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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월
「누워있는 모양의 달. 반달과 같음. 11～15일. 안정과 부드러움, 평온함을 상징. 날씨도 매우 포근하며 화가 잘 나지 않는 달이다. 무슨 일이든 와월에 시작하라 는 말이 있다. 계획을 세우고 회의를 하여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기간이다.」

힘겨웠던 적월기가 지나가고 와월기가 되자 스니게치의 날씨도 화창해졌다. 물론 화창해 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바깥에서 이를 드러내고는 웃지 못할 정도로 추운건 마찬가지였다.

“ 사메시아의 자비로군! ”

로소줌은 그의 투구를 오른쪽 겨드랑이에 낀 채로 경쾌한 걸음으로 막사를 나서며 와월기 첫 아침을 맞았다. 비록 짧긴 했지만 자신이 실제로 치룬 첫 전투에서 승리한 것에 그는 자신감이 한껏 올라 있었다. 처음부터 자신과 함께 이곳에 온 장교들은 물론이고, 병사들 까지도 그를 바라보는 표정이 한층 더 밝아졌다고 생각했다.

“ 같은 방식으로 나오지는 않을걸세. ”

잔질은 갑옷을 입지 않은 깔끔한 셔츠 차림으로 아침회의를 임했다. 계획과 중대한 회의에 적합한 와월기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침 회의는 어느 때보다 활기가 넘쳤다. 덕분에 로소줌은 잔질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견해를 마음껏 말했다.

“ 우리가 먼저 허를 찌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

로소줌은 한마디를 던지고는 잔질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러자 그는 재빨리 이어서 말했다.

“ 뮤케넬의 핵세아가 사미잇 평원에서 썼던 방법입니다만, 적군이 발견할 수 있게끔 별동부대를 협곡에 엉성하게 숨겨 놓고, 그것을 자신들의 기습에 대비한 준비라고 생각하여 우리별동부대를 포위하면, 미리 준비하고 있던 본부대가 적군을 한 겹 더 포위하여 별동대와 본진 안에 가둬서 섬멸하는 방법입니다. ”

“ 뼈가 드러나지 않는한은 고기맛은 보여줘야지. ”

잔질은 로소줌의 작전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고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로소줌은 잔질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가 부정적인 대답을 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밤새 뒤척이며 장교들과 생각한 작전이 일언지하에 묻혀버리자 짜증이 확 밀려왔다. 하지만 그는 웃으며 잔질에게 말했다.

“ 그럼... 오늘도 어제와 같은 것입니까? ”

잔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로소줌은 막사를 나오자마자 매어있던 밧줄을 발로 찼다. 허둥지둥 그를 따라 밖으로 나온 4명의 장교들이 그에게 말도 붙이지 못한 채 멀찌감지서 뒤를 따라갔다. 화를 누그러뜨려주는 와월기가 되었음에도 로소줌은 성이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이를 꽉 물고는 성큼성큼 길을 따라 걸어갔다. 그의 뒤를 따르던 장교들도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 자기가 얼마나 안다고. 그렇게 간단하게 사령관님의 작전을 무시할 수 있는 겁니까? ”

“ 싸우자고 한것은 자기면서 이제 와서 그 좋은 작전을 거부하다니요. ”

“ 아마 사령관님의 작전을 이해하지 못한게 아닐는지요. 너무 훌륭한 탓에 놀랐거나. ”

“ 그만하게 ”

로소줌은 간신히 절도 있는 목소리를 유지하며 말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았지만 장교들과 생각이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막사로 돌아온 그는 첩보원들이 산더미같이 가져온 주변의 지형과 적군에 대한 정보들을 모조리 펼치고는 몇 번씩 반복해서 읽기 시작했다.

“ 오늘 우리 자기 피로 목욕좀 시켜주려나. ”

막사 밖으로 나온 기삭은 팔을 좌우로 돌리고 목을 꺾으며 몸을 풀고는 자신의 애지중지 하는 칼을 꺼내 햇빛에 날을 비춰보았다. 2소대의 부관격인 마셈이 그의 옆에서 체조를 하며 말했다.

“ 당분간 안싸운다고 하던데? ”

기삭은 칼을 꽂아 넣으며 마셈에게 물었다.

