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zzrow
- 11 -
확실히 마약은 아니었다. 손 떨림, 환상, 식욕 감퇴나 타는 것 같은 갈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백일몽은 명수를 깊은 잠에 빠지게 했다. 그리고 불을 붙이는 순간, 강렬하게 염원했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재연해주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맛과 향을 느끼고 온도와 미묘한 떨림도 느낄 수 있었다. 현실보다 더 민감한 무언가를 전달했다.
처음 백일몽을 사용하고서 명수는 상자를 정리해 세탁기 안에 처박아두었다. 꿈에서 깨 현실로 돌아오고 느낀 것은 허무함이었다. 현실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달콤한 초콜릿 뒤에 따라오는 쓴 맛처럼, 그건 혀에 아릿하게 남아 콕콕 찔렀다.
오후 9시. 화영이 살아있는 남편에게 미소를 보낼 시간이었다. 자신이 아닌.
과연 그녀의 이름이 화영일까? 명수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백일몽이 보여주는 것은 잘 짜인 꿈이었다. 하지만 현실을 반영할까? 그녀의 이름이 궁금해졌지만 확인할 수 없었다. 겁이 났다.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명수는 갈증을 느껴 수돗가로 향했다. 수도꼭지에 머리를 기울여 물을 마시는데, 저번에 태우다 버린 담배꽁초를 발견했다. 엄청난 고통을 전해줬던 타임 허밍. 마법의 주문처럼 느껴지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어디 있는 거지?’
백일몽의 꽁초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가스레인지를 이용해 불을 붙이고 하얀 연기가 올라오는 것까지 일반 담배와 똑같았다. 하지만 이내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 다시 돌아가는 느낌. 따뜻하고 포근했다. 자신의 심장 박동이 귓가에서 두근두근 울리더니 이내 꿈속에 빠져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아무것도 없었다. 매캐하고 뿌옇게 변한 방을 상상했던 명수는 놀랐다. 연기는 물론 담뱃재도 없었다. 텅 빈 공간을 채우는 것은 허무뿐이었다.
명수는 컴퓨터를 켰다. 이런 마약은 듣지도 못 했다. 예전 학교 커뮤니티에서 마약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자신의 은밀하고 불법적인 경험을 올리면서 쾌감을 느끼는 어떤 남자였다. 마약은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어떤 느낌인지 자세히 올렸다. 그가 언급했던 마약은 한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백일몽’은 아니었다.
‘다만 이를 다룰 줄 아는 사람도 소수이고, 필요로 하는 사람도 소수라 알려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현승은 소수만을 위한 것이라 했다. 명수는 초록색 검색창에 ‘백일몽’을 검색했다.
‘충족되지 못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비현실적인 세계를 상상하는 것. 사전적 의미로는 한낮에 꾸는 꿈이란 뜻으로, '헛된 공상'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검색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블로그나 까페 글도 찾아봤다. 검색 결과를 여과 없이 보여주는 Google을 이용해봤지만, 백일몽에 관한 언급은 없었다. 적어도 자신이 찾는 약과 같은 타입은.
대관절 어떤 약일까?
궁금증은 쉬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궁금증보다 더한 그것도 텅 빈 위장에서 달싹거렸다. 마셔도 사라지지 않는 갈증 같은 그것은 ‘욕망’이었다.
- 12 -
엄청난 갈증을 느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이해할 감정이었다. 담배나 술이 생각나는 정도의 차원이 아니었다. 입 안이 바싹 말라서, 온 몸의 수분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상황. 혀가 뻣뻣해져 말 한 마디도 할 수 없을 때. 수일이나 계속된 허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껴질 만큼의 갈증. 기호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이 걸린 욕망 속에서 명수는 괴로워했다.
단 한 모금만 더. 백일몽은 자신을 유혹했다. 명수는 억지로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했다. 유명 연예인의 가십 기사에 집중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을 끄는 것은 축축하고 눅눅한 세탁기 안에서 꼬리를 살랑였다. 명수는 눈앞에 물 잔을 놓고 갈증과 싸우는 사람이었다. 시원한 물 한 모금이면 모든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이 한 모금을 시작하면 다시는 멈출 수 없다는 것을. 사례가 걸리고 기침을 하면서도 기어코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핥아먹을 것이란 걸. 명수는 엄지손가락을 물었다. 긴장하면 나오는 버릇이었다. 이로 잘근잘근 손톱과 여린 살갗을 물었다. 적당한 압박감이 도움이 되었다. 아니, 되었다고 믿고 싶었다.
