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플 조별 구성도 마무리 지었고 이제 시작만 하면 되겠죠? 오늘 경제통계학 강의는 여기까지!”

그동안 머릿속으로 구상해 온 강의 내용을 완수한 것에 대한 뿌듯한 마음을 가득 담은 교수의 목소리로 화요일 오전 9시부터 시작했던 강의는 그렇게 끝이 났다. 교수의 의도적인 배려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존보다 강의가 50분정도 일찍 끝났기에 학생들에게 다음 4교시(12시) 수업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강의를 듣던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수업 때 마무리 지은 조별 구성을 바탕으로 옹기종기 자신이 해당하는 팀원들이 있는 곳으로 모여들었다. 이윽고 강의실은 저마다 자신들이 앞으로 해야 할 팀플 과제에 대한 이야기들로 시끌시끌해졌다. 경제학과 3학년 학부생인 한동주도 그러한 사람들 중의 한 명이다. 그에게 있어서 이러한 팀플은 한숨 나오는 일이다. 왜냐하면 사람들과 협력해서 목적을 달성해해야하는 팀플 과제의 특성 상 이것저것 서로에게 신경을 써야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 강의의 팀플은 학교 재학생들을 모집단으로 설정하고 단과대와 성비 들을 고려해서 표본을 추출한 후, 이에 대한 분석을 요구하고 있다. 거기에 보고서와 발표는 당연히 기본이었다. 이러한 팀플은 특히 설문조사부분에서 구성원간의 협력이 없으면 수행되기 힘든 것이다. 동주는 경제학과 전공이 그 학문 특성상 팀플이 없는 경우가 많아서 좋은데 왜 이 경제통계학이라는 강의는 쓸데없이 팀플이 있는 건지 불만스럽기만 했다. 더 나아가서 경제통계학이라는 강의에서 경제가 아닌 통계학만을 위해 굳이 설문조사 팀플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영 유쾌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 쪽으로는 팀플만 제외하면 참 여러모로 괜찮은 강의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감수하자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또 다시 생각해보면 팀에서 자신을 제외한 총 4명의 구성원들이 다 모르는 사람들이기에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런 불안한 마음은 올해 여름 수강신청 때에 친구들이랑 같이 신청했어야 하는 뒤늦은 후회까지도 몰려들게 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이러한 생각들이 경제학도로서 볼 때 현 상태를 더 좋게 바꾸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비 생산적인 일련의 과정으로 여기려는 나름의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로 했다.

동주가 이런저런 생각으로 갈피를 잡지 못할 때에 구성원 중의 한 여자의 목소리가 동주의 귀에 들어왔다.

“일단 간단하게 서로 소개를 마쳤으니까, 설문조사 주제 좀 정해볼까요?”

또박또박하고 전달력 있는 그녀의 목소리는 팀 구성원들의 시선들을 한 번에 자신에게로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레이저를 쏘는 듯한 눈빛으로 주변을 바라보던 그녀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아끼고 싶은 모양새였다. 어지간히 창백해 보이는 얼굴에 은은한 갈색빛 단발머리를 지닌 그녀는 주변 구성원들로 하여금 말 한 마디로 분위기를 주도할 것 같은 강인한 인상을 지녔다. 동주는 ‘저 여자 이름이 김지연이었지’라고 되뇌면서도 감정적으로 무언가 재수 없게만 느껴졌다. 그녀의 기운이 자신을 억누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동주는 자연히 김지연이란 여자를 드세고 독단적이지만 그것을 스스로 쿨한 성격으로 여기고 자기합리화로 포장하는 사람으로 이해하였다. 그런 와중에 서윤은 주제가 친숙하고 재밌으면 좋을 것 같다면 전에 없었던 혁신적인 의견인 것처럼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녀는 이 강의의 유일한 새내기 학번으로 한참 정공 필수와 교양강의를 들어야 될 때에 겁 없이 학수번호가 높은 본 전공 선택과목을 수강신청한 사람이었다. 지연은 그런 서윤의 배경을 간파한 듯, 그건 다 아는 사실이라며 추상적이고 당연한 이야기가 아닌 구체적인 주제를 제시해야 한다는 말로 단숨에 서윤의 이야기를 정리하였다. 동주는 그런 서윤을 보면서 수영도 못하는 어린 아이를 바다 한 가운데에 던져놓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안쓰럽게 느껴졌다. 이때 현우가 커플과 솔로에 대해서 주제를 잡고 구체화 시켜보자는 제안을 하였다. 그의 제안에 현승이 격하게 동감하는 반응을 취함으로써 팀의 분위기는 현우가 제안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동주도 이런 분위기에 대해 커플과 솔로에 관한 이야기는 혈기왕성한 20대 청춘 남녀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만한 소재이니까 나쁘지 않다고 판단하였다. 서윤은 이 주제에서 구체화를 시키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의견을 묻던 도중, 현승이 자신의 핸드폰 시계를 한 번 확인하더니 갑작스럽게 책상에 두었던 자신의 가방을 정리하고 어깨에 멨다.