“ 이렇게 날이 좋은데 왜? 우리 오기 전에도 열흘이나 이 삭막곳에 눌러앉아 있었다며. ”

“ 뭔 작전이 있겠지. 군단장이 내린 명령이래. 우리 사령관은 싸우자고 했다던데 거절당했다나... ”

마셈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기삭은 군단장의 명령이라는 이야기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 어제 죽은 자들은 전부 북방의 가로소 놈들이었다는군. 그놈들은 본래 미끼에 불과하지. ”

2소대 백인대장은 반짝이는 투구를 무릎에 낀 채 그의 작고 구부러진 단검으로 거칠게 면도를 하며 말했다. 주변에 있던 대원들이 물었다.

“ 아무리 잡아 봤자 쓸모없는 것들이라 이말이십니까. ”

“ 힘만 낭비하는 셈인거지. 내가보기엔 싸움이 길어질 것 같군. 서로 간부터 맛봐야하니까. ”

“ 쳇 간만 보다가 늙어 죽겠네. ”

그러자 다른 대원이 투덜거렸다. 항상 아는게 많은 부관 마셈이 빠른 말투로 대꾸했다.

“ 큰 싸움을 하기 전에는 어떤 놈인지 완벽히 파악을 해야 승산이 있다고 하지. 사핀에 사는 악명높은 짐승인 사미잇들은 아무리 약한 상대라도 달려들기 전까지 지루할 정도로 오랫동안 탐색전을 한다. ”

그러자 기삭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 아무튼 기다린 보람이 있을만한 최고의 싸움이 벌어질 거란 얘기군?  ”

기삭의 말이 끝나자 소대원들은 대장을 바라보았다. 대장은 아무 말 없이 이를 살짝 드러냈다.

“ 들었어? 빨리 끝나진 않을 거 같다는데. ”
구석에서 조용히 있던 휘미와 메지가 서로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메지는 숙영지 주변에서 뽑은 풀을 손질하면서 대답했다.

“ 확실히 이기기만 한다면 상관없겠지. ”

“ 사령관하고 군단장하고 마음이 안맞는 것 같다더군. ”

“ 그런 어린 무쇼냐쇼즈 따위가 뭘 제대로 알겠어? ”

휘미의 말에 대답이 들려온 곳은 엉뚱한 쪽이었다.

“ 무소냐쇼즈에 대해서 아는가? ”

그의 얼굴을 정면에서 바라본 것은 둘 다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마를 전부 가리는 갈색 머리에 남자 치고는 갸름한 턱선, 그러나 턱선을 완전히 가리는 턱부터 구렛나룻을 잇는 수염. 얼굴에 비해선 다소 크지만 흔들림 없는 눈동자였다. 키는 휘미보다 한뼘은 컸고 팔다리는 매우 호리호리했다. 하지만 목선부터 이어진 몸의 근육라인은 마치 도자기로 빗은 듯 갑옷 안에서도 뚜렷이 나타나고 있었다. 목소리는 차분하고 맑았고 생김새는 평소의 무표정일때는 어두운 물속같이 그늘졌었지만 두 학생 앞에 똑바로 서있는 지금은 빛이 날 정도로 환해보였다. 휘미는 그가 자신보다 기껏해야 5~6살 정도 밖에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휘미는 잠시동안 생각을 하다가 그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 제 앞에 적을 물리쳐주셨죠. ”

그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주변을 슥 둘러본 뒤 이들을 데리고 막사 뒤편의 한적한 곳으로 이동했다.

“ 디로단 ”

그는 기둥에 기댄 채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다. 두 학생은 왠지 모를 신비함을 풍기는 그에게 자신에 대해 정중히 소개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그들에게 물었다.

“ 무소냐쇼즈들에 대해 잘 아는거 같던데. ”

“ 같은 술집에서 술을 마신적은 있어요. ”

메지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디로단은 짧게 웃은 뒤 기둥에 목을 기대고는 말했다.

“ 이 나라는 꽤 웃긴 방식으로 장군을 키우더군. 진짜 인재를 찾아내서 키우는게 아니라 비리를 통해 뽑은 자들을 억지로 인재로 만들지. ”

“ 윔 사람이 아니신가요? ”

휘미가 놀라 물었다. 언어에 대해 학문적으로 공부한 휘미가 보기에도 그는 완벽한 윔어를 사용했다. 디로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 운좋게 표준어를 배운거다. ”

“ 어디서 왔나요? 뮤케넬? 롯사르? 사핀은 아닐테고. ”

“ 아직 비밀. ”

디로단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 아무튼. 무소냐쇼즈가 오히려 적보다 더 해가 되는 존재가 될 수도. ”

