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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화벨 ]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흘러나왔다. 클래식 음악치고는 경박하고 음도 다채롭지 않았다. 집전화의 벨소리였기 때문이다. 집 안은 고요했다. 아내와 두 아이는 여행을 갔다. 친정 부모님을 모시고 간 여행이다. 장모님 생신에 맞춰 제주도로 함께 여행을 보냈다. 4인 가족이 살던 집, 게다가 수입도 많았기에 평수는 작지 않았다. 운명 교향곡은 벽에 울리며 큰 울림을 만들었다.
광우는 자신이 베토벤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나폴레옹에 의해 점령당한 빈, 사라져가는 청각. 베토벤은 제정신이었을까? 음악에라도 몰두하려던 것은 아닐까? 광우는 마른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생각했다.
갑자기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었다. 베토벤의 사망 원인에 대한 이야기다. 얼마 전에 읽은 기사에 따르면 베토벤의 사망 원인은 매독이 아니었다. 치료 때문이었다. 폐렴, 간경화, 수종으로 56세까지 고통 받던 베토벤. 고통을 줄이기 위해 의사를 고용했다. 그리고 의사는 다량의 모르핀과 비소를 투여했다. 역설적이게도 당시의 선진 의술이 베토벤의 수명을 갉아먹은 것이다. 베토벤의 죽음이 잘못된 의학지식 때문이라면, 내 고통은 무엇 때문일까? 광우는 아랫입술에 맺힌 피를 핥으며 초조하게 생각했다.
분명 고통의 뿌리는 유년기부터 시작됐다.
◆
유년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면 희한하게도 노란 하늘이 먼저 떠올랐다. 분명 그 시절 하늘도 파란색이었을 텐데, 광우의 기억 속 유년 시절은 모두 노란색이었다. 노란색도 요새 나오는 크레용처럼 선명한 노란색이 아니다. 풀빵 파는 노점상에서 주는 기름에 쩐 누런색 종이봉투의 색이다. 과거를 바라보는 창문에 누런색 셀로판지를 붙인 것처럼, 모든 과거의 색깔이 단색이었다.
하지만 추억의 내용은 다양했다. 생애 최초의 기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불구경이었다. 정확히 어딘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창문을 통해 본 그 곳은 거대한 연기가 넘실거렸다. 당시 부모님은 ‘니 누가 와도 열어주지 말고, 가만 있으라.’라며 말하고는 부산스럽게 뛰어 나갔다. 광우는 창문에 매달려 까만 연기가 춤추는 모습을 바라봤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마을 외진 곳에 있는 큰 창고가 불에 탔던 것이란다.
나머지 기억은 전부 노는 내용이었다. 다방구, 비석치기, 돈까스, 깡통 차기, 자치기, 쥐불놀이, 술래잡기, 숨바꼭질, 딱지치기, 구슬치기……. 지금은 이름만 기억나고 규칙은 생소한 추억의 놀이가 한 아름이었다. 광우는 그 중에서도 깡통 차기를 좋아했다. 깡통을 하나 세워두고 술래는 눈을 감고 백을 센다. 그러면 모두 흩어져 숨는다. 술래가 백을 모두 세면 숨은 사람들을 찾아낸다. 반대로 숨었던 애들은 술래를 피해 깡통을 차야했다. 술래가 숨은 친구를 찾아 깡통이 있는 곳에 모두 잡아오면 술래가 이기고, 누군가가 깡통을 차서 잡힌 애들을 풀어주면 술래는 다시 그들을 잡아야 했다. 친구들이 술래가 찾기 어려운 장소를 물색할 때, 광우는 꾀를 냈다. 술래가 천천히 백을 세는 동안 술래 근처의 골목 귀퉁이에 숨어 있는 것이었다. 아무도 잡혀있지 않은 깡통은 지킬 필요가 없기에 술래는 과감하게 멀리 나간다. 그 때 광우는 깡통을 차기 쉽고, 눈에 안 띄는 장소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러면 잡혀온 친구가 늘어났을 때 깡통을 차기가 쉬웠다. 당연히 술래는 광우가 언제 접근했는지도 몰랐다.
어릴 때는 해가 금방 지는 것 같았다. 골목마다 그림자가 드리우면 하나둘씩 집으로 돌아갔다. 귀가 신호는 대개 ‘누구야 밥 먹어라!’였다. 친구 하나가 ‘내일 봐.’ 하고 쪼르르 달려가면, 하나 둘씩 ‘배고프다.’라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남아있는 친구들이 있었다. 광우, 상면, 영인. 이렇게 세 명이다. 각자 집안 사정이 있었지만 궁금해 하진 않았다. 다만 집에 일찍 돌아갈 필요가 없었고, 더 놀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는 것은 서로 알았다. 자연히 셋은 늦게까지 어울렸고, 다른 또래보다 더욱 돈독한 사이가 되었다.
셋이 함께한 일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면서 달음박질 쳤던 장난, 눈 덮인 언덕에서 비닐포대 썰매를 탄 기억, 여자애들 고무줄을 끊고서 도망간 기억, 억울하게 혼난 상면이를 위해 머리 하나 더 큰 형들에게 대들었다가 죽사발이 된 기억.
하나같이 모두 즐거운 추억이지만, 유별나게 선명한 기억이 있었다. 국민학교, 여름이었다. 책 보따리를 허리춤에 매고 여느 때처럼 세 친구가 모였다.