“이야기하는데 죄송하지만, 구체화 부분은 다음 모임 때 논의하도록 하죠.”

현승은 이에 지연이 무슨 말을 꺼내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지 연이어서

“대신에 다음 모임까지 각자 어떤 내용을 설문조사할지 구상 해오는 걸로. OK? 제가 지금 바로 다른 전공 수업이 연강으로 있어서 지금 가봐야 할 것 같네요.”

라며 사람 좋아 보이는 눈웃음을 지어주면서 인사를 하고 강의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지연은 당황한 듯 발걸음을 재촉하던 현승을 다급하게 불렀다.

“잠깐만요, 다음 모임은 언제…” -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동주는

“이따 저녁 6시 이후에 카톡 방 만들어서 이야기하면 되죠 뭐.”

라며 그녀가 서윤에게 했던 것처럼 자신이 그녀의 입을 다물게 하였다. 더 나아가서 그는 그녀가 다른 말을 꺼내지 못하도록 구성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눈을 마주치면서 자신에게 집중하도록 쉬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카톡 방 개설은 사람들 잘 리드하는 지연씨가 만들어서 초대하면 되겠네요. 기본적인 연락처는 아까 처음에 소개할 때 서로서로 다 주고받았으니까 문제없을 거구요.”

동주는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주면서 그녀를 살짝 띄워주는 어조로 이야기를 지속했다. 은연중에 그녀의 입술이 무언가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들자, 그는 조금이라도 빨리 오늘 모임을 마무리 지을 필요성을 느꼈다.

“오늘 이야기는 이미 지금 현승씨가 갔으니까 더 이야기하는 건 무리인 것 같으니 나머지는 이따가 카톡으로 합시다. 다들 괜찮죠?”

완벽했다. 동주가 보기에는 지연을 제외한 서윤과 현우가 동주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수긍하는 눈빛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자연스럽게 팀 구성원들의 합의를 얻어냄과 동시에 모든 일이 깔끔하게 정리가 된 것 같아서 기분 좋은 성취감도 느껴졌다. 이제 나머지 그 귀찮은 뒷일은 지연이 알아서 할 일이다. 이윽고 서윤과 현우는 동주가 느낀 그대로 동주의 의견에 별 말 없이 동의하였고, 서로 수고했다며 인사를 나눈 후 각자 자신의 짐을 챙겨 강의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지연은 갑작스럽게 주어진 자신의 일과 그에 대한 책임감에 매우 당황하였는지, 한 동안 아무 말 없이 초점 잃은 눈동자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동주는 그런 그녀를 뒤로하고 가벼운 인사를 건넨 후 강의실의 문을 열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따 저녁 때 연락드릴게요. 고생하셨어요.”

그녀가 동주의 의견에 수긍하는 순간이었다. 동주는 자신의 의도대로 일이 진행되는 이 상황들과 자신의 귀에 들려오는 그녀의 순종적인 목소리에 만족감으로 절로 입에 미소가 번졌다. 동주는 뒤돌아서 다시 한 번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주고 그 공간을 빠져나왔다.

서쪽 끝의 해가 산을 이불삼아 스스로를 덮기 시작할 때에 즈음이었다. 10월 중순의 따뜻했던 공기는 언제 있었냐는 듯 사라져가고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동주는 버스 안 창가에 앉아 스마트폰의 이어폰으로 MP3을 들으며 바깥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시의 건물들과 그 주변에 도보를 걷는 사람들, 그리고 도로의 수많은 자동차들은 그의 눈동자를 순식간에 통과해나갔다.

“킁. . .킁. . .아 망할 비염. . .”