[백일몽을 사용하시면 고객님은 원하는 꿈을 꿉니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백일몽’. 현실은 아니지만 잠에 든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매일 밤잠을 자야합니다. 하루에 몇 개비를 사용하더라도 잠을 자는데 영향은 없습니다. 원하신다면 밤에 사용하실 수도 있겠지요.]
현승은 다짐을 구하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제가 제시하는 조건이 있습니다. 백일몽은 낮에만 사용해 주십시오.]
[낮에만 말이죠?]
[예.]
현승의 대답에 명수는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밤에 사용하면 문제가 되나요?]
현승은 모호한 어투로 대답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리둥절한 명수에게 질문할 여지를 주지 않고 현승은 일어났다. 현관에 앉았는데도 바지에는 티끌하나 묻어있지 않았다. 현승은 선글라스를 다시 쓰며 덧붙였다.
[제가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때가 되면 찾아 올 테니 그 때까지 제 당부를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현승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만.]
그 이후로 현승의 연락이나 방문은 없었다. 500만원은 생각보다 큰돈이었다. 적어도 명수에겐 그랬다. 돈도 쓸 줄 아는 사람이나 쓰는 거라구. 명수는 남은 돈을 컴퓨터 옆에 던져뒀다. 밖에 나갈 일이 없었다. 그 일이 있은 후로는 식비로 몇 만원을 사용한 것이 전부였다.
허기를 참는데 익숙했다. 하지만 백일몽을 향한 갈증은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백일몽을 원했다. 마약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건 마약 이상이었다. 중독성이 있었다. 담배도 술도, 공유 프로그램을 통해 얻는 불법 음란물도 충족시키지 못한 욕망을 한 개비면 충족시킬 수 있었다. 그것도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형태로.
명수는 불을 끄고 이불을 덮었다. 그리고 잠을 청했다. 밤을 견뎌야 했다. 백일몽에 저항해야 했다. 마약이 분명했다.
500만원은 구실이었다. 마약에 중독되고 나면, 마약이 다 떨어지면 현승은 자신을 찾아 올 것이다. 그리고 다음에는 돈을 요구할 것이다. 한 개비에 백만 원입니다. 괜찮겠습니까? 현승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명수는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무릎을 꿇고 사정을 할 것이다. 원한다면 내 콩팥을 떼어가라고. 그리고 몇 개비 더 주면 나는 당신의 발에 입이라도 맞추겠노라고. 틀림없이 중독 될 것이다. 아니, 이미 중독되었다.
하지만 명수의 피는 이미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이면 명수는 굴복할 것이다. 세탁기로 열고, 백일몽을 꺼내 불을 붙일 것이다. 세탁기에 생각이 미치자, 새로운 공포가 명수를 괴롭혔다.
‘눅눅해져서 불이 안 붙으면 어떡하지?’
더 이상 중독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어서 백일몽을 내놔. 명수의 피가 목구멍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 13 -
명수는 축축해진 속옷을 벗었다. 묘한 흥분과 긴장감으로 떨리는 손 때문에 쉽지 않았다. 욕조에 가 속옷을 빨면서 명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백일몽은 대단했다. 아니, 명수의 상상 속 그녀는 대단했다. 길거리에서 만난 적 있던 어느 여성이었다. 명수는 청순한 이미지의 그녀가 하얀 어깨를 드러내는 순간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그 자극.
걱정했던 것과 달리 세탁기 속 백일몽은 멀쩡했다. 오히려 처음처럼 빳빳하고 건조한 상태 그대로였다. 성능도 처음과 다름이 없었다. 명수는 백일몽을 다양한 방법으로 사용했다. 주된 사용은 원초적 욕망을 자극하기 위한 것이었다. 유명 여자 연예인에서 시작한 은밀한 욕망은 이제 근처 지인까지 확대됐다. 더 자극적인 마약을 찾는 중독자처럼 명수도 더 자극적인 상상을 했다. 죄책감은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혀끝에 단맛이 느껴지면 사라질 헛된 저항이었다.