[니들 사람 죽은 거 봤어?]
영인이가 은근히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상면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상면은 유난히 무서운 이야기를 싫어했다.
[말하지 마! 말하지 마!]
영인은 그런 상면을 보고 히죽 웃었다. 광우도 그럴 때면 같이 키득거렸던 것 같다. 상면은 놀리는 재미가 있는 친구였다.
[못 봤다. 그러는 너는 봤어?]
영인이는 씨익 웃어보였다.
[아니.]
[뭐야 지도 안 봤으면서.]
상면이 씩씩 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이제 보러 갈 거야.]
영인의 말에 광우가 물었다.
[누가 죽었어?]
영인은 가까이 오라 손짓을 했다. 상면은 새하얀 얼굴을 하면서도 귀를 기울였다. 광우도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충분히 안달할 만큼 시간을 끌고 영인이 입을 열었다.
[학교 뒤쪽 약수터 가는 길 알지?]
광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눈은 영인에게 콕 박혀 움직일 줄 몰랐다.
[내가 길가다 들었는데 거기에 시체가 하나 있대. 그런데 어른들도 꺼림칙한지 가까이 안 간다는 거야.]
상면은 그 말에 몸서리를 쳤다.
[아마 오늘이나 내일 쯤 어른들이 몰려갈 것이 분명해. 그러니까 시체를 보려면 지금 결정해야 해.]
영인은 광우와 상면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어때?]
광우는 무슨 대답을 했는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기억하지 못 했다. 하지만 숨을 헐떡이며 산을 올랐던 것은 또렷하게 기억했다. 아마 동의했거나 엉겁결에 따라 갔나보다. 상면은 땀이 차는지 바지에 손을 자주 닦았다. 시체의 위치가 어딘지 자세히 알지 못해 영인은 자주 길을 바꿔 들어갔다. 당시 산의 나무는 키가 껑충해서, 저녁 무렵이면 주위가 많이 어둑했다.
상면이 ‘이제 돌아가자.’고 몇 번인가 칭얼거렸을 때, 영인이 외쳤다.
[찾았다! 여기야, 여기!]
그 소리에 광우도 상면이도 선뜻 뛰어가지 못 했다. 사람 시체가 궁금하긴 했지만, 실제로 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런 속도 모르고 영인은 광우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영인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처음에는 뭔지 보이지 않았지만 굉장히 이질적인 무언가를 볼 수 있었다.
[우아아아!]
상면이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는 걸어온 길을 따라 멀어졌다.
[이 겁쟁이야!]
영인이 뒤 쪽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사실 광우도 소리를 지르며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손목을 쥐고 있는 영인 때문에 도망갈 수 없었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토할 것 같은 기분을 억누르며 영인에게 돌아가자고 했다. 사실 광우는 집에 돌아가는 과정을 기억하지 못 했다. 아마 그랬을 것이란 추측이 있을 뿐이다.
훗날 생각해보니 그건 사람 시체가 아니었던 것 같다. 사람 시체라면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둘리도 없고, 마을이 조용할 리도 없었다. 아마 커다란 개나 산짐승의 시체였을 것이다. 물론 그런 생각이 들기까지는 악몽을 꿔 이불을 축축하게 만들곤 했다.
[그 사람은 왜 죽었을까?]
영인은 그 시체를 사람이라고 죽 믿었다.
[산에서 넘어진 것 아닐까?]
[바보야, 그럼 넌 백 번도 넘게 죽었어.]
영인은 그 날 이후로 상면을 자주 바보 취급했다. 물론 친구로서 적당한 수준으로. 하지만 상면은 도망친 자신이 부끄러웠던 것 같다. 바보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얼굴이 빨개지곤 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영인은 죽음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자주 모이는 우리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덕분에 광우는 악몽도 많이 꿨다. 매번 이야기는 달랐다. 해골이 칼을 들고 쫒아오는 꿈, 변소에서 볼일을 보는데 손이 불쑥 올라오는 꿈, 갑자기 온 마을에 울음소리가 가득한 꿈. 그 때마다 축축한 아랫도리를 부여잡고 잠에서 깼다.
◆
악몽을 꾸지 않을 만큼 세월이 흘렀다. 셋은 전처럼 자주 모이지는 못 했지만, 종종 함께 어울려 다니곤 했다. 이야기의 주제가 놀이에서 여자로 자연스레 바뀌었다. 한 달 사이에 키가 반 뼘만큼 자라곤 했다. 사춘기였다.
영인, 광우, 상면. 셋이 모일 때마다 시시껄렁한 이야기로 한참 웃었다. 얼굴에 여드름이 맺힐 무렵, 음란한 농담에 킬킬 거리며 웃는 시간이 많았다. 이야기의 소재는 한정되었지만 대화가 끊긴 적은 없었다. 하지만 서로의 관심사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상면은 음악에 관심을 보였다. 딴따라라고 어른들은 멸시해도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맑아지는 기분이라고 했다. 영인은 그 날 이후로 죽음이나 운명에 관한 관심이 지대해졌다. 종종 이상한 잡지를 가져오기도 했다. 광우는 열렬히 여자에 대한 관심을 표현했다. 특히 옆 학교 여학생 이야기를 좋아했다.