디로단은 일행과 몇마디를 가볍게 나누다가 주먹을 이마에 톡톡 두들기는 독특한 인사를 하고는 막사쪽으로 사라졌다. 두학생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디로단이 가고 나자 두 학생은 막사의 구석에 앉아 조심스럽게 시험관을 기울였다. 메지는 휘미의 엄지손가락을 눌러 붙잡고 있었고 휘미는 이를 악물고 액체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메지의 손이 바르르 떨리면서 액체 한방울이 휘미의 손가락에 떨어졌고 휘미는 그순간 소리를 질렀다. 메지는 휘미의 입을 막았다. 근육이 경련이 일어나듯 파르르 떨었지만 통증은 없는 모양이었다. 잠시 뒤 경련이 끝나자 휘미는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굽혀보았지만 살짝 뜨거운 기운이 남아있는것 외에는 변한게 없었다.

“ 독성은 없다는 얘기네. ”

“ 그냥 미치광이 풀 용액은 아니야. ”

“ 맙소사 설마 예상이 맞다는 이야기인가? ”

휘미는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메지는 통의 뚜껑을 잘 막은 뒤 다시 그의 품속 깊은 곳에 집어넣었다.

“ 도대체 어떤 효과가 있을까? 그냥 물리적인 힘이 강해지는걸까? 동물한테라도 먼저 사용해 볼껄...”

“ 보물이라면 나도 하나 있지. ”

이번에는 휘미가 주머니 깊은곳에 손을 집어넣었다. 메지는 금방 휘미가 무엇을 꺼내려는지 눈치 채었다. 메지는 입모양만으로 휘미에게 말했다.

“ 잘 있어? ”

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손으로 청단월날 뽑은 풀을 만져보더니 말했다.

“ 너무 지나치게 잘있어. 시들지도 썩지도 않아. ”

메지는 혀를 내둘렀다.

“ 여기서 나가면 풀의 정체에 대해 제일 먼저 알아보자. 근데 다이지에 돌아가지 않고 풀을 알아볼수 있는 방법이 있으려나 ”

“ 나갈수는 있을까? ”

메지의 질문에 휘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돼. 항상 조심하고. 전투가 벌어지면 우린 뒤쪽에서 있자. ”

‘ 그런다고 달라지는 게 있으려나... ’

메지는 혼자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말을 내지는 않았다.

하루 동안 정비를 모두 마친 윔 군단은 차분한 형태로 밤을 맞았다. 적이 또 쳐들어올 거라는 소문에 다들 바짝 긴장한 채로 경계를 하고 있었다. 막사에 누워있던 2소대 대원들도 뜬눈으로 칼을 쥔 채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었다.

“ 먹이를 줘야 돼. 먹이를 줘야 돼. 먹이를 줘야... ”

“ 쉿! 기삭. ”

칼을 다리사이에 끼고 두손으로 껴안고 있는 기삭의 허리를 싯딜이 발로 찼다. 둘은 항상 티격태격 하면서도 서로 항상 붙어다녔다. 휘미는 이들이 절친한 동료라는걸 알기까지 참 오랜시간이 걸렸다. 대장은 처음에는 잠을 안자는 자는 윗입술을 잘라버리겠다고 불호령을 내렸지만 소대의 분위기가 전혀 바뀌지 않자 포기한 채 자신도 주변대원들과 조용히 토론을 했다.

“ 머릿속으로 장면을 그려보라고. 어떻게 싸울것인가. 어떤 공격을 할 것인가. 칼이 찔러들어오면 왼쪽으로 피할것인가 오른쪽으로 피할것인가. 쳐 낼것인가? 만약 나보다 강한 적을 만난다면? 마음속으로 이걸 준비하고 싸우는거랑 갑작스럽게 싸우게 되는거랑은 하늘과 땅 차이야. ”

용병 8년차가 되어 이젠 윔어도 능숙하게 구사하는 롯사르 출신의 으롬은 휘미와 메지를 옆자리에 불러 특별히 이야기를 해주었다. 하늘해협을 건너 남쪽에 있는 롯사르는 토양이 척박하고 대부분의 땅이 바위이며 날씨가 무덥다. 그런 롯사르에서 온 으롬이 추위를 남들보다도 잘 견딘다는건 분명 존경스러운 일이었다. 으롬은 그의 갈색 뺨을 주먹으로 긁으며 말헀다.

