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 미국을 울린 행복한 만남
산드라 블록은 미모와 연기력을 겸비한 배우이며 많은 작품에서 호연을 펼친 바 있습니다. 젊은 분들은 우주에서의 사투와 생존을 위한 의지를 그려낸 ‘그래비티’와 미지의 존재에 대한 공포를 다룬 ‘버드 박스’를, 내공이 쌓인 분들은 긴박한 액션으로 가득한 ‘스피드’와 달콤한 사랑 이야기인 ‘당신이 잠든 사이에’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여러 작품 중에서도 ‘블라인드 사이드’는 그녀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 주었습니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미식축구를 소재로 삼았습니다. 산드라 블록이 연기한 리 앤 투오이는 부유한 사업가인 남편, 학교 치어리더인 딸, 장난기 많은 아들과 함께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가족 모두가 미식축구 열혈 팬인 투오이 가족은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불우한 가정 형편의 마이클 오어를 만납니다. 아낌없는 사랑과 지원을 보낸 투오이 가족 덕분에 오어는 자신의 재능을 만개하고 NFL에 데뷔하게 됩니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실화를 기반으로 쓰인 책을 원작으로 삼았습니다. 실제로 오어는 인종과 계층의 벽을 뛰어넘은 유대를 맺은 가족 덕분에 프로 선수로 데뷔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슈퍼볼 우승을 차지하기도 합니다. 따뜻한 기적의 주인공인 오어를 신인 드래프트에서 지명한 구단이 이번 글의 주인공입니다. 바로 비운의 천재 문인 에드거 앨런 포의 대표작 ‘The Raven’에서 이름을 딴 볼티모어 레이븐스입니다.


2.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표가 난다
1996년 창단된 레이븐스는 사실 사라진 역사가 있습니다. 레이븐스의 전신은 1946년 창단된 클리블랜드 브라운스입니다. 80년대 후반 우승 후보로 거론되었던 브라운스였지만 석탄 산업을 기반으로 한 클리블랜드의 재정은 나빠지고 있었습니다. 한정된 지원은 당시 인기를 끌던 MLB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위주로 주어졌습니다. 반면 노후화된 경기장을 대체하고자 했던 브라운스의 신축 요청은 번번이 거부됩니다.
불만을 품고 있던 브라운스의 구단주 아트 모델은 극비리에 연고 이전을 감행합니다. 마침 지금의 인디애나폴리스 콜츠가 1984년 야반도주하는 사건을 겪은 볼티모어가 최신 경기장을 약속합니다. 갑자기 벌어진 사태에 클리블랜드와 브라운스는 법정 다툼을 벌입니다. 결국, 모델 구단주가 브라운스의 역사와 명칭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사태는 일단락되었고 구단은 레이븐스라는 이름의 신생팀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비록 콜츠도, 브라운스도 아닌 새로운 구단이 된 레이븐스였지만 볼티모어 팬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게 됩니다. 이미 자신들의 팀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기에 더 간절했던 볼티모어 시는 약속대로 이전한 지 2년 만에 신식 경기장을 지어줍니다. 1998년 개장되어 지금까지 홈구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M&T 뱅크 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팬들의 응원에 힘입어 레이븐스는 우승을 향해 달려나가기 시작합니다.


3. 또 다른 감동 실화
강호의 자리로 올라서던 레이븐스의 중심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1996년 신인 드래프트 1라운드 26순위로 데뷔한 레이 루이스입니다. 앞서 언급한 영화의 주인공이자 훗날 자신의 후배로 입단할 오어처럼 루이스 역시 어린 시절 많은 고난을 겪은 바 있습니다. 플로리다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친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른 채 유년기를 보낸 것입니다. 하지만 루이스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를 학대하는 양아버지를 막기 위해 트럼프 카드를 뽑아 나온 숫자만큼 팔굽혀펴기하며 단련한 그의 신체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강건해졌습니다. 미식축구 명문인 마이애미 대학교에 진학한 루이스는 신입생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주전을 차지합니다. 곧 전미 최고의 유망주 중 하나로 성장한 루이스는 레이븐스의 지명을 받습니다. 그의 등번호는 트럼프 카드의 장수인 52였습니다.
그의 포지션인 라인배커는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는 역할을 맡습니다. 아픈 과거로 다져진 근육에서 뿜어져 나오는 루이스의 힘은 철벽 수비를 자랑했습니다. 힘뿐만 아니라 지능적인 플레이까지 겸비한 그는 상대 선수를 쓰러뜨린 후 맹수처럼 포효하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뛰어난 경기력과 리더십을 선보이는 루이스는 곧 레이븐스를 넘어 NFL을 대표하는 스타로 성장하게 됩니다.