남들과 조금도 다를 것 없는 삶이었다. 자신에게는 남다른 의미지만, 남들도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평범한 삶. 하지만 광우의 고통은 이 시기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광우는 전혀 기억하질 못 했다. 고통의 시초를 명확하게 인지한 것은 30 여년이란 세월이 지나고 나서였다.
상면은 집안 사정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셋이서 어깨를 안고 엉엉 울었다. 광우와 영인은 같이 전문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러다 영인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기술을 배웠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가장 역할을 해야 했던 것이다. 광우는 셋과 거의 만나지 못 한 채 대학에 들어갔다. 그리고 유년 시절에는 상상도 못할 만큼 많은 시간을 견뎠다.
◆
‘당시의 나에게 지금의 나를 보여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광우는 거울을 볼 때마다 자문했다. 희끗한 머리, 주름이 가득한 이마. 어릴 때는 금방금방 자라는 빳빳한 수염 때문에 면도가 거추장스러웠지만, 이제는 수염마저 예전처럼 생기 있게 나지 않는다. 몸속은 나이에 비례해 허물어져갔다. 하지만 그만큼 주위에 쌓아올린 것도 많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중소기업에 취업했다. 그 기업은 한창 잘 나가는 참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일을 배웠고, 일을 했다. 덕분에 지천명이라 일컫는 나이에는 많은 것을 이뤘다. 선을 봐 결혼하고, 아이를 둘이나 봤다. 아이가 커가는 만큼 집의 평수도 커졌다. 입사했던 중소기업은 대기업이란 명칭이 어울릴 만큼 훌쩍 커버렸다. 그리고 첫 째 아이는 광우가 다니던 회사에 입사했다. 결혼할 여자라며 귀엽게 생긴 아이도 데려왔다.
따라서 한낱 전화 벨소리에 초조할 필요가 없었다. 생활은 안정적이었고, 쉽게 무너질 성질도 아니었다. 하지만 벨소리에 얽힌 약속 때문에 광우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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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연락이 끊겨 이제는 희미해진 옛 친구. 광우에게 상면과 영인은 그런 친구였다. 하지만 인생이란 복잡하게 얽인 길과 같아서 걷다보면 우연히 마주치는 인연이 있지 않은가. 광우는 그런 기대를 어렴풋이 품으며 지냈다. 하지만 30년 동안 둘을 애써 찾지도 않았다. 유년 시절 친구란 늘 그 정도였다.
약 5년 전 쯤, 광우는 신차를 구입했다. 유명 외제차로 오랫동안 구입을 망설였던 것이다. 구입할 능력은 됐지만, 적지 않은 나이에 사치를 부리는 것 같아 망설였다. 하지만 큰맘 먹고 산 차는 광우의 기분을 들뜨게 했다.
주말 마다 목적지 없이, 눈앞에 보이는 길을 달리는 것이 꽤나 유쾌했다. 주차장과 다름없는 도로에서 담배만 하염없이 피우다가, 맑은 공기와 함께 시원하게 뻥 뚫린 국도를 달리게 되니 기분이 더욱 좋았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고. 돌아갈 즈음에 네비게이션을 켰다. 광우는 네비가 알려주는 최단거리 코스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 날도 광우는 멀리까지 길을 나섰다. 날씨도 화창하고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바람은 찼지만 머리를 맑게 해주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도 드라이브의 기쁨을 더해주었다.
슬슬 돌아가야겠단 생각이 들었을 때, 네비게이션이 고장 난 것을 알았다. 전원 버튼을 여러 번 눌러보고, 손바닥으로 내리쳐도 도통 켜지지 않았다.
[일 났네…….]
광우는 휴대폰으로 집에 연락을 했다. 항상 저녁 먹을 즈음에 돌아갔는데 이렇게 되면 언제 도착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 오늘 조금 늦을 것 같으니 먼저 저녁 들어요.]
[무슨 일 있어요?]
아내였다.
[그건 아니고, 조금 멀리 왔는데 저녁 시간 맞출 수 없을 것 같아서.]
[네. 너무 늦지 말아요.]
광우는 전화를 끊고 도로를 천천히 달렸다. 도로표지판을 보니 청주시 근처까지 내려온 것 같았다.
‘얼마나 달린 건지, 참.’
그렇게 생각하며 광우는 차를 몰았다. 근처 지리를 잘 몰랐기 때문에 우선 큰 도시 쪽을 가서 고속도로를 타려 했다. 청주시로 가서 중부고속도로를 따라가면 될 것 같았다. 표지판을 곁눈질 해가며 힘겹게 운전을 한 끝에 청주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예전에야 길을 다 외우고 다녔지만, 최근에는 네비게이션이 시키는 대로만 운전했다. 때문에 근래 들어서는 길을 찾아가며 운전하는 경험도 전혀 하지 못 했다. 오랜만의 노동은 광우를 완전히 지치게 했다. 어깨는 긴장한 탓에 잔뜩 뭉쳤다. 하지만 청주시내에 들어서자 긴장이 풀렸다. 긴장이 풀어지며 찾아온 것은 갑작스런 식욕이었다. 시계를 보니 저녁 시간이 한참 지나 있었다.
‘뭐 좀 먹고 돌아가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설렁탕 가게로 차를 몰았다. 청주에 유명한 음식이라도 맛볼까 했지만 막상 떠오르는 것도 없었고, 따뜻한 국물이 당겼기 때문이다. 지은 지 십 수 년은 되어 보이는 오래된 가게였다. 그렇다고 단골이 많을 것 같진 않은 평범한 식당이었다.
