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지끈거린다. 또 시작인가.


드드드득, 핸드폰이 앉은뱅이 책상 위에서 진동하며 제자리를 빙빙 돈다.
맘 같아선 배터리를 잡아 빼고 싶지만 망할 놈의 스마트폰. 이래서 똑똑한 것들은 쓸모가 없다.


새벽 5시. 하루를 시작하기엔 최악의 시간이다.


[수연아, 약 먹고 가야지.]
[아까 먹었잖아.]


누가 듣기에도 짜증이 묻어나는 목소리에도 엄마는 그저 웃기만 한다. 그 놈의 비타민이 뭐라고, 아침마다 한 주먹씩 온갖 영양제를 쥐어주는 게 엄마 노릇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 중 하나라는 게 그렇게 자랑스럽나? 내 머리로는 이해를 할 수가 없다.


따라붙는 엄마의 목소리에서 도망치듯 추위 속으로 걸어나왔다. 아직 해도 뜨지 않아서 깜깜한 새벽은 음울하다. 이 시간에 성범죄가 그렇게 많다던데. 매일 아침 느끼는 거지만, 어둠 속에서 신경을 곤두세운 채 걷는 것은 사람을 지치게 한다. 이 길이 얼마나 긴지, 몇 분이나 걸리는지 뻔히 알면서도 항상 쫓기듯 걷다 보면 진이 빠지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를 비웃듯 들려오는 건


[수연아, 정말 안 춥겠어?]
[괜찮다니까. 엄마 추운데 얼른 들어가~]


'수연이 엄마'의 목소리다. 저 수연이는 대체 무슨 수연일까, 복도 많지. 얼굴도 예쁘장하니 그 정도면 귀염상에 십대 소녀 특유의 낭창한 몸은 어디다 내놔도 꿀릴 것 없이 늘씬하기까지 하다. 학교가 어디길래 맨날 이 시간에 학교를 가는 건지 모르겠지만 교복은 언젠가 인터넷에서 본 유명 외고의 교복이었던 것도 같다. 아님 말고.


얄궃게도 오늘은 '수연이'와 같이 앉게 생겼다. 한 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를 서서 가고 싶지는 않다만, 그렇다고 맨 뒷좌석 두 자리만 남을 건 또 뭐냐. 오늘 기분이 영 더러운 게 곧 그날인가 싶기도 하다.


버스 밖을 흘깃 내다보니 '수연이 엄마'가 창가에 앉은 '수연이'에게 손을 흔드는 것이 보인다. 마주 손을 흔들며 티없는 웃음을 짓는 녀석이 아주 같잖아 보인다. 넌 좋겠다? 복 받아서. 엄마가 매일 마중씩이나 나오고, 아주 지극 정성이야.


우리 엄마? 엄마는 밥도 안 하고, 빨래도 안 하고, 청소도 안 한다. 그래, 그냥 하는 거라곤 아침에 영양제 챙겨주는 게 다인 셈이다. 돈을 버는 것도 아니면서 맨날 집에서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 집안일이랑 양육은 죄다 아줌마한테 맡겨 놓고 엄마는 아주 푹푹 논다. 그 돈과 시간으로 차라리 바람을 피던가.


괜히 드는 뾰족한 생각은 집어 치우고 잠이나 자자 싶어서 눈을 감은 지 채 몇분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버스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놀라서 눈을 떴다. 아, 망할... 운전 하루이틀 하나. 갑자기 아무나 붙들고 욕을 퍼붓고 싶은 마음에 오히려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때, 내 눈에 그것이 들어왔다.


이게 뭐지, 하는 마음에 흘깃 시선을 던졌는데 그것에 마침 내 이름이 적혀 있어 무심코 집어들었다. 그리고 든 생각은 '또 너냐.' <Chinese 윤수연>이라고 써진 그것은 적당히 길쭉한 배지였는데, 보아하니 명찰인 것 같았다. Chinese면 설마 중국인이란 소린 아닐거고, 중국어과인가? 어린 나이에 아주 잘났네, 남들은 영어 하나 잘하기도 벅차다는데 중국어까지 하시고.


노려보는 것을 느끼는 감각은 뭐라고 불러야 하지? 촉각은 아닌데. 어쨌든 내 시선을 느낀 걸까, '수연이'가 갑자기 눈을 떴다. 나는 지레 놀라 손에 들고 있던 명찰을 슬그머니 내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내 눈빛을 뭐라고 생각한 건지 설핏 웃으며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다시 잠을 청하는 녀석을 보다 갑자기 깨달았다. 난 이걸 돌려 줄 생각이 전혀 없다. 왜지? 뭐, 상관 없겠지. 어차피 가진 것도 많은 녀석인데.