어김없이 환절기만 되면 이따금씩 동주에게는 비염증상이 나타났다. 비염으로 인한 코막힘 및 콧물 증상은 자신의 코를 잘라버리고 싶을 정도로 동주를 굉장히 답답하고 괴롭게 하곤 했다. 이럴 때에는 코가 꼭 살아있는 것처럼 창밖이나 다른 곳에 신경 쓰지 말고 자기한태만 관심 좀 가져달라고 말하는 것 같아 머리가 종종 아팠었다. 이 불쾌한 녀석 때문에 동주가 바라보던 창밖의 사람들과 각종 건물 또는 물체들은 한순간에 동주의 눈동자를 통과하지 못하고 튕겨나가기 시작했다. 동주는 왼손으로 이 코를 쥐어 잡고 팔꿈치를 창틀에 기댐으로써 이 망할 녀석을 이용하는 공기의 출입을 막았다. 그리고 입으로 차분하게 호흡하면서 쑤시는 머리를 창문에 살짝 기대고, 시선은 바깥의 먼 하늘을 바라보며 눈을 살며시 감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동주가 스스로를 평안하게 하고자하는 노력은 오른쪽 허벅지 바지 주머니에 넣은 스마트폰의 갑작스런 진동으로 산산조각났다. 동주는 왼손으로 코를 계속 쥐어 잡으면서 오른손으로 바지 주머니의 스마트폰을 꺼내어 전원을 켰다. 스마트폰의 시간을 확인해보니 어느새 저녁 7시가 넘었다. 동주는 10월 중순에 이정도 시간대이면 벌써 해가 지고 밤이 되었을 것임에도 아직 하늘이 붉다는 지금 이 상황에 의아해했다. 그러면서도 동주는 속으로 ‘오늘 따라 해가 길게 뜨는 날 인가보다’하고 스스로가 가졌던 의아함을 대충 해소시켰다.

스마트폰 진동의 원인은 오전에 만났던 팀원들의 카톡에 있었다. 대화창을 확인해보니 지연이 구성원들을 다 초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해나가고 있었다. 구성원들은 아까 오전에 잡았던 주제에 대해서 카톡으로 구체화에 대해 논의할지, 또는 다음 모임 때 직접 대면하면서 이야기할지, 그것도 아니라면 각자 알아서 구체화를 다음 모임 때까지 해올 지를 이제 막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부분은 그들에게 길게 고민할 부분이 아니었기에 금세 다음 모임 때까지 각자 구체화한 설문지를 만들어 오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문제는 다음 모임을 언제 잡느냐는 것이었다. 팀플의 최종 마무리를 상징하는 발표는 11월 마지막 주에서 12월 첫 주 사이이고, 그에 대한 리포트는 종강 전까지만 제출하면 되기 때문에 10월 중순인 현 시간에서 볼 때, 시간적 여유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서윤은 이를 고려한 듯, 따로 날을 잡지 말고 다음 수업시간 끝나고 만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자 지연은 곧바로 똑바로 서윤에게 바쁘냐고 반문하였다. 이제 중간고사 끝난 지 얼마 안되었기에 딱히 바쁜 일은 없다고 서윤이 답하자, 지연은 다른 구성원들에게 이번 주 내로 하루 만나서 팀플의 속도를 조금이라도 빨리 내자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러자 현승은 그녀의 의견에 동조하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서윤은 그렇게 급하게까지 할 이유가 있는지 의문을 가졌다. 이에 현우는 서윤에게 당장 급하지는 않지만, 팀플의 현장 설문조사가 수많은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직접 이루어지는 만큼, 표본을 추출하는 과정이 예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릴 우려가 있어서 미리미리 하는 것이 현명한 판단일거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는 이에 덧붙여서 11월 중순만 되면 다른 과목들의 과제나 퀴즈 준비로 팀플 자체에 부담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미리 주어진 것은 빨리 끝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며 지연의 의견을 뒷받침해주었다. 이러한 현우의 설명은 서윤을 수긍하게 함으로써 팀 구성원들의 의견을 하나로 모았다. 이제 남은 건 이번 주 정확히 언제, 어디서, 몇 시에 만나냐는 논의였다. 동주는 오후 공강이 있는 시간이 어떻게 되는지 팀원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동주를 포함해서 각자 시간표의 오후 공강을 이야기 한 결과 금요일 오후 3시 이후가 해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현승이 금요일 오후 4시부터 또 다른 수업이 있기 때문에 해당 시간대에 긴 시간동안 함께 있지 못한다는 문제점이 존재했다. 경제학과 4학년이자 마지막 학기인 박현승은 미국 대학원 유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학부생 신분으로 정책 대학원 수업을 두 개정도 선 수강 하고 있었다. 이는 그가 평일 늦은 오후부터 야간까지 수업이 있는 경우들이 왕왕 있을 수밖에 없는 배경이었다. 그렇다고 팀원들이 그를 고려해서 현승이 늦은 오후나 야간 수업이 없는 날의 저녁으로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현승이 가능한 그 날은 바로 수요일인 내일이었기 때문에 하루 만에 팀원들이 설문지 질문을 구상해오기에는 시간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판단이었다. 정 안되면 주말이라는 황금시간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이는 팀원 모두가 암묵적으로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차선책이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오가고 난 후에 결국 팀원 모두는 금요일 오후 3시에 장소는 팀플 공간이 마련된 도서관 로비에서 무난하게 만나기로 합의하였다. 현승이 오래 참여하지 못하는 부분은 나머지 팀원들이 감수한다는 결정이었다. 동주는 그런 현승의 상황이 이성적으로 이해는 가지만 감정적으로 무언가 아니꼬운 느낌이 들었다.