[어서 오세요.]
텔레비전을 보던 아주머니가 건성으로 인사를 건넸다. 고정된 눈은 주말연속극을 향해 있었다.
[사장님, 여기 설렁탕 하나 말아주세요.]
[설렁탕 하나요!]
아주머니는 그렇게 외치며, 물과 물수건을 내왔다. 하지만 곁눈질로는 드라마를 쉴 새 없이 보았다. 광우는 손이 닿을 때마다 끈적끈적한 식탁을 물수건으로 닦았다. 나가고 싶었지만 허기가 만류했다. 주방 쪽에서 부산한 소리가 나더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릇을 들고 한 남자가 나왔다.
[맛있게 드세요.]
광우는 국물부터 후루룩 들이켰다. 맛있는 설렁탕은 아니었지만, 열기가 뜨끈하게 몸을 덥혔다. 음식을 가져다 준 남자는 드라마를 보던 여자 옆에 앉았다. 광우는 허기를 달래기 위해 설렁탕에 집중했다.
허기가 어느 정도 가시자 자연스레 텔레비전으로 눈이 갔다. 주말드라마에서는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서로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불여우 같은 년. 어머니는 저를 며느리로 생각지도 않으시잖아요. 내 아들을 꾀어간 도둑고양이 같으니. 그러면 왜 허락하셨어요! 드라마의 절반 이상이 서로에게 소리를 지르는 내용이었다. 저런 것을 무슨 재미로 보나 싶었지만 식당 아주머니는 눈을 뗄 줄 몰랐다. 그러다 문득 아주머니 옆에 앉은 남자의 시선을 보게 되었다. 그 시선은 광우에게서 움직일 줄 몰랐다.
‘나를 보는 건가?’
광우는 의아해 하며 설렁탕을 비웠다. 그리고 물을 한 잔 쭉 들이키며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남자도 일어섰다. 광우는 지갑을 꺼냈다. 남자는 광우에게 다가왔다.
[얼마죠?]
[6천원입니다.]
광우가 건넨 만원을 받고, 남자는 가만히 광우를 바라봤다. 광우는 뭔가 싶어 그 남자의 얼굴을 봤다. 그리고 굉장히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분명히 내가 아는…….
[혹시 광우 아냐?]
남자의 말에 광우는 정신이 번쩍 났다. 이 익숙한 얼굴. 주름도 늘었고 머리도 반 넘게 벗겨졌지만 분명히 영인이었다.
[너……!!]
[이야, 반갑다. 이 자식아!]
광우는 영인을 덥석 안았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어린 시절 친구를 만나다니. 영화 같은 일이었다. 드라마를 보던 아주머니도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 눈앞의 상황이 드라마보다 흥미로웠나보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어?]
[내가 할 말이다. 어이구, 많이도 늙었다.]
[너야 말로!]
둘은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즐겁게 웃었다. 강산이 세 번 바뀔 시간 동안 못 봤는데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아, 이쪽은 우리 집사람.]
영인은 드라마에 빠져있던 여자를 인사시켰다.
[안녕하세요.]
여자는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그리곤 차를 내온다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이야. 그나저나 너 잘 지내나보다. 신수가 훤한데?]
[내가 무슨……. 너야말로 어릴 때 그대로다. 하하.]
광우는 영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정말 반가운 마음이 들어 어쩔 줄 몰랐다.
[맞다. 너 상면이랑 연락 안 되지?]
광우는 또 다른 친구 이름에 반색했다.
[상면이랑 연락하고 지냈어? 그 상면이?]
[그래 임마. 그 자식 음악 좋아하더니 결국 딴따라 됐다.]
[이야아. 이런데서 옛 친구들을 다 만나네. 이런 인연이 있나!]
둘은 신기한 만남에 놀라며 한참 동안 진정하질 못 했다. 그러다 광우에게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둘째였다. 언제 오냐는 문자였다. 시간을 보니 어느새 깊은 밤이었다.
[돌아 가봐야 되는 거야?]
[아, 그게…….]
영인은 광우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괜찮아 자식아. 가 봐.]
그리고는 카운터에서 명함을 하나 쓱 뺐다.
[우리 가게 번호 여기 있어. 연락 줘! 상면이랑 한 번 봐야지.]
영인의 리드에 광우는 반가움을 감추지 못 했다.
‘어릴 적 그대로구만.’
[알았어. 내가 꼭 연락할게. 술… 하지?]
[못 하는 사람도 있어? 당연히 하지.]
영인이 잔을 꺾는 시늉을 보이자, 둘은 또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광우는 영인에게 꼭 연락할 것을 다짐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
세 친구가 모인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뒤였다. 장소는 청주시의 한 술집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상면은 사람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수줍은 성격은 그대로였지만, 말투나 행동에 여유가 있었다. 어린 시절, 상면은 가난 때문에 이사를 갔지만 음악은 계속 했다고 한다. 밤업소에서 통기타를 치며 생계를 잇다가, 팔리진 않았지만 음반도 하나 냈다. 자기 음악을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업소마다 기타 연주를 하며 살아간다 했다. 시간이 날 때면 요양원이나 고아원에 가 봉사를 하고 있었다.
