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극 얘기를 하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어야 겠다 싶어 서투르게 씁니다.)

[명배우시리즈 1] 손숙의 '셜리 발렌타인'
2011.11.18-12.4,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마지막 공연일이었습니다. 휴가 전 예매 해 놓고, 나와서 어머니를 모시고 같이 갔습니다.
예술의전당에서 '명배우시리즈'라는 타이틀을 내건 첫 연극 공연인데다, 혼자서 15역을 소화하는 손숙 씨가 어떻게 이끌어 나갈까 싶어 상당히 기대하고 갔습니다.

예술의전당은 주로 음악, 어쩌다 전시회 보러 가고 연극으로 간 건 처음이었습니다.
자유소극장이 오페라하우스 건물 안에 있어서 의외였습니다.
연극과 오페라를 전혀 관계없는 장르로 생각해서, 건물도 따로 있을 줄 알았거든요.
음악당에서 제일 작은 리사이틀 홀보다도 작았습니다. 연극에 아주 좋은 객석이었습니다. 2층이나 3층에 있어도, 어느 자리에 있어도 명확히 잘 보입니다.
관객은 대부분 중년 이상이었고, 가족 단위로 온 어린아이 두엇을 빼면 제가 가장 어린(?) 관객이었을 겁니다.

어두워지고, 부모님 세대나 그 이전 느낌의 팝송이 흐르다가 밝아지고, 손숙 씨-이제부터는 셜리라고 해야 할까요-가 나왔습니다.
배우는 이제 일흔을 바라보는 분이고, 셜리는 마흔 여덟입니다. 프로그램 팸플릿 중 인터뷰 부분에 이에 대한 명언이 있었습니다.
'배우는 자신의 나이보다 위아래로 20년은 거뜬히 넘나드는 법이에요.' - 정말 맞았습니다. 눈앞의 셜리는 딱 40대 후반의 주부였습니다.
셜리는 무척 고독하고, 일만 하는 우리 어머님들 같은 인물입니다. 툭하면 "벽아, 벽아"하면서 벽에게 말을 겁니다.
전반부에서는 "벽아~"와 (그놈의) '칩스 앤 에그'가 집요하게 기억납니다.
빵에 버터를 발라 자르고, 감자를 썰고 튀기는데, 진짜였습니다. 노릇노릇한 냄새가 났습니다. 요리 못하는 사람은 이 연극 못하지 않나 싶어 피식 웃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사랑해'라고 말하면, 자동적으로 아무렇게나 대해지게 된다는 대사가 기억납니다.
"내가 그냥 이웃집 여자였다면 그인 내게 더 친절하게 굴었을 거야. (중략) 재밌어, 안 그래, '사랑해'라는 말."

그동안 부대에서 선임들은 예쁜 배우, 아이돌들이 나오기 때문에 드라마를 봤습니다.
부대에서 봤던 그런 건 연기라고 부르기 부끄러워질 정도로, 오늘의 공연은 수준이 달랐습니다.
TV 예능프로에서 어느 드라마의 대사를 시키면, 고함을 지르고 대성통곡을 하면 열정 운운하며 추켜세우는 걸 봤습니다.
셜리는 슬퍼하다가 분노하고, 깔깔거렸지만 과도한 감정은 없었습니다.
감정의 과잉은 되려 몰입을 방해하는데, 절제가 느껴져 좋았습니다.
딱 필요한 만큼만 감정을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셜리는 그리스로 떠납니다. '일탈'이라고 쓰지 않는 것은, 다시 그 생활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후략 - 지나친 스포일러가 될까 봐요.)

생각나는 대사들.
"여자 둘이서 그리~스에 간다고요? 역겨워요!"(딸의 대사)
"만일...어쩌다...내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날 그리워할 사람이 하나라도 있을까?"(이하 셜리)
"내 마음 속에는 이만큼 많은 것이 있는데, 이렇게 작게 살았어요."
"낭비한 삶은 죄에요. 우리는 죽어가고 있어요. 우리가 낭비한 삶의 무게가 우리를 죽어가게 만들고 있어요(대사가 좀 헷갈리네요)"

뛰어난 연기를 본 대신, 연기에 대한 눈이 너무 높아져 버렸습니다. 이제 발연기는 못볼 듯.
다음 휴가나 전역 후 이 '명배우시리즈'는 꼭 챙겨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혼자서 열연하신 명배우 손숙 씨에게 경의를 표하며, 이만 자러 갑니다. 안녕히.

# 언젠가는....같이 이런저런 공연 보러 다니고 싶다-는 건 희망사항.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8 08:5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