그 이후로 시간이 흘러 금요일 오후가 되었다. 동주는 14시에 수업을 마치고 난 이후에는 수업도 없고 딱히 할 것도 없었기에 미리 약속 장소에 가서 기다릴 셈으로 도서관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도서관 로비에는 팀플 공간이 마련되어있어 학생들이 5~6명씩 모여 있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학생들이 많아서 로비의 팀플 공간이 남는 자리가 없었다. 심지어 팀플 공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팀플 공간을 찾는 학생들이 평소보다 많이 지나다녀서 굉장히 소란스러웠다. 동주는 팀원들이 있는 그룹 카톡방에 이러한 상황을 연유로 장소를 바꿔야할 것 같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나 10분정도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지를 읽었음을 나타내는 숫자가 4에서 줄어들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이에 대해 동주는 다들 수업중이기 때문에 메시지를 보지 못하는 것으로 짐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팀원들이 이런 상황을 파악하고 빨리 해결책을 모색했으면 하는 마음에 답답했다. 약속시간인 오후 3시부터 겨우 1시간 될까 말까할 정도만 함께하는 현승을 팀플장소 모색하는 데에 여차하면 상당한 시간을 허비할 것만 같았고, 이를 절대 용납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동주 스스로 팀원들에게 해결책을 제시할 수도 있었지만, 이를 자기 혼자서 결정할 문제는 아닌 것 같다는 판단이 동주를 가로막았다. 동주는 일단 이 시끄러운 공간에서 나가고자 출입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때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어! 안녕하세요.”

서윤이었다. 화사한 봄을 닮은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동주에게 다가왔다. 동주는 그런 그녀의 겉차림을 보는 듯 마는 듯, 인사도 생략하고 바로 자기가 해소하고자하는 답답함의 본론을 꺼냈다.

“카톡 메시지… 제가 보낸 거 봤어요?”

“…예?”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하였는지 서윤은 이전보다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동주를 쳐다보았다. 동주는 그런 서윤의 반응이 못마땅하여 숨을 깊게 들이 내쉬었다. 수업이 있었던 것도 아니면서 스마트폰은 폼으로 들고 다니는 건지 싶었다. 서윤은 그런 동주의 감정에서 묻어나오는 불편한 표정을 감지한 듯, 바로 자신의 스마트폰을 확인하고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어!? 메시지 왔었구나. . 죄송해요, 온 줄 몰랐어요.”

동주는 서윤이 사과하기도 했고, 사람이 카톡 메시지 하나 어쩌다 못 볼 수도 있는 거라고 이해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고자 하지만 내심 짜증나는 감정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런 개인적인 감정으로 답답함의 본론을 흐리고 싶지 않았다. 동주는 감정을 가라앉히고, 서윤에게 자신이 보냈던 메시지 내용을 풀어서 차분하게 이야기하였다.

“보다시피 여기 이렇게 사람 많잖아요. 그러니까 팀플 장소를 부득이 바꿔야 할 것 같아요. 어디가 좋다고 생각해요?”

