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느린 것은 부드러운 것이고 부드러운 것은 빠른 것이다
두 거한이 서로의 옷깃을 부여잡고 힘과 기술을 겨룹니다. 팽팽한 승부 속 찰나의 빈틈은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옵니다. “한판!” 순식간에 상대를 메쳐버린 승자에게 심판의 우렁찬 선언은 감격 그 자체입니다. 경기를 마친 후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서로에 대한 예의를 잊지 않는 두 선수에게 관객들은 힘찬 박수와 응원을 보냅니다. 고요함과 격렬함을 동시에 갖춘 무술. 유도를 설명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표현입니다.
유도는 1882년 일본 무술가 가노 지고로가 창설한 강도관 유술을 기원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러 무술을 익힌 가노는 유연한 철학의 소유자였으며 다양하고도 실용적인 기술들을 조합하여 새로운 무술을 개발합니다. 이후 대련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위험한 기술들을 봉인하고 유도를 스포츠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가노는 1909년 아시아인 최초의 IOC 위원으로 선정되었고 유도 또한 1964년 도쿄 올림픽부터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됩니다.
최근 현대 격투기의 기본이자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브라질리언 주짓수 또한 유도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가노의 제자였던 유도가 마에다 미츠요는 유도의 우수함을 전파하기 위해 세계를 여행하다 브라질에 정착하게 됩니다. 마에다는 친분이 있던 그레이시 가문 사람들에게 유도를 전수했고 그 중 허약한 신체를 가졌던 엘리오 그레이시의 활약이 알려지면서 그레이시 주짓수, 즉 브라질리언 주짓수가 이름을 떨치게 된 것입니다.
2. Global Judo
앞서 말했듯이 유도의 발상지인 일본은 종주국 지위를 굳건히 하고 있습니다. 국제대회에선 유도의 점수 체계인 ‘한판’, ‘절반’, ‘지도’ 등을 ‘잇폰’, ‘와자아리’ ‘시도’ 등의 일본식 발음으로 사용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심지어 유도계에 미치는 일본의 영향력 때문에 때때로 일본 선수에게 유리한 판정이 주어진다는 비판도 있을 정도입니다. 2016 리우 올림픽에서도 일본은 금메달 3개, 은메달 1개, 동메달 8개를 따내며 위상을 공고히 했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역시 유도 강국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1909년 YMCA에 의해 처음 유도가 전파된 이후 꾸준히 보급된 결과 엘리트 체육, 생활 체육 모두 상당한 실력과 기반이 다져졌습니다. 대한민국은 일본식 용어를 모두 자국의 언어로 바꾼 소수의 나라이기도 합니다. 비록 리우 올림픽에선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에선 금메달 4개와 은메달 6개, 동메달 3개로 일본을 바짝 추격했습니다.
이 외에도 다양한 나라들이 유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예로서 100kg 이상 체급에서 세계랭킹 1위를 차지한 테디 리네르 등의 강자를 보유한 프랑스, 유도로부터 국기인 삼보가 유래된 러시아, 여성 선수들의 활약이 눈에 띄는 중국, 강골의 장사들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 몽골 등이 있습니다. 이처럼 유도는 단순히 일본에 한정된 것을 넘어 세계가 주목하는 스포츠라 할 수 있습니다.
3. 한국 유도의 명암
1964년 첫 올림픽 대회에서 당당히 동메달을 차지하며 한국인 첫 유도 메달리스트가 된 김의태를 비롯하여 수많은 선수가 올림픽 무대에서 명성을 떨쳤습니다. 1984 LA 올림픽에서 첫 유도 금메달을 따낸 안병근,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여성 선수 첫 메달이자 첫 금메달을 따낸 김미정, 1972 뮌헨 올림픽에서 한국 대표팀의 유일한 메달을 따낸 오승립 등은 올림픽 유도 역사의 선구자라 할 수 있습니다.
이후 1984 LA 올림픽의 하형주, 1988 서울 올림픽의 김재엽과 이경근,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의 전기영과 조민선,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의 이원희,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의 최민호, 2012년 런던 올림픽의 김재범과 송대남 등이 금빛 물결을 이어나갔습니다. 그 밖에도 곽동한, 김민수, 안바울, 왕기춘, 장성호, 정보경, 정훈, 조준호 등이 올림픽 메달을 수확하며 국민들에게 감동과 자부심을 선사했습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이라고 했나요. 거듭된 올림픽에서의 호성적과 엘리트 선수들의 배출은 특정 대학교 출신 인물들의 파벌화를 불러왔고 그 결과 유망한 선수들이 눈물을 삼키는 일도 생겼습니다. 추성훈이란 이름으로 잘 알려진 종합격투기 선수 아키야마 요시히로, ‘Mr. 암바’로 불릴 정도의 실력과 ‘비운의 유도왕’으로 불릴 정도의 불운을 가진 윤동식 등이 대표적인 희생양으로 꼽히곤 합니다.