영인은 기술을 배워 공장에 취직했다. 거의 단순 노동이라 생각보다 돈은 모이지 않았다. 오래 일하다가 공장장이 불의의 사고로 죽게 되었고, 공장을 떠나 이런저런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의류 공장에서 옷을 싼 값에 떼다가 차장수를 하기도 하고, 가게마다 식재료를 납품하기도 했다. 하지만 하는 일마다 손에 잘 안 붙어 큰 이득을 보진 못 했다. 지금 갖고 있는 설렁탕 가게는 여러 시행착오 끝에 간신히 얻은 잘 된 가게라고 한다.
[그래봤자 세 값 내고, 재료비 떼면 별로 안 남아.]
영인은 쯧 하고 혀를 찼다. 광우는 자신의 출세를 밝히기 꺼려했었다. 하지만 친구들은 이를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특히 영인은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라며 농담까지 던졌다. 셋은 그 날 코가 삐뚤어질 때가지 술을 부었다. 술이 한 잔 입으로 들어가면, 서로가 기억하는 추억이 대신 내뱉어졌다. 누군가는 기억하고, 누군가는 기억하지 못한 추억이 퍼즐 조각처럼 맞춰졌다. 광우는 이 즐거운 만남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
하지만 우연한 만남이 ‘행운’인지 ‘불운’인지 확인하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친구야, 나 이번만 도와주면 안 되겠냐?]
첫 시작이었다. 얼마의 돈을 빌려달라는 부탁. 그리고 매번 이유가 바뀌었다. 어머니의 급환 때문에. 장사가 안 되어 밀린 세 값. 그리고 적게 빌려주던 돈은 점점 액수가 커졌고 빈번해졌다. 광우는 처음에 거절하지 못 한 것을 후회했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야. 친구 좋다는 게 뭐야?]
소중한 인연을 유지하고자 빌려주던 돈은, 이제 자신의 추억을 지키기 위해 지불하는 ‘비용’이 되어버렸다. 잘 사는 친구에게 빌린다는 명목으로 돈을 요구하는 ‘영인’이 아닌, 오랜 추억 속의 죽마고우 ‘영인’으로 남길 바라는 마음에서, 광우는 일종의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액수가 만만찮게 커지자 아내가 걱정하기 시작했다.
[옛 친구라지만 너무한 거 아니에요? 그 동안 사람이 확 변했을 수도 있잖아요.]
[영인인 그런 사람 아니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광우도 어렴풋이 느꼈다. 자신을 오랜 친구가 아니라 괜찮은 물주로 본 것은 아닐까? 그래도 광우는 마지막까지 이해하려 했다. 하지만 예상보다 마지막은 빨리 왔다. 상면이 광우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아무래도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상면이 꺼내놓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로 여겼던 광우와 달리, 영인은 광우를 ‘괜찮은 물주’로 보는 것이 확실했다. 또 자신과 달리 성공한 광우에게 열등감도 심한 것 같았다. ‘그만큼 벌었으니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거야.’라는 식으로 자주 말했다고 했다.
[그래도 옛 정이 있으니까, 너무 탓하진 말아줘. 영인이가 고생을 많이 해서 그래.]
상면이 두둔했지만, 광우는 산산조각 난 추억에 괴로웠다. 광우는 상면에게 올 다음 연락이 돈 문제가 아니길 바랐다. 하지만 역시나 돈 문제였다.
[이번만…….]
광우는 한참을 입을 열지 못 했다. 이윽고 결심을 내려 ‘거절 의사’를 밝혔을 때, 영인이 보여준 태도는 광우를 놀라게 했다. 당연한 요구를 했다가 거절당한 사람의 태도였다.
[너 잘 살잖아? 근데 친구 부탁도 못 들어줘? 이게 우정이야?]
우정에 대한 견해가 다름을 이렇게 확인하다니.
[더러운 새끼. 돈 좀 버니까 나 같은 건 친구로도 안 보인다 이거지?]
영인은 광우의 말도 듣지 않고 일반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 광우는 한편으로 다행으로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답답했다. 차라리 만나지 않았다면 서로 좋은 추억을 남았을 것을. 쓴 입맛을 다실뿐이었다.
상면과의 만남은 계속 이어졌다. 광우를 만날 때마다 상면은 ‘영인이를 너무 나쁘게 보지 말아 달라.’며 광우를 달랬다. 상면이야말로 광우가 기댈 수 있는 마지막 추억이었다.
하지만 그 추억도 금방 끝이 났다.
◆
장례식 장은 한산했다. 부모님도 일찍 돌아가시고, 결혼도 하지 않은데다가 친척들도 거의 없는 상면이었다. 찾아오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봉사활동을 갔던 곳의 단체장 정도가 다였다. 광우는 부조금을 내고, 뭘 해야 할지 몰라 황망히 앉아 있다 집으로 돌아왔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떠났다.
사망 원인은 암이었다. 광우와 만나기 한참 전부터 상면은 대장암을 앓고 있었다. 발견했을 때는 수술을 할 수 있었지만, 치료를 차일피일 미루다 시기를 놓친 것이다. 상면이 왜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을까? 죄책감과 상실감에 광우는 괴로워했다.
착한 사람일수록 하늘은 일찍 데려간다.
왠지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가족들은 모두 일찍 자러 들어가고, 광우는 홀로 거실에 앉아 담배를 태웠다. 시계는 10시 54분을 가리켰다.