서윤은 눈으로 도서관 로비의 현장을 한 번 둘러본 후 동주가 이야기하는 것에 자연히 수긍하고는, 그 대안으로 학교 정문 근처의 커피 전문점을 가자고 제안하였다. 동주는 거기도 사람이 많아서 자리가 없거나 있더라도 팀플하기에 협소한 공간일 것이라는 우려를 보였지만, 서윤은 학교 근처에 커피 전문점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괜찮을 거라고 하였기에 서윤의 제안을 일단 수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동주는 속으로 커피 전문점의 공간을 사용하기 위해 암묵적인 자릿세로 쓸데없이 비싼 커피 한 잔을 사야 될 거라는 것이 마음에 영 내키지가 않았다. 이는 동주가 평소에 커피는 슈퍼나 편의점에서 사는 음료만으로 충분하며 카페 같은 곳에서 비싸게 사먹는 것은 돈 낭비라는 인식이 내재되어있는 것과 전혀 무관하지 않았다. 서윤은 동주의 이러한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학교 주변의 카페는 여기저기 가봐서 어디가 좋은지 잘 알고 있다는 등의 이야기를 늘어놓느라 정신이 없어보였다. 그러던 서윤은 가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여기, 『Tea break』예요. 프랜차이즈는 아닌데, 보통 카페보다 가격도 싸면서 맛도 있고 팀플하기도 나쁘지 않은 공간을 갖고 있어요.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좋은 곳이죠.”

동주는 서윤의 안내를 받으면서 『Tea break』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도 생각보다 별로 없어서 카페 분위기는 한산했다. 가게 구석에는 프랜차이즈가 아닌 가게에 기대하기 어려울법한 널찍한 테이블과 소파가 마련되어있었다. 이정도 공간이면 팀플하기 나쁘지 않은 환경이었다. 동주는 곧바로 팀원들에게 변경된 장소와 그 곳이 팀플하기 좋은 환경임을 알리는 메시지를 보냈다. 서윤은 그 사이에 커피 주문을 하고 있었다.

“일단 카라멜 마끼아또 아이스로 한 잔이요. 커피 뭐로 하실 거예요?”

동주는 서윤의 말에 그제야 가게의 메뉴판을 바라볼 필요성을 느꼈다. 메뉴판에는 평소에 TV광고 및 슈퍼나 편의점에서의 커피 음료 제품에 흔히 볼 수 있었던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었지만, 평소에 그러한 이름들에 큰 신경을 쓰지 않고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아무거나 먹었기에 이러한 커피 이름들이 매우 낯설고 어렵게 느껴졌다. 동주는 이런 낯선 이름들을 보고 있으려니 불현 듯, 커피가 그게 그건데 뭐 하러 괜히 쓸데없이 있어 보이려고 이런 어려운 말을 쓰나 싶어서 짜증이 났다. 그냥 서윤이랑 똑같은 걸 주문할까 싶었는데 웬걸, 카라멜 뭐시기 한 잔 가격이 4000원이 넘어가다니 밥값도 아니고 이건 좀 아닌 것 같았다. 이것도 충분히 비싼 것 같은데 서윤은 아까 소개할 때 이게 어딜 봐서 가격이 싸다고 말한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 그래서 동주는 서윤이 말로만 듣던 부유한 가정의 자녀라는 이른 바 ‘금수저’거나 집안 형편 상관없이 겉으로 부유함을 뽐내고자 하는 겉멋만 든 된장녀이기 때문에 그런 것인 걸로 대충 이해하기로 했다. 이러한 생각 가운데, 동주는 서윤이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은 시선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빨리 결정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서, 동주는 어차피 아무거나 먹어도 상관없으니까 제일 싼 가격의 커피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러한 커피는 2500원짜리 ‘아메리카노’로 결정이 났다. 아메리카노… 좀 되었지만 예전에 길거리나 TV에서 아메리카노가 좋다고 하는 노래를 들어본 적이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동주에게는 다른 커피보다 왠지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왕 이렇게 사먹게 된 거, ‘그 노래에서 왜 아메리카노가 좋다고 그렇게 노래를 불러댔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구나.’라는 나름의 의미부여를 하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그리고 뜨거워서 천천히 마셔야 되는 것 보다는 아이스로 시원하게 마시는 게 낫다 싶었다. 이러한 사고 과정이 끝나자마자 바로 동주는 자신을 기다리던 서윤을 들여보내고 직접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그리고 앞으로 팀원들이 모일 테이블과 소파가 있는 곳에 마음에 드는 한 자리를 정해서 앉았다.