상자 속 백일몽의 수는 상당했다. 매일 네 개씩 사용해도 한 달은 충분히 사용할 만큼이었다. 명수는 백일몽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사용할수록 능숙해졌다.
‘백일몽은 자신이 상상하는 내용을 그대로 재현해준다.’
그 말은 있는 그대로 사실이었다. 꿈의 내용이 어떻든지, 얼마나 길던지 간에 백일몽은 이를 충실히 재현했다. 내용이 길수록 꿈에 빠져 있는 시간을 길어졌지만, 항상 완벽하게 재현해냈다. 미처 생각하지 못 했던 소소한 것들은 명수의 상상력에 의해 채워졌다. 백일몽은 훌륭한 가이드처럼 그의 욕망을 구석구석 안내했다.
가끔 일어나 허기를 달래기 위해 라면을 먹었다. 라면이 익는 것도 기다리지 못 하고 먹을 수 있을 정도만 되면 허겁지겁 달려들었다. 먹는 시간이 아까울 만큼 백일몽에 빠져들었다.
쿵쿵쿵.
백일몽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때가 된 걸까? 현승일 거라 생각했다. 명수는 이 날을 두려워했다. 동시에 기대했다. 백일몽이 줄어들 때마다 겁이 났다. 백일몽을 사용하지 않고 잠을 잘 때면, 하나 남은 백일몽을 피우며 좌절하는 자신을 보았다.
[누구세요?]
[주인아줌마. 문 열어요.]
어깨에 힘이 빠졌다. 명수는 문을 열고 머리만 빠꼼 내밀었다.
[무슨 일이세요?]
[월세가 안 들어왔어. 어머니가 요새 바쁘신가봐?]
명수는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었다.
[잠시만요.]
명수는 컴퓨터 옆에 돈을 쥐었다. 그리고 대충 세어 월세 값을 맞췄다. 그리고 주인아줌마에게 건넸다. 주인아줌마는 그 돈을 받아 눈앞에서 세기 시작했다. 주인아줌마는 어떤 동물의 가죽인지 몰라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코트를 입고 있었다. 검은 코트 위에 보라색 숄을 걸쳤는데, 죽은 박쥐를 어깨에 잔뜩 얹은 것처럼 보였다. 진한 화장은 원래 의도와 달리 저속한 이미지로 부각됐다.
[맞네요. 다음부턴 조금 더 일찍 넣어줘요. 그래야 서로 편하지. 안 그래?]
주인아줌마는 지갑에 돈을 밀어 넣으며 말했다.
[수염 봐. 가끔 산책도 좀 하고 그래요. 집에만 있으면 안 좋아.]
주인아줌마는 시시콜콜한 참견을 몇 마디 더 하고 떠났다. 명수는 문을 잠그고 나서야 주인에게 따질 것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난방과 단열. 월세! 하지만 아차 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제 명수에게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명수는 백일몽을 생각했다.
[산책이라……. 그래, 산책이나 할까.]
명수는 가스레인지를 켜고 백일몽에 불을 붙였다. 드넓은 초원과 오렌지 빛깔로 녹아내리는 석양을 상상했다. 백일몽 속에서 명수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 할 산책을 했다.
- 14 -
백일몽은 밤잠을 방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숙면을 취하게 해주었다. 원래도 꿈을 잘 꾸는 편이었지만, 상상을 자주 하는 나날이 계속 된 덕분에 꿈이 잦아졌다. 명수는 자신도 몰랐던 유년 시절과 추억, 상처에 대한 꿈을 자주 꿨다.
그리고 눈을 뜨면 백일몽에 불을 붙여 과거의 자신을 고쳐나갔다. 실수는 사라지고, 잘못은 사과했으며, 바뀐 꿈속은 성공과 행복만 존재했다. 꿈속의 자신은 완벽했다.
현실의 명수는 시들어가고 있었다. 제대로 먹지 않고, 움직이지 않아 팔다리는 뼈마디가 드러날 정도로 말라 있었다. 수염은 엉켜있었고, 제대로 씻지 않은 얼굴에는 기름이 번들거렸다. 요새는 젓가락을 들 때마다 심한 수전증 때문에 식사에 어려움을 겪었다.