“ 우선 머릿속에 너 자신과 적을 한명 그려. 어제 마주쳤던 놈들중 하나를 생각나는 대로. ”

휘미는 머릿속으로 칼을 든 자신을 생각해 보았다.

“ 긴장이 잘 안돼요. ”

“ 와월기라 그럴거다. 조금만 더 노력해봐. ”

으롬이 당연하다는 듯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깜빡이며 이유를 설명했다.

휘미는 다시 자세를 고쳐잡은뒤 상상을 시작했다 가까스로 어제 자신에게 칼을 내리쳤던 가로소인을 생각해 내었다.

“ 이제 녀석을 자유롭게 움직이게 놔둬. 너를 보고 달려들 때까지. ”

휘미는 다소 상상하기 힘들었지만 적이 움직이는 것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 너희를 본 녀석은 이제 곧 너를 향해 칼을 겨눌꺼다. 너희의 심장을 도려내기 위해. ”

휘미는 어제 칼을 휘두르던 가로소인을 그대로 재현해 보았다. 자기 자신도 칼을 빼들고 있다고 생각하고 전투에 임했다. 어제는 피했지만 이번에는 그가 휘둘렀던 칼을 막아보았다. 다소 몸에 진동이 오겠지만 칼을 쳐냈으니 그 틈을 타서 이쪽으로 파고든다면? 아마 그를 죽였을지도 모른다.

“ 으음. ”

휘미는 신음을 흘렸고 으롬은 모포에 얼굴을 파묻고는 한쪽눈만 뜬 채 그런 휘미를 바라보았다. 그가 말했다.

“ 죽였나? ”

휘미는 숨을 크게 들이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으롬은 그의 하얀 이를 드러내 웃으며 말했다.

“ 소질이 있군. ”

휘미는 고개를 빼어 으롬 뒤의 메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메지는 아무런 행동도 없었다.

“ 메지 자는거야? ”

“ … ”

휘미는 그가 죽은듯이 조용하자 놀라 그의 어깨를 흔들었고 휘미의 손이 닿자마자 그는 신음을 내며 벌떡 일어났다. 으롬까지 놀라 반쯤 몸을 일으켰다. 메지는 추운 막사 안에서 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 뭐야. 놀랐잖아. ”

“ 후... ”

그는 고개를 미친듯이 좌우로 흔든 뒤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으롬이 그런 그를 향해 말했다.

“ 설마 그걸 상상하고 있던거냐? ”

메지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 나보다 강한 적이었는데 그가 내지른 공격을 막고는 눈에 미끄러졌어. 칼을 내리치려는 순간 몸을 굴려 피했지만 그러는 바람에 옆의 적을 밀어버렸지. 화가난 두명이 나를 향해 동시에 칼날을 휘둘렀고 난... 한놈의 칼을 다른놈쪽으로 쳐 내렸는데 그러자 두 적군 서로의 칼이 부딪혔다. 놀란 틈을 타서 재빨리 칼을 휘둘렀는데 어이없게 내칼이 적군의 머리에 박혀버렸어. 그래서 손을 놔버렸는데 옆에 있던 다른 적군이 얼굴이 시퍼렇게 되더니 나한테 칼을 휘둘렀고  꼼짝없이 죽는구나 했는데 그때 깬 거야. ”

휘미와 으롬은 똑같은 표정을 짓고는 메지를 바라보았다. 휘미가 말했다.

“ 그게... 다 상상이 된다고? ”

메지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고 으롬은 껄껄 웃었다.

“ 내 짐작이 맞았다. 너희는 이론을 배우는것 보다는 머릿속으로 그렇게 상상하고 노는게 더 전투에 도움이 될거다. ”

“ 정말요? ”

“ 부럽군. 메지 정도의 능력이면 상상으로 아가씨 하나 벗기는 것도 식은죽 먹기겠는데. ”

으롬이 말하자 이곳저곳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 여. 뭐를 어쩐다고? ”

“ 벗겨서 어쩐다는거야? ”

여자라는 단어가 나오자 어떻게 알았는지 소대가 시끄러워졌고 대장은 숨을 크게 들어마신뒤 기지개를 펴듯 큰 목소리로 말했다.

“ 조~용! ”

막사가 다시 잠잠해지고 나자 으롬이 말했다.

“ 용병에게 민감한 게 세가지가 있어. 여자, 돈, 그리고 자기 칼. ”

휘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 마지막 세번째는 자기 목숨이라고 할 줄 알았는데. ”

“ 틀린말도 아냐. ”

으롬은 이해한다는듯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휘미를 정확히 바라보며 덧붙였다.