동주가 자리에 앉자마자 동주를 괴롭히던 비염 증상이 다시 도져버렸다. 비염 증상이 참 신기하게도 서있거나 걸어 다닐 때에는 좀 괜찮은데, 앉아있으면 코 막힘과 콧물 흘림 증상이 심해지곤 했다. 동주는 이놈의 코 때문에 코흘리개 어린아이처럼 본의 아니게 자꾸 훌쩍훌쩍 거리는 자기 자신이 너무나도 싫었다. 하지만 이런 증상도 한여름이나 한겨울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히 없어지곤 했다. 결국 동주는 계절의 뚜렷함이 없는 환절기가 하루라도 빨리 지나가길 바라거나 앉아있는 것 대신에 잠시 동안 일어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동주는 일어서있기에는 다리가 좀 아파서 쉬고 싶었기에 앉아있었으면 했다. 이에 따라 동주는 콧물을 지저분하게 흘리거나 훌쩍대지 않기 위해서 테이블 위에 놓인 휴지를 조금 뜯어 동그랗게 말은 후, 그것을 양쪽 콧구멍에 꽉 들어맞게 쑤셔 넣었다. 휴지를 쑤셔 넣고 보니 쌍코피 흘린 사람마냥 스스로의 모습이 칠칠맞지 못해보였기에 보기 흉했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서윤은 이런 동주의 상태를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뭐가 그리 재밌는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기 바빴다. 동주는 서윤과 우연찮게 단 둘이 오래 있게 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시계를 보면서 나머지 다른 팀원들이 빨리 이곳으로 오길 기다렸다. 현재 시각 2시 50분, 이제 막 팀원들이 수업을 마치고 메시지를 확인하고 올 시간이었다. 이윽고 팀원들의 단체 카톡방은 나머지 세 명의 확인 응답이 이어졌다. 그들을 기다리던 도중에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는 종업원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이에 서윤은 곧바로 커피를 가지고 왔다. 동주가 주문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달리 서윤의 카라멜 마끼아또는 위에 휘핑크림과 캐러멜 시럽이 잔뜩 얹어져있는 것 부터해서 외관이 화려했다. 동주는 화려한 카라멜 마끼아또의 외관에 속으로 감탄하면서 자신이 주문한 아메리카노를 조금 들이마셨다. 그런데 아메리카노는 동주가 평소에 갖고 있던 달콤한 커피에 대한 인식과는 정반대의 굉장한 쓴맛을 주었기에 동주의 얼굴 표정을 순식간에 일그러뜨렸다. 이게 그 다이어트하는 사람들이 칼로리 조절한다고 먹는 블랙커피의 일종인가 싶었다. 더 나아가서 동주는 이런 쓴 물을 2500원이나 주고 사먹었다고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동주는 이 쓰디쓴 물에 시럽을 넣어 마실 필요성을 느끼고 사이드 코너에서 발견했던 시럽을 집어 쓴 맛을 지울 만큼 뿌리기 시작했다. 서윤은 그런 동주를 바라보면서 아메리카노에 시럽 많이 뿌리면 별로라는 등의 이야기를 하는 듯 하였으나 동주에게는 중요한 얘깃거리가 아니었다. 그때 카페의 출입문이 열리는 종소리가 뎅글뎅글 들려왔다.

“오오, 학교 근처에 이런 곳도 있었구나! 아, 두 분 여기 계셨네! 아이고, 안녕하세요. 많이 기다리셨죠?”

현승이었다. 그 특유의 사람 좋아 보이는 눈 웃음은 여전했다. 동주와 서윤은 현승과 시답잖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곧이어 지연과 현우도 속속히 도착했다. 팀원들과 가벼운 인사 몇 마디를 나눈 후, 이들도 저마다 커피 한 잔씩 주문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세 사람 모두 ‘아메리카노’를 주문하였다. 동주는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는 세 사람을 바라보며 이런 쓴 물이 대체 어떤 매력이 있기에 저렇게 사먹는 것인지 납득이 안 되었다. 얼마 안가서 세 사람의 아메리카노는 금방 제조되어 나왔고, 그들은 각자 한 잔씩 들고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지연은 자신이 들고 있는 아메리카노를 잠시 동안 코에 가까이 대더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꺼냈다.