‘끊어야 해.’
명수의 머릿속에 맴도는 다짐. 그건 동시에 끊을 수 없다는 확신이었다. 이 달콤함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이제 현승도 어머니도, 화영이란 이름의 그녀도 중요하지 않았다. 백일몽의 달콤함을 대신 할 것은 없었다.
밤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켜놓은 컴퓨터는 새벽 1시를 알리고 있었다. 백일몽을 쥐었던 손을 내려놓으며 명수는 깊은 피로감을 느꼈다. 또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다음날 아침까지 그는 현실이 자신의 마른 몸을 호되게 후려치는 것을 느끼며 버텨야 했다.
그리고 꿈을 꿨다.
- 15 -
화영이었다. 아니, 성주였다. 어쩌면 어머니의 젊은 시절 같았다. 그녀는 단정 짓기 어려운 화려함을 가지고 있었다. 동시에 단아했다. 그녀는 어린 명수를 한 팔로 안아 올렸다. 이마를 맞대고 웃었다.
그녀가 손짓으로 저 편을 가리켰다. 거대한 고목나무가 쓰러져 있었다. 구름 위로 삐죽 솟을 만큼 큰 나무였다. 나무는 경련하고 있었다. 나팔꽃의 무리가 고목나무를 세우고 있었다.
웃음소리가 들렸다. 전화기 너머로 안부를 물었다. 백조의 목소리였다. 고목나무는 이제 초록빛으로 물들었다. 나팔꽃 덩굴 사이로 새순이 올라오고 있었다. 수만 개의 새순은 모두 그녀의 얼굴이었다.
미소였고 행복이었다. 명수는 그것이 좋았다. 따뜻한 느낌이었다.
- 16 -
쿵. 쿵. 쿵.
‘어디선가 들어본 박자인데?’
쿵. 쿵. 쿵.
명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문을 열었다. 저번의 모습과 완전히 똑같은 현승이 서있었다.
[감사합니다. 실례하겠습니다.]
현승은 다짜고짜 명수의 뒤통수를 오른손으로 쓸었다. 예상했던 일이라 명수는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뒤통수에서 뭔가 스스르 하고 빠져나가는 느낌은 예상하지 못 했다. 현승은 뭔가를 손에 쥔 채 한 걸음 물러섰다.
[드디어.]
명수는 현승의 미소를 처음 봤다. 그 미소는 따뜻함이라곤 없는 차가운 미소였다. 성취감 앞에서 짓는 냉철한 미소. 명수는 그 미소가 현승의 이미지에 꼭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현승은 손에 쥔 것을 조심스레 말기 시작했다. 그건 연두색의 잎사귀처럼 팔랑거렸다. 잎사귀가 다 말리고 나자, 그건 시가처럼 보였다. 하지만 시가치곤 색이 밝았다. 착각 같았지만 은근한 향과 빛이 새어나오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고객님. 덕분에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아……. 이게 전부인가요?]
현승은 연두색 시가를 작은 상자에 조심스레 담았다. 그리고 양복 윗주머니에 넣었다.
[예, 전부입니다.]
[전 뭐가 더 있을 줄 알았어요.]
현승은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하지만 기쁜 기색이 물씬 묻어나오는 말투로 대답했다.
[고객님께서는 충분히 잘 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아닙니다.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요.]
[아실 필요는 없습니다.]
현승의 대답에 기분이 상했던 명수는, 그가 꺼내는 것을 보고 기쁜 표정이 되었다.
[마침 백일몽이 더 있습니다. 현금은 없지만 백일몽을 더 놓고 가겠습니다. 제 연락처는 있으시죠?]
[네……. 네.]
명수는 명함을 떠올렸다. 추리닝 바지 안에 있을 것이다. 현승은 언제나처럼 자신이 할 말을 마치자마자 목례를 했다. 그리고 철문을 열었다.
[좋은 하루되길 바랍니다.]
[예, 그 쪽도요.]
명수는 어색하게 인사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평소라면 의아해 할 지금 상황이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 명수의 눈은 현승이 새로 놓고 간 상자에 향했다. 현승은 탐욕스런 명수의 시선을 못 본채 하고 철문 뒤로 사라졌다.