광우는 상면과의 추억을 되새겨보았다. 하지만 유년 시절의 추억, 그리고 최근의 기억이 다였다. 너무나도 짧은 만남인 것처럼 느껴졌다.
‘너랑은 더 오래 이야기 나누고 싶었는데……. 네 음악도 제대로 못 들어봤고…….’
광우는 불현듯 차오르는 눈물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베토벤의 ‘운명’으로 설정된 전화벨은 웅장하게 들렸다. 시계를 보니 11시 정각이었다. 이 시간에 전화가 올 일은 없다.
문득 지나간 기억이 떠올랐다. 광우, 영인, 상면이 한 약속이었다.
광우가 했던 약속은 중학교를 다닐 무렵, 친구들과 한 약속이었다. 거창한 것도 아니라 쉽게 잊어버릴 약속. 누군가 자신이 보는 책에 흥미를 보일 때, ‘나 다 보거든 너 빌려줄게.’라고 말하는 정도의 약속이었다. 정작 책을 다 볼 때쯤이면 상대도 나도 잊어버리는 그런 약속.
영인이 한창 죽음에 관심이 많고, 모두가 이에 대해 이야기하길 좋아했을 무렵에 한 약속이었다. 천당과 지옥이 있을까? 너무도 유치했지만, 진지하게 토론했다. 천당과 지옥이 있다면 어디에 있을까? 정말 존재하기는 할까? 그렇다면 그 곳에서도 또 죽음을 맞이할까? 아직 제대로 된 종교 교육을 받지 않았던 때라 우리는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었다.
한참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존재하는지 증명할 방법이 없을까?’라는 주제에서 꽉 막혀버렸다. 당시의 상상력으로 가능한 방법은 거의 꺼내놓은 상태였다. 침묵을 깬 것은 상면이었다.
[전화 해주는 것은 어때?]
[전화?]
영인이 가장 큰 관심을 보였다.
[응, 전화. 죽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도 전화는 있지 않을까?]
[글쎄……. 난 죽은 사람들한테 전화 왔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광우는 이 의견에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영인은 동조했다.
[죽은 사람은 현생에 관심이 없어져서 그럴 수도 있잖아. 다시 안 올 곳인데 신경 쓸 필요 없다 이거지.]
[그치?]
상면이 조심스레 의견을 피력했다.
[우리는 죽어서도 서로한테 연락을 주면 되잖아.]
[그런데 죽으면 목소리를 못 내잖아. 어떻게 알려주지?]
셋은 다시 침묵을 경험했다. 이번에는 영인이 침묵을 깼다.
[특정한 시간에 전화를 하고, 끊는 건 어떨까?]
[그거 괜찮다. 12시 쯤 전화를 하고, 5분 쯤 울리다가 끊는 거야. 어때?]
영인은 이 생각에 반대했다.
[기왕이면 ‘천당’과 ‘지옥’을 구분해서 전화하자. 그런 것 없이 그냥 모두 ‘똑같은 곳’으로 가면 10시에 전화를 하는 거야. 죽은 사람이 천당에 있으면 11시에 전화를 하고, 지옥에 있으면 12시에 전화를 하는 거지.]
[좋아!]
광우는 이 약속을 완전히 잊은 줄 알았다. 그래서 너무도 생생한 옛 기억을 의심했다. 그 동안에도 전화는 계속 울렸다. 무심코 전화를 받으려던 광우는 손을 멈췄다. 어차피 광우의 집은 방음 처리가 잘 돼서 가족이 깰 염려가 없었다. 광우는 시계를 보며 기다렸다.
11시 3분. 11시 4분. 11시 4분 47초.
전화는 그 때까지 계속 울렸다. 그리고 11시 5분이 되는 순간, 전화 벨소리가 멈췄다. 광우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이것을 대단한 우연의 일치로 볼지, 지친 심신이 만든 환상일지 고민했다. 광우는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오후 11시에 이것은 현실이며, 우연도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매일 밤 전화벨이 울린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
광우는 전화선을 빼놓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휴대폰으로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발신자표시 제한으로 온 전화는 어김없이 11시마다 울렸다. 처음에는 공포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상담할 수도 없었다. 자신의 상황을 우습게 여기거나, 미친 사람으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곧 냉정을 되찾았다.
이 약속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과 상면뿐이 아니었다. 지금은 연락을 끊은 영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발신자표시 제한의 이유도 알 것 같았다.
광우는 끝까지 미뤄왔던 일을 시작했다. 영인이 여러 가지 명목으로 돈을 빌려갔을 때부터 의심을 품었지만, 의리 때문에 시행하지 못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우정을 빌미로 돈을 갈취하고, 친구의 죽음까지 이용해 자신을 괴롭히는 영인을 참을 수가 없었다. 영인은 흥신소에 연락을 넣었다. 뒷조사를 부탁할 참이었다. 일말의 죄책감은 남았지만, 이제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결정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에 대비해 결과는 너무도 금방 나왔다.
전화를 한 것은 영인이 맞았다. 영인의 휴대폰 전화와 가게 전화로 자신에게 전화한 것이 확인 되었다. 광우에게 정신적 스트레스를 주려던 것 같다. 하지만 전화의 주인공이 영인이었다는 것보다 충격적인 것이 있었다. 그의 과거였다.