“여기 커피 향이 참 깊고 좋네요. 자주 와야겠다. 가격도 나쁘지 않고. .”

동주는 지연이 하는 말을 쉽사리 이해하기 어려웠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마실 것에 대해 향을 깊게 느끼고 중요시 여겼던 경험적 사례는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흔히 요리 관련 만화나 드라마에서 향 가지고 호들갑 떠는 장면은 본 것 같았다. 또는 관련 업계 종사자라면 그런 섬세한 부분도 다 따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터였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동주는 현재 후각을 제대로 사용 못하는 형편이기에 향이라는 걸 당장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동주가 보기에 이 여자는 마치 자신이 무슨 전문가인 것 마냥 같잖은 허세를 부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동주가 느꼈던 아메리카노란 그냥 쓰디 쓴 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동주는 그런 지연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자신의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들이켰다. 좀 전에 넣은 시럽의 효과 덕인지 쓴맛은 어느 새 사라지고 달달한 맛만 남아있었다. 동주는 그제야 한결 나아졌다는 듯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 지연은 동주에게 불쾌한 녀석 문제를 다시 상기시키는 말을 꺼냈다.

“코 양쪽 다 왜 그래요? 코피 났어요?”

덕분에 팀원들의 시선은 동주의 코에 집중되었고 동주는 피가 코에 쏠려 빨개지는 것만 같았다. 이런 걸로 저 여자가 신경을 쓰이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창피한 감정도 들었다. 이럴 때에는 대수롭지 않게 시선을 돌려야 했기에 가볍게 실실 웃으며 그녀에게 답변해주었다.

“아, 제가 환절기만 되면 비염이 심해지다 보니까 콧물이 자꾸 흘러내려가서 그냥 휴지로 막았어요.”

이에 사려 깊은 팀원들은 저마다 탄식의 반응과 함께 힘들겠다, 고생한다는 등의 격려의 한 마디를 해주었다. 이야기를 꺼냈던 지연도 별다른 말은 없었지만 동주의 말을 알았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였다.

이제 사담은 끝내고 팀플을 진행할 때였다. 지연은 자연스럽게 지난번에 이야기했던 각자의 설문지를 꺼내서 이야기를 하자며 일을 시작했다. 팀원들이 가져온 서로서로의 설문지 각 문항에 대해서 어떤 질문은 괜찮고, 어떤 부분은 표현이 중의적인 문제가 있고, 또 다른 부분은 질문 자체가 편향적인 답변을 유도할 것 같다는 등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런 글 표현에 대한 교정은 주로 지연과 현승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게다가 주제는 커플인 사람들과 솔로인 사람들에 대한 설문조사였기 때문에 공통 질문 외에도 커플인 사람들에게 줄 질문과 솔로인 사람에게 줄 질문이 달라야 될 부분이 있었다. 또한 질문을 추가해서 예상되는 결과를 만들어내자는 이야기도 나왔다. 이는 서윤이 제안한 것으로, 질문 내용이 자신의 자존감 정도를 5점 만점으로 평가해볼 때 점수를 매기면 몇 점이냐는 질문이었다. 서윤은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그만큼 자기를 사랑하는 만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으며, 자존감이 자신감을 형성하는 기본 근간이라는 근거를 바탕으로 커플은 높은 점수를, 솔로는 낮은 점수가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동주는 이러한 제안이 새내기 서윤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에 뜻밖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중에 발표하거나 보고서를 쓸 때 예상 결과대로 나온다면 이성과의 교제는 사회 심리학적인 요소가 작용한다는 식으로 멋들어지게 표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판단을 하였다. 이것 외에도 처음 받았을 때 설문지를 작성할 사람들을 위해 설문의 목적과 용도를 설명해주는 가이드라인 문구까지 모든 것이 꼼꼼하게 논의되었다. 이러한 생산적인 논의를 통해 팀이 현장조사 때 사용할 최종 설문지를 만드는 것이 이번 모임의 목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현승이 기존의 것보다 더 구체화할 필요성이 있음을 지적했다.

“생각해보니까 현재 주제로 커플과 솔로로 이분법적으로 나눠 질문하기보다는 솔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세분화해서 커플과 연애 경험은 있지만 현재는 솔로인 사람, 그리고 지금까지 한 번도 연애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인 모태솔로 이렇게 세 분류로 나누면 좀 더 결과 도출할 때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연재 가능성 불투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