허기가 느껴졌다. 가만 되짚어보니 엊그제 스테이크 말고는 먹은 것이 없었다. 아니, 스테이크는 백일몽을 통해 먹은 것이었다. 꿈과 현실이 엉킨 실타래를 조심조심 당겨보니 삼일 전에 먹은 라면이 마지막 식사였다. 배가 고팠다.
명수는 냄비에 수돗물을 담고 가스레인지를 켰다. 물이 끓기도 전에 라면부터 넣었다. 마음이 급했다. 명수는 조금 더 참지 못하고 새로 받은 백일몽 상자를 열었다. 거기엔 처음 받은 것보다 조금 많은 양의 백일몽이 있었다. 지금 사용하는 것도 반 정도 썼으니 앞으로 3개월은 너끈한 양이었다. 명수는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그건 곧 커다란 폭소가 되었다.
[와하하하!]
좁은 방에 누워 명수는 팔다리를 휘저으며 웃었다. 명수는 두려웠다. 현승이 찾아오고 자신의 행복이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 온갖 무서운 상상이 들었다. 그 때마다 백일몽을 도피처 삼아 도망쳤지만 이따금 찾아오는 ‘밤의 악몽’은 벗어날 수 없었다. (매일 밤 꿔야하는 진짜 꿈은 도저히 명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로서 두려움도 끝났다. 현승은 불행 대신에 행복을 한 상자 더 두고 갔다.
[흐음.]
명수는 새로 온 백일몽을 꺼내 향을 맡아보았다. 아무 향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짜릿짜릿한 쾌감이 몸을 관통했다. 어서 사용하고 싶었다. 지금까지는 백일몽에 불을 붙이고 그릇 위에 가만히 올려두고 사용했었다. 재가 남지 않았기에 문제가 없었다. 명수는 며칠을 사용해 보고 깨달은 것이 있었다. 백일몽은 타고 있는 동안 뜨겁지 않았다. 불이 붙어있는 동안에도 겨우 체온 정도의 온도를 유지했다. 설명할 수 없었지만, 백일몽을 손에 쥐고 꿈을 꿀 수 있을 정도였다.
명수는 오늘 입에 백일몽을 물고 꿈을 꾸고 싶었다. 향이 진하고 가까울수록 꿈이 강렬할 것만 같았다. 근거도 없는 확신이었지만, 이번에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동시에 여러 개를 태워도 좋을 것 같았다. 아까운 짓이지만 시도해 볼 의향은 충분했다. 명수는 라면을 끓이던 불을 이용해 백일몽을 태웠다. 그리고 입에 물었다.
명수는 허기를 잊었다. 라면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명수는 그렇게 새로운 꿈으로 빠져들었다. 꿈으로 빠지기 직전 명수는 뭔가를 잊었단 사실을 알았다.
라면 물이 보글보글 끓어 넘치고 있었다. 명수는 그걸 멍하니 바라 봤다.
덜컥 겁이 날 정도로 중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무엇인지 도통 기억나지 않았다. 오늘 밤에 자신이 꿨던 꿈.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수증기 틈에 섞인 연기를 솎아내는 것처럼 기억의 단편 속을 뒤집었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마치 그것은 반드시 기억해내야 할 무엇이라고, 본능이 처절하게 외쳤다. 하지만 없었다. 머릿속 어디에도 없었다.
‘기억 해내야 하는데…….’
명수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내 꿈에 빠졌다.
- 17 -
명수는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무거운 피로감과 눈을 떴다. 지금이 오히려 꿈으로 느껴질 만큼 강렬한 충격이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몸이 무거웠다. 평소처럼 상큼한 기분으로 눈을 뜨지 못 했다. 하지만 만족감은 배가 되었다. 입에 물었다는 것만으로도 이 정도야? 명수는 놀랐다.
이번에는 다섯 개비를 손에 쥐고 일어섰다. 하지만 몸이 무거웠다. 제대로 설 수 없었다. 구역질이 났다. 입에서 침이 조금씩 흐르고 있었다.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명수는 가스레인지 위에 끓어 넘친 냄비를 옆으로 밀쳤다.
가스레인지는 끓어 넘친 라면 국물로 지저분했다. 명수는 다섯 개비의 백일몽에 물을 붙이기 위해 가스레인지를 돌렸다.