4. 사랑의 불시착
이창수는 북한 유도계의 스타였습니다. 8년 동안 무려 17개의 국제대회 메달을 따내며 공훈체육인 직위까지 오를 정도의 실력자였던 그는 한 번의 패배로 모든 것을 잃습니다.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 결승에서 한국의 정훈에게 패하며 은메달에 그친 이창수는 삼진탄광으로 끌려가 고된 노동에 시달립니다. 거기에 훈련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며 대표팀 식당 보일러 관리라는 잡무를 떠맡기도 합니다.
독재와 폭정을 일삼는 북한 정권에게 국제대회 패배, 그것도 대한민국을 상대로 한 패배는 반역이나 마찬가지. 하루아침에 바닥으로 떨어진 이창수를 구한 것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훌륭한 실력의 소유자였던 그에게 호감을 느낀 대만 유도 대표 진영진은 국제대회에서 만날 때마다 선물을 주곤 했습니다. 직접 대만에 유학 온 한국 학생에게 한국어를 배우면서까지 말을 걸어오는 그녀는 모두에게 고립된 이창수에겐 한 줄기 햇볕처럼 따스했습니다.
애틋한 사랑을 키워가던 두 사람이었지만 감시와 통제가 일상인 북한 생활을 연인에게까지 경험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이창수는 인생 최대의 한판을 따냅니다. 1991 스페인 유도 세계선수권에 참석하기 위해 타고 가던 기차에서 뛰어내린 후 한국 대사관으로 달려가 망명 신청을 한 것입니다. 이후 대만 언론을 통해 이창수의 소식을 알게 된 진영진이 혈혈단신으로 한국에 들어왔고 마침내 두 사람의 사랑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5. 세계를 메치다
이문진은 영화 같은 사랑 이야기의 두 주인공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유도 국가대표인 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체조건에 아버지와 장난치며 자연스레 습득한 기술까지 모두 갖춘 그는 될성부른 떡잎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재학 중에 이미 여러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낸 이문진에게 명문대 입학 기회는 자연스러운 보상이었습니다. 그가 미래에 걸어갈 길은 누가 봐도 탄탄대로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운명은 언제나 시련을 동반하는 것일까요. 고등학교 졸업 이후 오른쪽 발목에 고질적인 부상을 얻게 된 이문진은 김재범, 왕기춘 등 쟁쟁한 선배들의 벽에 가로막히게 됩니다. 국가대표 선발 문턱에서 번번이 좌절하며 한 번도 국제대회에 나서지 못했던 그는 유망주 딱지를 떼지 못했습니다. 실적이 없다는 이유로 대학 졸업 후 입단을 약속한 실업팀이 계약을 거부하면서 이문진은 은퇴까지 고민하게 됩니다.
그런 그에게 손을 내민 이는 2008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최민호였습니다. 신생팀 블루나눔필룩스의 감독을 맡은 그는 이문진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가르쳤습니다. 다시금 도약의 계기를 마련한 이문진은 이내 국제대회 출전 기회를 거머쥡니다. 첫 국제대회인 아부다비 그랜드슬램에서 세계랭킹 4위, 6위 등 손꼽히는 실력자들을 모두 제압하고 금메달을 얻은 이문진의 세계랭킹은 406위였습니다.
6. 후일담 및 근황
무명의 유망주에서 국제대회 우승자로 당당히 탈바꿈한 이문진의 다음 목표는 올림픽입니다. 부모님조차 손에 넣지 못했던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자신의 이름을 떨치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며 세계랭킹 38위까지 올라간 그에게 출전 자격이 주어지는 28위는 그리 멀지 않습니다. 아버지 이창수 역시 대표팀 트레이너로 이직하면서 함께 뭉친 그들에게 올림픽의 신은 머지않아 미소를 지어줄 것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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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28662&code=12160000&cp=nv
우선 이번 글을 쓰면서 많은 참고가 되었던 인터넷 기사 주소를 첨부합니다. 이문진 부자의 이야기를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시면 읽어보시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매우 오랜만에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와 게으른 천성 때문에 스스로 합리화하며 차일피일 미루었던 점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1주일에 1편씩 꾸준히 글을 올리려고 마음먹었습니다.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항상 격려의 댓글을 달아주시는 학우 여러분에겐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앞으로도 언더독들의 통쾌한 업어치기를 재밌게 다루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다음 글은 야구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기대해 주세요!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18 21:11:5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