'수연이'와 함께 시작한 하루는 항상 거지같다. 아니, 엄마와 시작한 하루라서 그런가? 두 사람 중에서 어느 쪽이 독립변수인지 모르겠다. 양쪽 다라도 상관 없다. 어쨌든 나는 엄마 사랑 먹고 자란 태가 나는 고 이쁘장한 것이 얄밉고 영락없이 곱게 산 귀한 집 따님인 우리 엄마도 짜증난다. 결론: 두 사람 다 좀 안보고 살 수 없나. 아차, 이건 결론이 아니구나, 의문형이니까.


돌아오는 길에 아파트 앞에 경찰차가 가득인 걸 보고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역시 나쁜 일 시끄러운 일 지저분한 일 보면 눈 찌푸리면서도 솔깃한 게 사람 심리라. 나는 사람이 가득 모인 아파트 앞에 다가가 귀를 쫑긋 세운 채 기웃거렸다. 오호라, 뭔지는 모르겠지만 저 인간이 범인인가보다. 멍청하긴, 돈 있는 것들이 더하다고 이 동네 경비가 얼마나 심한데 여기로 왔대. 저 아랫동네 가면 적당히 알부자에 적당히 졸부인 사람들 넘쳐나는데. 속으로 범인의 아둔함을 비웃는 찰나, 난 내 눈을 의심해야 했다.


경찰들에게 부축받아 아파트 사이에서 비틀비틀 걸어나오는 그녀는 '수연이'였다. 아니, 이젠 풀네임으로 불러줘야 하나? 어쨌든 맨날 봐오던 그 엄친딸 여고생 윤수연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봐오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단추가 다 떨어진 교복 블라우스에 속옷은 버클이 풀어져 가슴을 간신히 가리고 있고, 치마도 한쪽 옆이 다 튿어져 하얀 허벅지가 훤히 보였다. 얼굴은 더 가관이다. 나름 예쁘장한 얼굴인데 뭘 어떻게 잘못 맞은 건지 아주 퉁퉁 붓고 피투성이였다. 뭐야, 너 맞았어? 난 안에서부터 차오르는 기묘한 감정을 간신히 억누르며 그녀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다음 순간, 그녀의 흰 다리 사이로 흐르는 핏줄기를 보고 난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


뭐야, 너 그런 거였어? 더러운 년.
누가 봐도 강간인 것이 뻔히 보이는데도 나는 괜히 그녀를 욕하고 싶었다. 왜냐고? 내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비방을 해도 녀석은 상처받을 게 분명했으니까. 아, 입이 근질근질해서 참을 수가 없다. 나는 만면에 가득한 미소도 숨길 겸 입가를 가린 채 아파트 입구로 향했다. 계단참에 고운 얼굴의 '수연이 엄마' 가 주저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옆에서 여경 하나가 막 사온 듯한 캔커피를 건네는 걸로 봐서 울다가 지친 것 같다. 아줌마, 안됐수다. 이쁜 딸 저 꼴 돼서 이제 어떻게 사나? 난 괜히 계단에 늘어져 있는 그녀의 긴 치마자락을 실수인 양 질끈 밟고 지나갔다. 비싸 보이는 치마 끝에 남은 내 구두자국이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다.


-그리고 눈을 떴다.


[환자분께는 과거의 자신을 현재의 자신과 분리시키려는 경향이...]
[성폭행을 당하기 전의 자신을 부러워한다기보단 질투에 가까운 감정을 표출하고 계시고....]
[...따라서 현재는 모친께 원망을 돌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닥쳐. 입 닥치라고. 말을 하고 싶지만 입이 바짝 말라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다.
돌아가지 않는 목을 간신히 움직여 시선을 옮기니 옆 침대 위에 엄마가 누워 있는 것이 보인다.
피투성이다. 엄마도, 나도.


[성폭행 당시 모친께서 기절하셨다고는 하지만 어찌됐건 실질적으로 환자분을 구제하는 데에 도움을 주지 못하셨다는 점에서 그런 감정을 키워오신 것 같고요, 당분간 약물치료 및 상담치료가 불가피할 것 같습니다.]
[구속건은 어떻게 되나요? 우리 딸, 감옥 가는 건가요?]
[뭐, 그 점은 제가 그쪽 전문가가 아니라 아직 확답은 드릴 수가 없습니다만, 일단 엄연히 살인미수니까요. 친족이고...]


오른손을 움직이자 왼손이 그대로 끌려온다. 이건 또 뭐야 하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 유명한 '은팔찌'다. 미치겠네. 피식 웃다가 타이트한 정장 자켓 주머니가 불룩한 것이 보여 손을 넣었다. 네모낳고 길쭉한 플라스틱 물체. 뒤를 보니 옷핀이 붙어 있다.


<Chinese 윤수연>


아아, 이것은 처음부터 내 것이었다. 처음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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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딩 윤수연=어른 윤수연의 과거 기억
인데 이걸 표현하기가 힘드네요ㅠㅠ

그나저나 아무 구상 없이 그냥 창 띄워서 떠오르는 대로 썼는데 왜 이런 음울한 게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ㄷㄷㄷ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8 03:34: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