태에서 승부차기 끝에 결승에 진출합니다.
모두의 예상을 뒤집고 반전을 거듭한 덴마크의 마지막 상대는 독일이었습니다. 1990 월드컵 우승팀이던 독일 역시 주장 로타어 마테우스, 주포 루디 푈러가 부상으로 빠졌음에도 위르겐 클린스만, 안드레아스 브레메, 위르겐 콜러, 마티아스 자머, 슈테판 에펜베르크 등 스타가 즐비한 팀이었습니다. 하지만 덴마크의 기세는 그야말로 파죽지세였고 2대0 승리를 거두면서 사상 첫 메이저 국제대회 우승이라는 쾌거를 이룩합니다.
6. 후일담 및 근황
이후 덴마크 대표팀은 1998 프랑스 월드컵 8강, 유로 2004 8강 정도를 제외하면 그리 눈에 띄는 성적을 거두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강팀과의 승부에서 더 빛이 나는 덴마크의 경기력은 여전히 많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현재 덴마크 대표팀에는 손흥민의 팀 동료였던 걸로 익숙한 크리스티안 에릭센, 피터 슈마이켈의 아들인 카스퍼 슈마이켈 등의 선수들이 활약하고 있습니다. 덴마크 국민들은 다시금 도화선에 불이 붙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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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https://namu.wiki/w/92년의%20여름
https://www.netflix.com/kr/title/80106989
먼저 덴마크 대표팀의 유로 1992 이야기를 다룬 영화 ‘92년의 여름’을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평가가 괜찮은 영화이니 궁금하시면 한 번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유로 1992가 끝난 후 발표된 대회 베스트 11 명단에서 슈마이켈과 라우드루프를 제외한 모든 선수가 덴마크의 상대였던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선수들이었습니다. 덴마크의 우승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2002년에 환호했던 이유 역시 강팀들과의 승부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에 덴마크 국민이 느꼈을 희열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봄비가 내리는 아침에 글을 쓰며 문득 18년 전의 열기가 떠오르게 되네요. 다시금 전국이 뜨거워질 수 있는 기분 좋은 대형 사건이 생기길 바랍니다. 다음 글은 농구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기대해 주세요!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6-13 18:4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