영인은 과거 폭행으로 인해 두 번의 수감 생활을 했었다. 또 재판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죽었다던 공장장의 살해 혐의였다. 술에 취한 두 사람 사이에 다툼이 있었다. 이를 진술한 목격자가 있었는데, 목격자는 나중에 이 말을 철회했고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의심스러운 수입으로 지금의 설렁탕 가게를 연 것 같다는 평가도 있었다.
영인의 과거가 순탄하진 않았을 거라 추측했던 광우지만, 진실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광우는 평가서를 몇 번이고 반복해 읽다가 전화기를 들었다. 신호음이 세 번째 쯤 울렸을 때, 광우는 전화를 끊을까 고민했다. 긁어 부스럼 같았다. 하지만 미처 끊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나 광우야.]
상대방은 아무 말이 없었다.
[매일 밤 11시에 전화하는 사람이 너란 거 알고 있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무슨 말 하는 거야?!]
영인은 짜증스럽게 물었다.
[발신자표시 제한으로 해도 소용없어. 네 번호라는 거 확인했어. 친구 죽음 가지고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왜 이렇게 변했어?]
그 말이 신호였다. 영인은 불같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뭐? 변해? 지금 누가 누구한테 변했다고 하는 거야. 혼자 성공했다고 우리 같은 건 아예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지? 대단하네! 대단해! 아주 혼자 잘났어!]
[무슨 말을…….]
[그래, 전화 내가 그랬다. 잘나신 분이 잘 지내는 모양새가 아니꼬워서. 잘 나가셔도 예전에는 겁쟁이였잖아? 겁에 질려 벌벌 떨기라도 했으면 좋다고 생각해서 했다. 그래서 뭐? 고발하게? 고발해! 시발!]
영인은 흥분하여 말을 쉴 새 없이 내뱉었다. 광우는 그 말 속에서 한없는 분노와 열등감을 느낄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만나지 못한 세월 동안, 서로에게 어떤 차이가 생겼는지 알 수 있었다.
[아니. 걱정 안 해도 돼. 고발도 안 하고, 너한테 빌려준 돈도 받을 생각 없어.]
[이젠 돈 자랑이냐? 잘났다, 젠장.]
[돈 자랑 아냐. 친구한테 빌려주는 돈은 원래 받을 생각 없이 줬었어.]
광우는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힘들 것 같다. 어떤 형태든지 서로 연락하지 말자. 너한테 정말 실망 많이 했다. 수신거부 할 테니까 전화해도 소용없어. 끊는다.]
[야! 야! 끊지 마! 이 새…….]
광우는 전화를 끊자마자 수신거부 목록에 영인을 입력했다. 광우는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피웠다. 며칠 사이에 친구를 둘이나 잃었다. 그 사실이 너무도 답답하고 슬펐다.
◆
광우는 일상을 되찾으려 애썼다. 평일에는 가족과 업무에 충실했고, 주말에는 자신을 위해 드라이브를 했다. 예전만큼 즐거운 기분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기분전환이 됐다. 어느 날, 둘째 딸이 자신도 데려가 달라고 요구했다. 자신이 도시락도 준비할 테니 어디 경치 좋은 곳에 다녀오자고. 광우는 그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딸은 일요일 아침부터 부산하게 도시락을 준비했다. 수능을 치고 난 터라 꾸미는 것도, 노는 것도 부쩍 관심이 많아졌다. 아빠로서 광우는 그런 딸이 예쁘게만 보였다. 그리고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둘 모두 앞좌석에 앉았다. 경치를 함께 즐길 생각에, 오랜만에 많은 대화도 나눌 생각에 광우는 들떴다. 딸도 마찬가지 인 것 같았다.
[어디로 갈까?]
[당일치기로 바다 갈 수 있어요?]
[바다?]
딸은 수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응, 겨울 바다 보고 싶었어.]
[2시간이면 갈 수 있을 거야. 좋아, 가자!]
광우는 기분 좋게 차를 몰았다. 동해는 불가능해도 서해는 볼 수 있을 것이다. 딸은 준비해 온 음악을 틀었다. 잔잔한 음악이 귀를 간질이고, 햇살은 따뜻했다. 광우는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에 더없이 행복했다.
꿈이 아니었을까?
눈을 떴을 때, 든 생각이었다. 너무도 생생한 기억이었지만, 침대에서 눈을 떴기 때문에. 하지만 자신이 언제 정신을 잃었는지, 왜 하얀색 천장을 보고 있는 것인지,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광우는 병원에 있었다.
◆
광우는 진실이 주는 잔혹함을 항상 맛봐왔다. 첫 연애 상대가 이별을 고하며 말했던 진실, 부하 직원이 자신에 대해 뒤에서 하곤 했던 말, 친구의 과거. 하지만 이번만큼 진실이 괴롭고 거짓이라 믿고 싶은 적은 없었다.
광우가 정신을 잃은 것은 교통사고 때문이었다. 뒤에서 빠른 속도로 부딪힌 차 때문에 광우의 차가 균형을 잃어 구른 것이다. 광우의 차는 가드레일에 부딪히고 언덕을 두 번 굴렀다. 차는 뺑소니였고, 인적이 드문 곳이라 신고가 늦어졌다. 결국 광우와 딸 모두 심한 부상을 입은 채 오랜 시간 추위에 노출된 것이다. 치료가 늦어진 터라, 의식을 찾은 것은 이틀이나 지난 뒤였다.