치치치.
방을 채우고 있던 도시 가스와 방 안의 모든 백일몽이 불꽃에 삼켜졌다. 명수는 강한 불빛에 넋을 잃었다.
- 18 -
현승은 명수의 집 앞에 머물러 있었다. 검은 외투를 단단히 여민 채, 겨울에는 어울리지 않는 선글라스를 쓴 상태였다. 시선은 명수가 사는 건물 3층에 고정되어 있었다. 인적이 아예 없는 거리는 아니라 종종 이상한 시선을 받았다. 하지만 현승은 신경도 쓰지 않고 3층만 바라봤다. 현승이 집을 떠난 지 네 시간이 지난 시간이었다.
곧 일이 터질 것이다. 어떤 형태일지는 모르지만, 어김없이 일어날 것이다.
거리가 일순간 조용해졌다. 조용해졌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짧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3층을 응시하던 현승은 전말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슬로우 모션처럼 눈앞에서 벌어졌다. 가로 30cm 정도 되는 작은 창문에 금이 갔다. 파편은 내부로 잠시 빨려 들어갔다가 폭발하며 밖으로 튀어나갔다. 파도의 잔물결처럼 하늘로 흩뿌려진 유리 파편 뒤로 새빨간 화염이 따라왔다. 그리고 침묵의 순간은 끝났다.
콰아앙!!
[꺄아악!]
폭발음이 들리고 지나가던 행인이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 쥐고 앉았다. 현승은 눈을 돌리지 않고 폭발한 3층을 바라봤다. 건조한 겨울 날씨 때문에 불길은 금방 거세졌다.
[뭐야? 뭐야?]
[저기! 저 건물!]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질문에 누군가가 대답했다. 구경꾼이 몰렸다. 건물 3층은 화염이 넘실대고 있었다. 검은 연기가 거대한 애벌레처럼 건물을 타고 올라갔다. 비명을 지르며 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건물에서 자취하는 학생 무리였다. 하지만 그 무리 속에 명수는 없었다. 건물 안에서 무엇이 폭발하였는지 펑 소리가 한 차례 들렸다.
[119! 빠…… 빨리 전화해요. 세상에!]
[제, 제가 할게요.]
넋을 놓고 있던 젊은 여학생이 작은 백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현승은 구경꾼을 피해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 하지만 눈동자는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 3층에 연결된 것처럼 꼼짝 않고 있었다.
구경꾼이 제법 되었다. 근처 하숙집과 가정집 사람들이 모두 나와 구경하고 있었다. 건너 건물 사람들은 창문을 열고 불구경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좁은 골목을 통과해오는 소방차와 구급차가 보였다. 살수차가 물을 뿜어댔고, 구급 대원이 안으로 뛰어 들었다. 차가운 물이 구경꾼에게도 튀자 짧은 불평이 들렸다. 5분 쯤 지나서 구급 대원 하나가 검은 덩어리 하나를 안고 나왔다.
검은 덩어리의 머리로 추정되는 위치에 산소마스크가 걸려있었다. 하지만 이미 사람이라고 하기엔 너무 새까맣게 타 있었다.
[비켜요. 비켜!]
앳되어 보이는 경찰 청년이 현승을 밀어냈다. 현승은 검은 덩어리를 선글라스 너머로 살피다 이윽고 확신을 얻고 몸을 돌렸다. 구경꾼 너머로 나온 그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예, 구명몽(求命夢)입니다. 이번엔 제대로 구했습니다. 회장님.]
전화 너머에서 목소리가 대답했다. 기뻐하는 목소리였다.
[맞습니다. 판매자의 죽음은 방금 확인했습니다. 판매자의 꿈을 가져가고 12시간 이내에 판매자의 죽음. 분명히 '목숨을 구하는 꿈' 맞습니다. …… 예, 그럼 지금 찾아뵙겠습니다. …… 가격은 전과 동일하게 부탁드립니다.]
현승은 전화를 끊고 사건 현장을 다시 돌아보았다. 구경꾼 너머로 나무옹이처럼 흉하게 구멍 난 건물을 보았다. 짧은 탄식이 들렸다. 3층의 살았던 누군가가 죽었다는 소리가 들렸다.