4. 공격은 관중을 부르고 수비는 승리를 부른다
2000/01시즌 레이븐스는 그야말로 통곡의 벽이었습니다. 루이스를 필두로 샘 애덤스, 로드 우드슨, 제이미 샤퍼 등의 선수들이 구축한 수비진이 최소실점과 최소 러싱야드 허용을 기록한 것이었습니다. 레이븐스는 초라한 공격 때문에 좋은 성적을 내기 어렵다는 평가를 강력한 수비로 뒤집어버리며 12승 4패를 거둡니다. 와일드카드 자격으로 어렵사리 얻은 플레이오프 기회는 이윽고 멋진 결과를 불러옵니다.
레이븐스는 덴버 브롱코스와의 와일드카드전, 테네시 타이탄스와의 디비전 플레이오프전, 오클랜드 레이더스와의 컨퍼런스 챔피언십전을 모두 승리합니다. 3경기 합쳐 단 16점, 특히 타이탄스와의 경기를 제외하면 경기당 3점씩만 내준 짠물 수비는 강팀들과의 일전에서도 빛났습니다. 거기에 공격진에서 홀로 빛나던 신인 자말 루이스의 활약이 더해지면서 레이븐스는 창단 첫 슈퍼볼 진출에 성공합니다.
슈퍼볼 상대는 불꽃 같은 공격을 자랑하는 뉴욕 자이언츠였습니다. 정반대인 성격을 가진 두 팀의 격돌이지만 수비도 수준급이었던 자이언츠의 우세가 점쳐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레이븐스의 저력은 얕볼 수 없었습니다. 각각 수비와 공격의 기둥이었던 레이 루이스와 자말 루이스, 깜짝 활약을 보여준 저메인 루이스까지 3명의 루이스들의 활약에 힘입어 34대7로 승리한 레이븐스는 창단 첫 우승을 거머쥐게 됩니다.


5. 행복한 결말
레이븐스는 이후에도 꾸준히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공격의 부실함은 고질적으로 발목을 잡았습니다. 우승의 추억이 어느덧 희미해져 가던 2012년 레이 루이스의 은퇴 선언이 발표됩니다. 슈퍼볼 MVP를 차지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살인죄 혐의로 고초를 겪은 후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어 꾸준히 최고의 자리를 유지한 전설. 레이븐스는 17년간 팀을 지켜온 그의 마지막 시즌이 될 2012/13시즌을 화려하게 장식하고자 했습니다.
그해 플레이오프는 말 그대로 별들의 잔치였으며 특히 쿼터백 스타들의 위세가 대단했습니다. 여러 번 언급된 바 있는 최고의 쿼터백들인 톰 브래디와 페이튼 매닝을 포함해 정상급 기량을 보인 3명의 신인 앤드류 럭, 로버트 그리핀 3세, 러셀 윌슨, 그리고 훗날 국가 연주 중 무릎 꿇기로 화제가 된 콜린 캐퍼닉 등이 명성을 높입니다. 반면 레이븐스의 쿼터백 조 플래코는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플래코는 놀랍게도 엄청난 경기력을 선보였으며 레이븐스는 구단 역사상 2번째 슈퍼볼 진출에 성공하게 됩니다. 상대는 레이븐스를 이끄는 존 하버 감독의 동생 짐 하버가 지휘하는 명문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 하버 형제의 격돌 때문에 ‘Harbowl’이란 별명을 붙여진 47번째 슈퍼볼에서 난타전을 펼친 끝에 레이븐스는 34대31로 승리합니다. 두 기적의 주인공 루이스와 오어는 함께 우승을 만끽합니다.


6. 후일담 및 근황
마이클 오어는 이후 타이탄스를 거쳐 캐롤라이나 팬서스로 이적해 2015/16 슈퍼볼 준우승을 거둔 후 은퇴합니다. 레이븐스는 루이스의 은퇴 이후 플레이오프 진출을 여러 번 실패하며 잠시 부진합니다. 하지만, 라마 잭슨이라는 새로운 쿼터백이 등장하며 공격적인 구단으로 변모하는 데 성공합니다. 2019/20시즌 현재 MVP 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한 잭슨의 활약에 힘입어 레이븐스는 12승 2패로 이미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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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늦은 연재 죄송합니다. 연말이라 그런지 바쁜 일이 연달아 생기네요. 다시 꾸준히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마 이번 글이 고정적으로 올리는 마지막 미식축구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공이 부족한지라 계속 정기적으로 쓰는 것이 무리로 느껴지네요. 그래도 잊을만하면 한 번씩 NFL 이야기도 돌아올 테니 지켜봐 주세요. 다음 글은 유도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기대해 주세요!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4 05:5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