뺑소니 범은 멀리 도망가지 못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영원히 도망가 버렸다. 광우의 차를 들이받은 충격으로 노후 된 차의 앞바퀴가 흔들거렸던 것 같다. 결국 빠른 속도로 달리던 차에서 오른쪽 앞바퀴가 튕겨져 나가버렸고, 차는 그대로 추돌, 폭발하여 운전자는 즉사하였다. 영원히 잡을 수 없는 곳으로 간 것이다.
과속단속 카메라에 찍힌 번호판으로 사고를 낸 운전자가 영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경찰의 조사에 따르면 광우를 상당히 악한 이로 생각하고, 복수하겠다는 말을 줄곧 했다고 한다. 광우는 어이가 없어 분노조차 표현하지 못 했다. 딸은 머리에 많은 출혈이 있었지만, 고비는 넘겼다고 했다. 집중 치료실에서 회복실로 옮긴 다음날 의식을 찾을 수 있었다. 광우에게는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눈을 뜬 딸의 첫 마디가 광우를 울렸다.
[아빠 무사해서 다행이야. 겨울 바다 보러 가기로 했잖아. 약속 못 지키는 줄 알았어.]
광우는 딸의 손을 꼭 잡았다.
◆
닷새의 치료와 이틀의 안정 기간을 거치고, 두 사람은 모두 퇴원했다. 딸은 매달 정기검진을 받기로 했다. 머리를 다친 경우, MRI와 CT 촬영에 보이지 않는 위험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광우는 왼발에 깁스를 한 채로 다시 출근하기로 결정했다. 가족들에게는 끝끝내 단순 사고로 설명했다. 광우는 영인을 완전히 기억에서 지우고자 했다.
광우는 가족들에게 좋은 기억을 다시 심어주고 싶었다. 때마침 장모님의 생신이 있었다. 광우는 그 핑계로 가족들을 모두 제주도로 떠나보냈다. 며칠 동안 푹 쉬면서 사고에 대한 기억을 희미하게 만들고 싶었다. 따라서 출발을 서둘렀다. 그리고 자신은 다시 출근하기 위해 준비를 했다. 우선은 교통사고로 망가진 휴대전화를 수리했다. 업무상 중요한 연락이 왔을지도 모르므로 쉽사리 바꿀 수가 없었다. 그리고 새로이 연락하기 위해 최신형 휴대전화도 구입했다. 광우는 컴퓨터 앞에 앉아 밀린 업무를 전자메일로 받아 읽어보았다.
얼추 업무를 마친 것이 오후 10시 20분경이었다. 광우는 그제야 수리한 휴대전화의 전원을 켰다. 부재중 전화 28통. 문자가 4건이었다. 문자의 내용은 전자메일에서 확인한 것과 동일했다. 첫째 아들이 사고가 난 사실을 알렸기 때문에 이쪽으로 온 연락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특이한 것이 광우의 눈에 띄었다. 발신자표시 제한으로 온 20통의 전화였다. 그리고 전화가 온 시간은 모두 오후 11시와 12시를 가리켰다. 광우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깁스 안에 갇힌 왼발이 더욱 갑갑하게 느껴졌다.
갑자기 집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베토벤의 ‘운명’이었다. 시계를 보니 오후 11시였다. 광우는 초조함을 느끼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지금 이 고통은 그때부터 시작한 것이었다. 최초의 우정을 느꼈던 친구들, 그리고 터무니없는 약속에서 시작된 것이다. 나중에 어떤 형태로 내게 돌아올 줄 모르고 섣부르게 저지른 행동에 대한 보상인 것이다.
베토벤의 ‘운명’은 5분 동안 연주되고 멈췄다. 쿵쾅거리며 심장 소리에 광우는 심장이 터지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귓가까지 심장박동이 전해졌다.
영인은 죽었다. 상면도 죽었다. 우리 셋만이 이 터무니없는 약속을 했고,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 전화를 한단 말이지?
광우는 빳빳하게 굳어버린 몸을 움직여 전화기를 들었다. ‘부재중 전화 1통, 발신자표신 제한.’이란 문구가 보였다. 그리고 그 밑에 23:00 이란 숫자도 또렷하게 보였다.
광우는 아랫입술이 피가 날 때까지 깨물었다. 지금 상황에서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물어볼 수도 없었다. 광우는 12시가 오지 않기를 바랐다. 왜인지 모르지만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12시에 올 무언가를 확인하고 싶었다.
11시 36분.
11시 44분.
11시 57분.
광우는 떨리는 오른팔을 왼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이건 나의 환상이야. 사고를 겪고 나면, 이런 증세가 있을 수 있어. 분명 이걸 지칭하는 용어도 있을 거야.’
광우는 자신을 설득하듯이 되뇄다.
‘이건 나의 착각이야…. 착각이야…. 착각이야….’
운명 교향곡이 울렸다.
눈을 꼭 감았기에 그 소리는 더욱 또렷하게 느껴졌다. 광우의 손에 쥐어진 전화기에서 나는 소리였다. 광우는 이 소리마저 착각이길 바라며 눈을 떴다. 그리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발신자표시 제한.’
‘a.m. 00:00'
광우는 갑작스레 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까와 같은 긴장도 두려움도 없어진 것 같았다. 떨림은 멎었다. 심장의 두근거림만 귓가에 울릴 뿐이었다. 광우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검지를 천천히 움직였다.
무엇에 홀린 것처럼 광우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광우는
듣고 싶지 않았던 대답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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