현승은 양복 앞주머니의 상자를 꺼냈다. 상자에서는 초록색 빛이 안개처럼 새어나오고 있었다. 예부터 꿈은 함부로 다루는 것이 아니었다. 태몽을 팔았다가 평생 아이를 낳지 못 하게 된 여인도 있었고, 왕이 될 꿈을 흘리고 다니다 참수 당한 양반도 있었다. 꿈을 다루는 점술가가 생길 정도로 우리 민족은 꿈을 중시했다.
꿈을 다루는 직업은 언제나 존경시 되고 조심스레 다뤄졌다. 하지만 근대화 이후 가업은 가난에 허덕였다. 현승은 자신의 비밀스러운 가업(家業)을 돈벌이로 바꾸었다. 싸구려 환각이나 다름 없는 꿈으로, 다른 이의 꿈을 산다. 그것은 재상이 되는 꿈이나 목숨을 구하는 꿈처럼 '현실'의 운명을 바꾸는 꿈이었다. 상자 속에 담긴 '목숨을 구하는 꿈'도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누군가에게 팔릴 예정이었다. 이 꿈을 꾸면 얼마간 목숨을 연장할 것이다.
[거짓말을 죄송합니다. 김명수 고객님.]
현승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 19 -
패딩을 입은 학생 하나가 까치발을 들며 응급차를 봤다. 사망한 환자는 구급 조치도 없이 구급차에 실리고 있었다. 덮인 하얀 천 밑으로 삐죽 나온 팔은 까맣게 그을려 덜렁거렸다. 타버린 팔은 기름이 흐르고 있었고 매캐하고 고소한 냄새가 났다. 그건 사람의 팔이라기보다 기묘하게 구워진 고기 덩어리였다.
패딩 학생은 옆에 선 여자 친구의 만류에도 사건 현장을 끈질기게 지켜봤다.
[빨리 가자니까. 나 속 안 좋아.]
[조금만. 조금만.]
여자 친구로 보이는 여학생은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얼굴을 찌푸렸다. 사건 현장에 시선이 갈까봐 억지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패딩 학생은 휴대폰으로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젊은 경찰은 패딩 학생을 혼을 내고 돌려보냈다. 응급차에 탄 구급 대원 둘은 한숨을 내쉬었다. 출발할 때의 긴장감은 짙은 실망으로 바뀌었다. 산 사람을 태우고 가는 것에 비해, 죽은 시체를 운반하는 것은 슬픔이 배가 되었다. 구급 대원 둘은 침묵을 지키며 앉아 있었다. 조금은 꿈을 꾸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사이렌 없이 덜컹거리는 응급차 뒤편에는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이 있는 축에 속한 구급 대원이 말했다.
[우리가 좀 더 빨리 도착했다면 구했을 텐데.]
[이럴 때가 가장 힘든 것 같아요.]
[맞아…….]
건장한 체격의 중년 남자는 눈을 감았다. 한숨을 내쉬었다. 젊은 축에 속한 구급 대원이 불현듯 물었다.
[어디서 꽃향기 안 나요?]
[글쎄…….]
두 명의 구급 대원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어디선가 가만히 피어오르는 꽃향기를 맡았다. 그리고 병원에 도착하고 아주 기묘한 경험을 했다.
사이렌 없이 오는 병원차는 두 가지 상황을 의미한다. 환자의 무사 귀환이거나 죽음. 병원 의사들은 ‘환자가 아주 무사해서 다행이었다. 일찍 도착했다.’라는 구급 대원의 말을 듣고 흰 천을 치웠다. 의사들만큼이나 구급 대원은 깜짝 놀랐다.
[이럴 리가 없어요. 분명히 구했는데, 그죠? 최 선생님?]
최 선생으로 불린 남자도 입을 꾹 다물었다.
시체는 검댕이가 잔뜩 묻은 바싹 마른 장작처럼 보였다. 무언가 잔뜩 양 손에 쥐고 몸을 웅크린 자세였다. 그리고 아주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꽃향기가 마지막 겨울바람에 흩어졌다.
죽음만 기다리던 거대한 고목나무는 생명을 얻고, 새순은 바람을 되살렸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6 21:04:52:
