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미노에 작별을 고한지 어느덧 일 주일. 나는 다시 까미노를 걷게 되었다. 파티마에서는 코임브라까지만 걸어볼까, 코임브라에 있을때는 포르투까지만 걸어볼까 하는 생각이 있었지만 이렇게까지나 갑자기 걷게 될지는 그 누구도 상상조차 못했을 일이다.

코임브라에서 바로 포르투로 올라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여행 첫 시작부터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 중간지점인 아게다에 계시다길래 한번 뵙고싶어 중간에서 하루 묵었다. 12월 까미노 톡방 중 제일 먼저 까미노를 걷기 시작하셨고 피스테라에서 멈춰버린 내 여정과는 달리 산티아고에서 피스테라와 묵시아까지 가셨다가 지금은 포르투갈 남쪽 라고스까지 걸어가시는 분이다. 엊저녁에 함께 와인 한 잔을 하고 아침에 일어나 각자 가야할 곳으로 갔다. 나는 오후 1시에 아게다에서 포르토로 향하는 버스를 탈 예정이었고 그 분은 일찌감치 떠나셨다.

아게다를 벗어나는 다리 중간에서 작별을 하고 다리를 되건너오는데 익숙한 조개표시와 노란 화살표가 보인다. 까미노를 떠난 지 꽤 시간이 지났지만 잊을 수 없는 표시다. 오랜만에 까미노 표시를 보니 가슴이 두근대었다. 결국 남은 시간동안 마을을 돌기보다는 표시를 따라 되는 대로 걸어갔다가 버스 시간에 맞추어 돌아오기로 했다.

늘 입던 등산바지 대신 청바지를 입었고 스틱은 짚지 않았다. 까미노를 걷지 않은지 2주도 채 안 되었지만 마음만은 십년 만의 귀향 같았다. 마을을 빠져나가 다시 자연을 마주했다. 30분쯤 걸어 마주한 포장되지 않은 오르막을 오르고는 땀을 닦으며 한숨 돌렸다. 걷지 않던 10여일 동안 슬슬 지루함을 느껴가던 차였다.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바람은 시원하게 불고 심장은 미친듯이 뛰며 근육들에는 힘이 다시 솟구친다.

물 한 모금을 마시다가 문득 버스 시간을 다시 확인해보려고 핸드폰을 보았다. 알베가리아. 1시 출발.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다시 핸드폰을 보았다. 분명히 아게다에서 1시에 출발한다고 적혀있어야 했을 티켓에는 알베가리아라는 마을에서 1시에 출발한다고 적혀있었다.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서둘러 다시 아게다에서 포르토로 출발하는 티켓을 검색해보았지만 일요일이라 그런지 버스도 기차도 전혀 없었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보고 예매를 했던 것인가 싶어 허탈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어쩌겠나. 그리고는 알베르가리아는 어디쯤 있나 지도를 보았다. 알베르가리아는 아게다에서 15.8km 가량 북쪽으로 떨어진 마을, 내가 있는 지점에서는 12.5km만 더 위로 걸어가면 만날 수 있는 마을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산티아고 순례길 중 포르투갈길을 걷게 된다면 아게다 다음에 묵게 될 마을이다.

한참 동안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제 완전히 끝이라고, 다시 걷는다고 해도 몇 년 후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리 도망가도 나는 이 길을 벗어날 수 없었나보다. 오늘 내가 어차피 떠나야 하는 도시와 가야 하는 도시가 모두 까미노 위에 있었다.

결국 걷기로 했다. 3km를 되돌아가 택시를 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걷기로 했다. 잠결에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버스를 예약해버린 실수 하나 덕분에 까미노를 다시 걷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까미노의 많은 날처럼 오늘도 오르막은 힘들고 길은 고요하고 하늘은 파랬다. 까미노를 떠난 이래 나는 계속 까미노 블루를 느끼고 있다, 나는 더 걷고 싶다 외쳐댔고 그에 대한 응답을 받았다. 까미노를 걷던 그때처럼 하루에 30km 가까운 거리를 걷지는 않았지만 그만으로도 충분했다. 까미노 위에 있을 때는 종종 거리에 집착하곤 했다. 중요한 것은 거리도, 속도도 아니었다. 제일 중요한 것은 까미노를 걷는 마음 그 자체였다. 혹시나 너무 빨리 걷지는 않을까 우려하며 아껴걷던 마지막 피스테라길에서조차 나는 묶여있었다. 오늘은 빠름에 대한, 그렇다고 느림에 대한 집착도 없이 그 어느때보다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걷다보니 두 시간 반이 훌쩍 지나 알베르가리아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 근처 카페에서 에그타르트 두 개와 에스프레소로 여유롭게 점심을 때웠다.

버스를 타고 지나가는 들판을 바라보았다. 이제 마음 속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까미노에 대한 아쉬움도, 저 길을 걸었어야 하는데 하는 죄책감도, 걷고 싶다는 욕망도 모두 길을 걸으며 스러져갔다. 모든 집착이 스러지자 그저 빠르게 스쳐가는 들판 위에 떠있는 해와 빨간 지붕을 가진 조그만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포르투갈의 시골 마을이 얼마나 예쁜지에 대한 감상과 행복만이 남았다.

느림은 느림의 미학이 있다. 빠름은 빠름의 미학이 있다. 거북이에게 너무 느리다고, 치타에게 너무 빠르다고 타박할 수 없다. 인생을 빠르게 달려가는 이들에게 조금 쉬어가라고, 천천히 사는 이들에게 왜 이렇게 느적대냐고 일침을 가하는 것도 옳지 않다. 슬로우 라이프가 트렌드가 되어버린 이 시대에 자신이 너무 빠르다고, 혹은 빠르게 돌아가는 이 세상에서 자신이 너무 느리다고 자책할 필요도 없어보인다. 다만 살다가 가끔씩 질문 몇 마디 던져보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 "내 인생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과연 행복한가."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17 01: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