“ 자기 칼이 곧 자기 목숨이거든. ”

메지는 으롬의 등 뒤에 옆으로 누워서 그의 말을 몇 번 곱씹어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보급용 칼을 바라보았다. 장식이 없는, 그렇다고 굳이 실용적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그냥 대못 하나를 검막 한가운데에 정확히 박는데에만 신경을 쓴 듯한 검이었다. 게다가 칼을 관리하는 것에 서툴렀던 탓에 날도 처음보다 썩 날카로워 보이지 않았다. 애초부터 그는 전쟁에 관심을 가질 생각도 없었지만 지금생각으로는 다른 용병들이 자신만의 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은근히 부러웠다.

“ 어떤면에선 불공평하군. 난 오랫동안 노력해서 할 수 있었던 건데. 너나 메지같이 한번에 쉽게 자기상상을 만들어내는 사람도 있으니 말야 ”

으롬은 말을 마치고는 몸을 돌려 자기 칼을 끌어안고는 잠을 청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다음이었다. 보초를 서던 대원이 막사를 활짝 열어젖힌 시각과 뿔나팔 소리가 난 시각, 어느 것이 먼저인지 모를 상황이었다. 2소대원들은 약속이라도 한듯 주저 없이 한꺼번에 벌떡 일어나더니 막사 바깥으로 뛰어나가 줄을 섰다.

“ 젠장... 카지위여! ”

이들이 나갔을 때 숙영지 바깥은 이미 전투가 벌어진 다음이었다. 병사들의 납함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불빛이 춤을 추고 있었다. 뿔나팔 소리가 쇳소리와 함께 뒤섞여 뒤늦게 계속 울려 퍼졌다. 중대기가 아직 안올라간것을 본 대장은 주먹을 꽉 쥐고는 다른 소대기들을 따라 앞장서서 달려가기 시작했다.

“ 침착해라! 전부 왼발을 굴러라! ”

백인대장은 특유의 깨지는 듯한 쉰 목소리로 그렇게 외치며 울타리를 따라 계속해서 둥글게 달렸다.

“ 와아! ”

숙영지 남쪽을 지나갈 때였다. 2소대가 지나가던 지점 옆의 바로 울타리 수십 개가 순식간에 넘어지면서 100명 남짓한 한 무리의 적군부대가 숙영지 안으로 달려들어 왔다. 울타리가 무너질 것을 예상했다는 듯 멀리서부터 가속을 받은 상태였다. 이들이 정확히 노린 부분은 창고와 본부소대가 있는 곳이었다. 움찔 놀란 2소대원들은 순간적으로 균형이 흐트러졌고 백인대장은 칼을 머리위로 들어 커다랗게 돌리며 소대를 회전시켰다. 소대원들 전체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칼을 빼어들었고 적군들과 함께 그대로 뒤엉켜버렸다.

단연 돋보이는 것은 백인대장이었다. 대장은 적에게 절대 근거리를 내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기준에 맞춰 거리를 잰 뒤 리치가 아슬아슬한 위치에서 칼을 한방에 휘둘러 단박에 적을 쓰러뜨렸다. 으롬은 분위기를 타면서 싸우는 듯 했다. 그는 혼전 중에도 다소 뒤쪽에 쳐져 있으면서 전투의 분위기를 보고는 틈이 생기면 파고들어 소대원들을 도와주는 형식이었다. 백인대장 바로 왼쪽에 있던 기삭은 특유의 장난끼 반 살기반인 눈빛을 번뜩이며 자기 쪽으로 달려오게끔 적을 유도했다. 그는 항상 혼자서 상대하지 않고 주변의 싯딜과 함께 움직였다. 이들은 평소에는 파트너가 아닌척 하다가 기삭이 한번 강하게 쳐 내리면 싯딜이 얼른와서 마무리 하고 싯달이 유인하면 기삭이 뒤에서 기습하는 형식이었다. 평소에는 다투기만 하던 둘이지만 혼란속에서도 거의 한몸으로 움직이는 걸로 봐서는 호흡을 꽤 오랫동안 맞춰왔던 것으로 보였다.

문제는 휘미와 메지였다. 혼전이 생기자 잔뜩 당황한 이들은 상대를 볼 여유도 없이 칼을 휘둘러 대었다. 그나마 기초적인 훈련을 받았기에 처음보다는 나아졌다지만 체력도 기술도 부족한 이들은 무거운 칼을 쉼 없이 휘두르자 금방 팔에 무리가 오기 시작했다. 공포를 이겨내는 것도 큰 과제였다. 메지는 서너 번정도 적들의 칼을 받아내자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옆에 있던 소대원의 몸동작을 잠시 지켜본 그는 이를 물고는 자신도 모르게 칼을 쥐어 적의 빈틈을 향해 강하게 찔러 넣었다. 적은 가까스로 그의 공격을 막았지만 균형이 완전히 흩뜨려졌고 옆에서 튀어나온 다른 소대원의 칼에 가슴이 찔리고 말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짜릿함을 느꼈고 칼을 고쳐 쥐고는 적 깊숙한 곳을 향해 달려갔다.

양쪽 병사들의 눈이 한 남자에게 고정된 것은 싸움이 한참 벌어지고 난 후였다. 그다지 길지 않은 칼을 쓰는 그는 칼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칼을 휘둘러 대었다. 몸동작은 다른 사람의 두 배는 빨랐으며 점프를 해도 훨씬 높고 멀리 뛰었다. 동작은 크고 깔끔했는데 아무도 그와 2합이상 맞붙지 못하는 탓에 기술은 관찰 할 수도 없었다.

“ 디로단! ”

휘미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곁에는 벌써 사핀군이 7~8명이나 쓰러져 있었다. 그가 앞에 있던 적을 또다시 쓰러뜨리자 그의 주변으로는 아무도 접근하지 않았다. 몇 명은 칼을 늘어뜨린채 입을 벌리고는 그가 싸우는 것을 바라보았다. 디로단은 무표정한 얼굴로 칼을 빙빙 돌리며 다른 적들이 달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즈음, 혼전지 왼쪽에서 우렁찬 소리를 내며 중보병 부대 하나가 돌진해 왔다. 잿빛색의 깃발에는 서슬어린 칼날 하나가 또렷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 잿빛칼날이다! ”

누군가 소리 질렀고 잿빛칼날군단의 소대는 혼전지의 사핀군을 그대로 밀어붙였다. 옆구리를 제대로 맞은 탓에 사핀군은 혼란에 휩싸였다.
잿빛칼날 소대의 맨 앞에 선 백인대장은 커다란 키에 다른 자들보다 두 뼘은 더 긴 칼을 사용하였다. 지원군 부대와는 달리 백인대장을 제외하고는 잿빛칼날군단의 병사들은 모두 복장이 동일했다. 이들은 깃털이 달린 투구를 썼으며 털옷 안에 질긴 철갑을 입었다. U자모양의 중앙이 부푼 방패를 나란히 가슴앞에 대고 있었고 반대쪽 손에는 칼폭이 넓은 양날검을 들고 있었다.
이들이 지원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창고 쪽 격전지는 도망친 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든 적군이 전멸하였다.
휘미는 적군이 얼마 남지 않자 정신을 차리고는 메지를 찾았다. 하지만 그는 전투가 끝날때까지 그를 찾지 못했다. 대신 그는 두 백인대장이 마지막 적을 물리치고는 서로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았다.

“ 지원군단 2중대 2소대 백인대장이요. ”

“ 기스크요. ”

2소대의 백인대장과는 달리 잿빛칼날 소대의 백인대장은 자신의 이름으로 소개를 대신했다. 대장은 눈을 크게 떠 기스크를 바라보고는 악수를 하며 말했다.

“ 잿빛칼날 선두소대장이십니까? ”

2소대 소대원들은 자신들의 백인대장이 상대에게 경어를 사용하자 금방 눈치를 채었다. 기스크는 잿빛칼날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자가 맡게 되는 1중대 1소대의 백인대장인 것이었다. 소대 자체가 기세나 실력에서 굉장히 뛰어나다고는 다들 생각했지만 처음 본 잿빛칼날군단이 하필 군단의 선두소대 였다는것에 다들 놀라 있었다.
기스크가 투구를 벗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소대원들은 다들 경외로운 눈으로 기스크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그는 겉모습부터가 다른 사람을 압도하고 있었다. 2소대 백인대장이 그의 앞에 서자 주눅 드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두 대장은 악수를 마친 뒤 서로의 소대를 정비하고는 헤어졌다.

잠시뒤 메지가 먼저 휘미를 찾아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 메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